☆˚ 맑음시

2010 발표작(2)

전숙 2010. 7. 7. 15:01

 

‘톡’하고 저 공터에 누가 살구씨를 뱉었을까

                                전숙

공터에서 첫눈을 떴을 때

눈 맞추어주는 이 아무도 없어

살구씨는 눈을 감아버렸다

소망영아원에서 효선이가 ‘으앙’하고

눈을 감아버린 것처럼

뒹굴던 쓰레기더미의 발효된 음식찌꺼기가

살구씨에게 젖을 물렸다

가짜젖꼭지를 빨며 효선이가 잠든 것처럼

살구씨도 쓰레기엄마에게 안겨

어느새 우람한 청년이 되었다

살구나무는 이제 제 마음을 분홍빛으로 물들여

효선이에게 보여줄 수 있었다


효선이가 고아원으로 떠난 뒤에

살구나무는 분홍빛 마음을

누구에게도 열어 보이지 않았다

모두들 살구나무가 죽었으려니 여겼다

누군가 쓰레기봉지를 나무의 발치에 버렸다

그러자 모두들 쓰레기봉지를 살구나무그늘에 버렸다

그늘은 점점 넓어지고 공터는 점점 어두워졌다


효선이가 영아원보모로 돌아오던 날

영아원 밖 공터는

잔칫날처럼 안방도 부엌도 마당도 환했다

살구나무는 머리에도 손에도 등에도

알전구를 줄줄이 달아내어 분홍빛 마음을 밤새 켜두었다

지나가는 사람마다 고개를 빼고 공터를 들여다보았다


‘톡’하고 저 공터에 누가 살구씨를 뱉었을까.




죽은 길

                      전숙


꽃 피는 봄날 꽃무덤이 된 길이 있다

새 길이 나자 헌 길은 미동도 없이 누워있다

봄이 오고 꽃들은 약속처럼 돌아왔지만

사모하던 눈동자 이미 희미하다

꽃들의 시선은 치매노인처럼 헤매이고

헌 길 옆 카페 주차장, 즐비하던

자동차들 옛 기억만 바퀴자국으로 남아있다

검은 비닐봉지는

걸쇠에 발목 잡혀서 콧방울 벌름거리는데

지나가는 발걸음이 멈추자

길이 따라죽고

길이 죽자 길옆 카페도 죽어버렸다

깨진 유리창 틈새로

향기 그윽하던 봄의 왈츠는 청각을 잃고

귀퉁이 찢긴 메뉴판은 맨바닥에서 선잠이 들었다

집단자살인지 집단학살인지

꽃잎들 죽은 길 위로 뛰어내린다

새길 따라 어언 간에 새꽃길이 생겨나고

내 묵은 길에 추억의 꽃은 여전히 피어나는데

꽃구경 오는 이 아무도 없어

내 꽃때도 따라 죽는다.


리토피아2010여름

바람을 위하여

                           전숙


스스로 입을 지워버린 어미가 있다 황금빛

명주실을 잣는 황금누에는 우화하는 순간 입이

퇴화된다 생의 절정에서 배란에 집중하던 모성은

별을 향해 날던 나무가 거치적거리는 팔을

떼어내고 옹이를 만들 듯 입을 꿰맸다


하늘이 땅이 되고 땅이 허방이 되는 허기의

번뇌에서 날개는 정지한 듯 보이지 않는

속도의 퍼덕임으로 어미의 강을 날았다 맨땅에서

버둥거리는 날갯짓은 바윗덩이를 매단 자맥질이었다

어미는 삭아 내리는 날개를 옹이 박힌 입으로 핥았다

날 수 없는 날개는 눈물이었다


어려운 시절 부황증 든 어미가 많았다 오랜

가뭄에 지친 저수지가 수문을 닫아걸 듯

스스로 곡기를 끊은 어미 강은

말라붙다가 말라붙다가

황금누에가 우화하던 날 풍선처럼 부풀어올랐다


바람이 된 혼신의 날갯짓

비행운처럼 깃털 하나씩 뽑아내며 멀어진다

우주 어디에선가 시방

어미의 눈물이 빅뱅을 일으키고 있다. 









반지

                                                  전숙


 어머니 칠순 무렵이었습니다. “막내야, 알반지 하나 맹글어온나.” 어머니는 뜬금없는 통사정을 하였습니다. 새 옷이며 금붙이며 한사코 손사래 치던 상시의 어머니 일은 아니었습니다.


 칠순 날 자수정반지가 어머니 약지에서 빛났습니다. 일순 고실라진 꽃대에 반짝 물올랐습니다만 약지는 딱 하루만 호사하였습니다. 아까운 반지는 장롱에 귀히 모셔져 있다가 식구들 모이는 명절에만 어머니 약지에서 다시 환하게 웃곤 하였습니다.


어느 때쯤부터 명절에도 어머니 약지가 빈자리였습니다.

 

세월의 어금니에 뭉그러지던

팔순의 무게와 부피는

조금씩 헐거워지더니

어머니는 생의 반지에서 아예 흘러내리고 말았습니다


장롱 깊은 곳, 빛바랜 자수손수건에 서너 겹 고이 싸인

반지의 약지에서

어머니, 빛나고 있었습니다

눈가에는 네 겹 잔물결 오지게 일렁였습니다


반지를 문지르니

“옆집 새댁 알반지 참말로 곱드랑께.”

어머니....... 꽃시절, 들렸습니다.



시와사람2010여름

필식아재

                       전숙


필식아재가 대폴기화분을 마당께에 두고갔는디

오는 냥반 가는 냥반 대폴기를 갈킴시롱

살랑가죽을랑가 물음표를 찍드랑께

그 와중에 대폴기화분이

비바람에 그만 홀라당 넘어져부렀제

와따 그란디, 필식아재가

화분을 일쒀서 흐트러진 흙을 쓸어담드만잉

유리창 밖 풍경을 모른 척 나가 다 봐부렀네

버버리인 필식아재

나헌테는 안 디킨

대폴기의 구조요청을 어찌 들었으까 잉

암만 생각혀도 신통방통허데

헌디 어째야쓰가잉 대폴기는

날이 갈수록 누렇게 시드러불데

살랑가 쪽 물음표보다

죽겄네 쪽 마침표로 심이 쏠리드만

진작시부터 화분을 치우라고

성화대는 냥반도 솔찬해불었제

그란디, 아적이면 필식아재가 암도 모르게

대폴기에 물을 주고 가더란말이시

내가 겁나게 거시기해불드만

언젠가는 참말로 대폴기 잎사구가

폴새키처럼 푸르딩딩해지는 것도 같드랑께

인자봉께 살랑가죽을랑가 물음표 고것이

대폴기와 필식아재의 사랑쌈이드란말이시

그라니 내가 어쩌야쓰겄능가

턱 받치고 즈그들 두 맴을 지켜볼밖에, 암만

긍가 안 긍가?


2010원탁시55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