맑음시평

대한문학시평-2013봄호-인연들끼리의 피돌기---전숙

전숙 2013. 5. 23. 11:35

 

계간평 -대한문학 2013년 봄호-시

                   

인연들끼리의 피돌기

                                   전숙(시인)ss8297@hanmail.net

코스타리카에서는 바다거북들이 자신이 태어난 고향의 해변으로 돌아와서 알을 낳는 일을‘아리바다’라고 부른다. 단어가 한 편의 시처럼 울리는 ‘아리바다’는 현지어로 ‘도착’이라는 뜻이다. 매년 8월부터 11월까지, 바다에 하현달이 뜨면 수만 마리의 바다거북이 중앙아메리카 오스티오날해변으로 몰려온다. 고향에 돌아와 알을 낳기 위해 4,000km의 바다를 건너온 것이다. 태평양 전역에서 달려온 수만 마리의 바다거북은 뭍으로 올라와 길이 800m 남짓한 좁다란 해변에 구덩이를 판다. 거북 한 마리가 깊이 40cm, 직경 20cm 정도의 구덩이에 낳는 알의 수는 평균 105개, 부화기간은 50여일이다. 부화기간이 50일이라는 것은 바다거북의 유전정보가 얼마나 과학적인지를 알려주는 수치다. 어미거북은 왜 하현달이 뜰 때 알을 낳으러 올까? 보름달이 뜨면 해변이 더 환해서 어미가 산란을 하기 위한 구덩이를 파는 일이 훨씬 수월할 텐데 말이다.

 거기에 바다거북의 모성이 숨어있다. 모성은 무엇인가? 자신을 희생하고 자신의 희생 위에 자식을 꽃피워내는 것이 모성이다. 여기에서 부화기간이 50일이라는 의미를 살펴보자. 하현에서 50일이 지나면 정확히 보름이다. 새끼거북의 부화하는 시기가 보름에 맞혀져 있다. 새끼거북이 바다로 돌아가는 유일한 지표는 빛이다. 보름달빛이 휘영청 반사된 달빛바다를 향하여 새끼거북은 무모할 정도로 온몸을 던져 전진한다. 그러니 어찌 어미거북이 저 편하자고 보름달을 제 달로 삼을 것인가. 방금 눈뜬, 오로지 빛만이 생의 지표인 새끼에게 기꺼이 보름달을 내어주는 것이 모성이다.

 알에서 깨어난 새끼거북들은 꽃잎처럼 가슴에 돋아나는 별을 헤며 저를 부르는 바다를 향하여 기어간다. 도중엔 오소리, 독수리, 이구아나 등 허기진 목구멍들이 호시탐탐 노리고 있다. 어떤 꿈은 눈뜨기도 전에 박살나고 어떤 꿈은 첫걸음이 벼랑이다. 파도소리를 어미의 자장가로 알고 죽을힘을 다해 행진을 한다. 하지만 새끼 거북이 무사히 부화해 살아남을 확률은 겨우 3%다. 그래도 매일 초저녁이면 돋아나는 별처럼 새끼거북의 발걸음은 멈추지 않는다. 이 모든 경이의 발화점은 혈연이라는 인연의 피돌기다.

 그리고 시인은 세계에 산재된 사무친 인연들 간의 뜨거운 피돌기를 이끌어내는 페이스메이커다. T. 칼라일의 말처럼 “시의 혈관은 모든 사람의 마음속에 존재”하므로 시인은 시라는 혈액을 통해 독자와의 피돌기를 관장하는 시의 심장인 것이다.

 「대한문학」 2013년 봄호에 실린 시편들을 보면 시인들의 ‘인연’에 대한 피돌기의 사유들이 깊다.


누구냐

나 이리로

돌리우는 끈끈이

두 마음 하나로도

합해지는 일월인데

떨어져 기다린 표정

꽃처럼 설운지고


불어서

말리우는

눈 흘김도 아실까

설익은 밥알 깨어

봉함 정성 그 사연을

둥글쩍 칠해 가느니

솟아오른 추억 하나

     -노창수의 <편지를 봉하며> 전문

 

 끈끈이는 무언가를 붙게 하는 끈끈한 물질이다. 이 텍스트에서의 끈끈이는 ‘끈끈한 인연’을 은유하고 있다. 우리는 설이나 추석 같은 대명절이 오면 온 국민이 귀성전쟁을 한바탕 치른다. 그렇듯 우리에게 인연은 특별하다. 학연, 지연, 혈연, 하다못해 계모임의 인연까지, 내 몸과 내 마음을 끈끈이주걱처럼 유혹한다. 떨어지면 보고 싶고 다시 만날 시간을 기다리며 청사초롱을 내걸고 사립문을 닫지 못한다. 나비를 기다리는 꽃처럼 만나는 그 순간까지 그리움에 잠기고 서럽다. 나를 기다리는, 그래서 기어이 나를 이리로 돌리우고야 마는 ‘그 누구는’ “설익은 밥알 깨어/봉함”을 하며 “불어서/말리우는” 나의 지극한 “눈홀김을 아실까”정성스런 사연을 봉할 때 인연의 피돌기에 의해 둘만의 추억이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른다. 편지봉투 위로 아련하게 솟아오르는 해후의 정경이 눈에 선하다.


싸락눈 같은

그 순백의 꽃을 피우기 위해

팔월의 따가운 태양

머리에 이고

비지땀 훔쳐가며 고무레를 힘껏 밀고 당기며

무량의 고통 속에 발을 담그고


때로는 외롭고 힘겨워도

애오라지 자식 위해서라면

이마에 깊게 패인 주름살이며

거뭇거뭇 돋아나는 저승꽃이

무슨 대수인가

          -박행자의 <소금창고> 부분

 

 소금을 만드는 일은 우리가 상상하는 어떤 일보다도 힘든 극한 직업이다. 게다가 소금은 염부의 땀만으로는 만들어지지도 않는다. 선한 이웃 같은 햇살과 바람이 도와야한다. 방황하는 청춘만큼의 “팔월의 따가운 태양”아래서 “비지땀 훔쳐가며”“무량의 고통 속에 발을 담그고” “고무레를 힘껏 밀고 당”겨야만 ‘순백의 꽃’인 ‘소금꽃’이 피어나게 된다. 바닷물이 여러 증발지를 거치면서 염도가 높아지고 정육면체의 소금으로 완전한 결정이 만들어지기 전에 염전 위로 하얗게 엉기는 현상이 소금꽃이다. 소금꽃을 보고서야 염부들은 비로소 허리를 펴고 이마의 땀을 닦는다. 그런 고통을 견디고 소금꽃을 피우는 이유는 “애오라지 자식 위해서”다. 자식만 잘된다면“때로는 외롭고 힘겨워도” “이마에 깊게 패인 주름살이며/거뭇거뭇 돋아나는 저승꽃”도 “대수”가 아니다. 오히려 저승꽃도 소금 꽃처럼 어여쁘게 보인다. 그것이 부모의 헌신이고 모성이 품은 사랑이다. 염부의 눈물의 짠맛이 배인 소금꽃을 보고 있노라면 마치 보름달처럼 세상의 온갖 형상의 인연들이 짠하게 들여다보인다.



땅의 몸냄새와 나무들의 발가락 냄새가 나고

풀들의 눈물 냄새가 나고

희미하게 밤꽃냄새와 어머니의 젖비린내가 나는 곳

독수리떼의 비수 같은 발톱과

몇 달이나 굶주린 곰들의 아가리가 폭포처럼 기다리고 있다

5000km를 거의 다 와 마지막 장애물을 뛰어넘는 순간

꿈이 곧 죽음이 되니

...중략...

생명은 이어달리기 경주

우리는 모두 이어받은 바톤을 다음 주자에게 반드시 넘겨주어야 한다

   -강준철의 <목숨을 건 사랑> 부분


 연어의 모천으로의 회귀현상은 모성의 극치라고 할 수 있다. 넓은 바다에서 생활하던 연어는 산란기가 되면 자신이 태어난 강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모천회귀본능이 있다. 보통 2만여km의 거리를 되돌아가 솜처럼 지치고, 깨지고, 터지고, 찢긴 상처투성이 몸으로 산란을 한다. 알을 낳은 후에는 알에서 깨어날 새끼들의 밥이 되기 위해 기꺼이 모천에 목숨을 바친다. 도저히 인간의 감정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것이 연어의 우주적인 모성이다.

‘허슬’의 주장대로라면 '연어는 태어나면서부터 바다로 나갈 때까지 자신이 태어난 강의 냄새를 기억하며 그 냄새에 의존하여 회귀한다.'고 한다. 강한 피 냄새도 아니고 온갖 냄새가 혼합되었을 강의 냄새를 맡아가면서 몇 년 만에 2만여km를 헤엄쳐 어김없이 되돌아가다니, 이렇게 되면 인연도 보통 인연이 아니고 그 인연에 따른 피돌기도 감히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경이’라는 단어 밖에는 달리 할 말이 없다. 그 모든 것이 가능한 이유는“생명은 이어달리기 경주/우리는 모두 이어받은 바톤을 다음 주자에게 반드시 넘겨주어야” 하기 때문인 것이다.


어릴 적 처마 속의 참새 알을 꺼내려고

손을 들이밀었다가

문득 잡힌 어미 새의 불안한 온기

그 떨림,

그 공포,

그 걷잡을 수 없는 울음처럼

새해 봄날,

내 머리 위로 눈이 내린다


무슨 말씀같이,

무슨 다짐처럼

        -곽진구의 <영춘유감> 전문


 참새는 우리나라 전국 어디에서나 쉽게 볼 수 있는 흔한 텃새다. 가을과 겨울에는 무리생활을 하지만  번식기에는 무리가 떨어져 둥지를 짓고 암수가 짝지어 생활한다. 돌담 틈새나 오래된 나무 구멍, 처마 밑 등에서 번식한다. 둥지는 주로 마른풀을 이용하여 만들고 황갈색 바탕에 갈색 반점이 있는 알을 4~8개 정도 낳는다. 알을 품은 지 2주정도면 부화하고 부화한지 2주 정도 암수가 함께 새끼를 돌본다. 알에서 독립하기까지 한 달 정도가 참새의 육아기간이다. 이 시기에 어미와 아비의 온 신경은 아기에게로 쏠려있다. 알을 도둑맞을까봐 노심초사하고 새끼를 굶겨 죽일까봐 한시도 몸을 쉴 수가 없다.

 부모참새들의 그런 노심초사를 알리 없는 시적화자는 오로지 참새알에만 눈독을 들이고 참새둥지에 손을 들이민다. 그러나 “문득 잡힌 어미 새의 불안한 온기”에 시적화자는 깜짝 놀란다. “그 떨림,/그 공포,/그 걷잡을 수 없는 울음”이 화자에게로 전달되어 죄의식처럼 시인의 기억에 각인되어 있다. 세월이 아무리 지나도 어미참새에게서 전달된 불안한 온기는 시인의 손끝에 남아있어서 “새해 봄날,/내 머리 위로 눈이 내”리는 날, 나에게 “무슨 말씀같이,/무슨 다짐처럼” 시적 에피파니(epiphany)의 순간이 온다. 그 다짐은 새삼스러울 것도 없이 어미참새의 불안한 온기에서 깨닫게 된 모성에 대한 외경심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어디야라는 안부는

너가 필요해 사랑한다는 속살이

스며있는 참으로 행복한 단어

끝까지 나를 붙잡아주는 말이다

         -문시아의 <어디야> 부분


 “어디야‘라는 말은 생면부지의 사람에게는 절대로 할 수 없는 말이다. 그것은 어떤 식으로든 나와 인연이 닿은 사람, 그것도 마음의 텃밭과 아주 근거리의 인연이다.  ‘우리 서로 연결된 끈끼리 피돌기를 한번 해봅시다.’라는 말이다. 시인은 그것을 ”너가 필요해 사랑한다는 속살이/스며있는” 이라고 표현한다. 이름도 모르는 혹성에 홀로 떨어져 외롭고 쓸쓸한 영혼을 “끝까지  붙잡아주는 말”인 것이다. 지금 머리에 떠오르는 누군가에게 전화해서 ‘어디야’하고 물어보자. 갑자기 무주공산인 오늘밤에 나를 붙잡아줄 약속 하나가 잡힐지도 모르는 일이다.


언제부터인가

내가 나를 찾는 시간


동구밖 감나무 앙상한 가지 끝

남겨둔 까치밥, 홍시 하나.

         -박일동의 <여심> 부분


 까치밥은 늦가을에 감을 딸 때, 까치 따위의 새들이 겨우내 쪼아 먹을 수 있도록 일부러 남겨두는 감이다. 김종시인은 우리의 ‘까치밥’ 때문에 “오천년이 무탈하였다”고 노래했다. 까치밥은 홍익인간의 전통이요. 나 아닌 남을 배려하는 최초의 풍습이나 관행이다. 그것은 숨표요, 휴식시간이요, 일요일이요, 안식년이다. 위 텍스트의 시적 주체는 “내가 나를 찾는 시간”에 누군가 남겨둔 까치밥인 홍시 하나를 본다. 시의 제목이 여심(餘心)이다. 한 생을 복닥거리고 살았을 시적화자는 “언제부터인가” 나를 찾게 되었다. 망중한처럼 모처럼의 여유로워진 시간에 든 시적주체는 그동안 눌러두었던 ‘나’를 찾는 시간이 오자 무심코 지나쳐버렸던 ‘까치밥’이 보인다. 그것은 시골이 고향이라면 누구나 갖고 있을 추억이고 고향과의 연결고리다. 고향은 우리 모두에게 넉넉하고 등 다순 모성의 기억이다. 시적 주체는 비로소 여심(餘心)에 들었을 터이다.


낫 놓고 ‘ㄱ' 자 모르시던

까막눈 울 아부지


거꾸로 받아진 아들 편지

무슨 사연인지 훤히 아는

심안(心眼)의 울 아부지

 -방창록의 <울 아부지>부분


 뛰어야 벼룩이고, 부처님손바닥이라는 말이 실감나는 텍스트다. 시를 읽으면서 미소가 상큼 떠오른다. 시인의 세대의 부모님들은 아마도 까막눈이 대부분이셨을 것이다. 그래서 너나 할 것 없이 까막눈부모님을 두었어도 부모님 슬하를 벗어날 수 없다.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돌아다보면 거기에 부모님이 부처님처럼 웃고 계신다. 그리고 어느새 시인 자신도 자식을 보는 심안이 활짝 개안(開眼)된 그런 부모가 되어있을 것이다. 아, 보이지도 만져지지도  않는 인연이라는 그 끈적한 끈의 무한 장력(張力)에 경의를 표할 밖에


내 아내는 돌이다

홍수로 패인 냇가에 지천인 돌,

그 중에 모나지 않는 둥글납작한 돌 하나가

울 집에 왔다.

고이 씻겨 베란다 양지 장독대에 얌전히 앉아 있다.

...중략...

시커먼 짠 간장에 온통 절이고 배여서 콩잎을 삭힌다.

콩잎과 똑같이 자신도 함께 몇 달 동안을,

하도 무뚝뚝 하길래 삼십 년을 돌아돌아 캤는데, 이게 아내아이가?

웃기돌 같은 그 여자!

    -손수여의 <반추-웃기돌 같은 여자-> 부분

 

 ‘웃기돌’은 콩잎이 간장 위로 뜨지 못하도록 눌러두는 돌이라고 시인이 친절하게 텍스트에 설명해두었다. 시적화자는 “모나지 않는 둥글납작한 돌 하나”를 집에 가져왔다. 웃기돌로 쓰기 위해서다. “시커먼 짠 간장에 온통 절이고 배여서 콩잎을 삭”히기 위해서는 웃기돌이 먼저 짠 간장에 절여지고 배야한다. 웃기돌처럼 “무뚝뚝 하길래” “삼십 년을 돌아 돌아” ‘세월’이라는 간장에 재었더니 남편바라지 자식바라지 하다가 어느새 웃기돌처럼 절이고 배여서 시커멓게 삭고만 여자, 시적화자는 그런 아내를 보고 가슴이 뭉클하다. 오죽 미안하고 가엾었으면 시집제목도 「웃기돌 같은 그 여자」로 했을까. 시인의 아내사랑이 무량하다.


문득 산 너머에서 들려오는 소음

그것은 격렬한 개구리들의 경창이었다.


생존의 아우성


걸음을 멈추었다

경창이 아우성을 드높이고 있는데

내 심장의 템포는 다소 빨랐으나 여전히 뛰었고,

피흐름 또한 정상이었다.

7천조가 넘는 내 세포들이 정상 기능을 수행하고 있다고 실감했을 때

나는 지금, 여기에, 살아있는 생명임을 확신했다.

   -윤용흠의 <개구리 경창> 부분


 시적화자는 개구리들의 울음소리가 문득 생존하기 위해 울부짖는‘ 아우성’으로 들린다.  시적화자의 시야 저편에서 들려오는 소리와 시적주체의 심장의 템포가 오버랩 되면서 “7천조가 넘는 내 세포들이 정상 기능을 수행하”는 일이 엄연한 코스모스에 의해 운행되는 우주와 겹친다. 그리고 “나는 지금, 여기에, 살아있는 생명임을 확신”하게 되는 것이다. 개구리와 심장과 7천조가 넘는 세포들이 연상작용을 일으키면서 연기론(緣起論)에 의한 우주의 비밀이 자연스레 독자에게 전달되고 있음이다.


 ‘인연들의 피돌기’그 시작과 끝에 모성이 있다. 나는 이 지극한 모성의 희생을 ‘모성의 윤리’라 부르고 싶다. 모성의 위대함을 어찌 하나둘의 자연현상으로 다 표현할까 만은 꿀벌들의 분봉에도 모성의 윤리가 적용된다.   꿀벌은 분봉을 할 때 나이든 여왕벌이 딸린 식구들을 데리고 정처 없이 집을 나온다. 새로운 처녀여왕벌이 태어나면 천둥벌거숭이인 새끼 여왕벌에게 집을 양보하고 경험 많은 어미여왕벌이 분가를 하는 것이다. 그야말로 모성의 무의식적인 희생이 너무 놀라워 생명에 대한 외경심에 심장이 끓어 넘친다. 꿀벌이나 개미들의 집단지성은 모두가 ‘모성의 윤리’에 그 기반을 두고 있다. 시인의 감성은 모름지기 이토록 전율이 일어날 정도의 지극한 모성에 기대어 있다. 그래서 이 글 모두에서 말한 것처럼 시인이야말로 모든 아름다운 인연을 만들어가는 전초기지이며 피돌기의 페이스메이커인 셈이다. “시는 그것 자체가 아름다운 일이며 시를 쓴다거나 감상한다는 것은 유쾌한 경험이다.”고 말한 C. D 루이스의 말이 새삼 크게 다가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