맑음시평

전숙론-김청우(시인)

전숙 2012. 4. 19. 12:56

 

자연과 내면의 고백,

- 전숙, “눈물에게”(시와사람, 2011)


김청우 (시인, 전남대학교인문학연구소연구원)



1. 자연과 전통적 시선의 재발견 - 전숙의 “눈물에게”


전숙의 시집은 전통적 시선의 재발견을 시집의 구성에서부터 보여준다. 전통적인 동양 예술에서 시(詩)와 서(書), 그리고 화(畵)는 유기적 관계를 맺고 상호보완의 기능을 수행한다. 전숙의 “눈물에게”는 그러한 전통의 연장선상에서, 김종의 상징적인 그림들을 시와 함께 배치함으로써 시 읽는 재미를 부가할 뿐만 아니라 그 의미를 증폭시키기도 한다. 강렬한 색채와 선, 그리고 역동적이면서도 섬세함을 잃지 않는 구성의 그림들은 매력적인데, 그 중에서 특히 단청(丹靑)을 연상시키는 불투명한 원색의 향연이 전숙의 시들과 어울린다는 느낌을 준다. 붉은 계통의 강렬한 색채와 선들이, 시인이 말하는 “순한 눈”을 지키기 위해 돋아난 “가시”, 즉 “눈물”과 연결되기 때문이다.


눈물은 태초에 가시였단다


순한 눈을 지키라고 하느님이 선물로 주셨지


발톱을 세워 달려드는 적들을

가시는 차마 찌를 수가 없었단다


마음이 너무 투명해서

적들의 아픔까지 유리알처럼 보였거든


세상의 순한 눈들은

가시의 방향을 바꾸어

제 마음을 찌르고 말았단다

- 「눈물에게」 부분


가시는 이중적이다. 방어는 공격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을 때 비로소 가능한 것이다. 그러나 그 때문에 방어를 하는 자는 공격하는 자의 아픔을 안다. 따라서 방어를 숙명으로 삼은 자의 선택은 희생으로서의 승화일 수밖에 없다. 로마제정 하의 예수가 그러한 선택을 한 대표적인 인물일 것이다. 그가 썼던 ‘가시관’을 비롯하여 순수함을 의미하는 ‘어린 양’ 등의 상징이, 이 시에서 등장하는 “가시”/“눈물”이나 희생(犧牲)이라는 의미를 구축하고 있는 “소”와 같은 표상과 함께 연상되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이 시집의 곳곳에서, 자연과 희생의 연결은 종교적 모티프에 의해서 일어난다. 그 과정에서 가톨릭적 이미지들은 변주되고 있다. 유럽지역에서 양이 모든 것을 내어주는 ‘포근한 자연상’과 연관되는 동물이라면, 우리 전통사회에서는 소가 그러한 위치에 있는 것이다.

‘희생’의 한자어에 소를 뜻하는 ‘우’(牛) 자가 모두 들어가 있다는 사실은, 우리 전통 사회에서 소가 갖는 위치를 명시한다. 소가 갖는 온순함과 희생, 그리고 너무나도 투명하기 때문에 ‘적’들의 아픔까지도 보여준다는 “눈물”의 어울림은, 알아도 모든 것을 감내하는, 아니, 알기 때문에 오히려 희생하는 자들을 위한 탁월한 시적 인식이다. 알기 때문에 희생을 마다하지 않는 사람들은 과연 누구인가. 가장 먼저 떠올릴 수 있는 존재는 아마도 ‘어머니’일 것이다. 물론 ‘희생’이 곧 ‘모성’ 자체는 아니라는 점, 마찬가지로 ‘모성’ 역시 ‘희생’만으로 규정하기 어려운 것임에는 분명하다. 그러나 우리가 그 둘의 관계를 부정하는 것에도 한계는 있기 마련이다. 우리의 ‘일상적’ 생각은 이 가운데 처해 있다.


아스라한 둔덕을 건너다보며 긴 한숨을 몰아쉴 때

젖꼭지처럼 까맣게 반짝이는 별빛들

어미의 마음으로 누군가 괴어놓았을 징검돌들

(…)

산다는 것은 어찌 보면 같으면서 다른 우리끼리

이름도 없이 빛나는 은하수의 작은 별들처럼

이리 내어주고 저리 덧대어서

서로의 눈물을 괴어 징검돌이 되어주는 일이지요

- 「징검다리」 부분


아닌 게 아니라 전숙의 시들에서 지금까지의 이미지들은 다시 어머니와 고향—전라도 사투리로 대변되는—등과 중첩된다. 어떻게 보면 이러한 전개는 사뭇 진부하게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그는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그래서 이미 우리에게 익숙해진 이미지들의 묶음들을 ‘그저 던져놓지’만은 않는다. 그는 ‘재발견’을 하는 것이다. 각각의 시를 읽고 난 후에 발견하는 이미지들의 조합은 너무나도 익숙하지만, 그 조합에 이르는 과정, 즉 ‘변주’는 남다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시인을 따라, 그가 재발견하는 전통적 시각을 수용하고 때로는 동감하게 되는 것이다. 다음 인용하는 시에서 앞서 언급한 “눈물”이 “끈”으로 변주되는 것을 볼 수 있다. 시에서 무엇보다 끈끈하며 또한 “우주를 먹여 살리는”, 그래서 ‘모성’의 은유인 “끈”은 “뜨겁게 울컥거리”고 “스며들”기 때문이다.


꿩꿩꿩

마침내 무정한 칼날을 맞고도

차마 아주 끊어내지 못해 대롱거리는

끈이 뜨겁게 울컥거리더니

이내 남겨진 알들에게로 스며들었다.

- 「끈」 부분


시인은 자연에서 수많은 어머니들을 본다. 「발굽」에서는 소를 통해 자식들을 먹여 살리느라 “발톱이 발굽”된 어머니를, 「어미물떼새의 셈법」에서는 어떤 경우에도 새끼들을 놓치지 않는 물떼새를 통해 “까막눈”이어도 “새끼들 숟가락 수는 놓치는 법이 없는” 어머니의 사랑을 본다. 그리고 「동굴」에서는 거센 파도조차 동굴 속에 들어가면 온순해지는 것을 보고 “어미동굴”이라고 이름 붙인다. 시인은, 그 동굴도 처음에는 그저 파도에 부딪히던 큰 바위였지만, 구멍이 뚫리고 난 후 “억겁의 세월”이 지난 후에는 ‘대항’을 ‘순응’으로 바꾸고 바로 그 순응의 자세를 통해 거센 파도를 여리게 만드는 힘을 갖게 된 것이라 말한다. 하지만 이러한 사랑이 처음부터 가능한 것은 아니다. 눈물이 ‘적들’의 아픔을 알아보는 시간, 제 몸에 동굴을 만들 때까지 하염없는 파도를 맞아야 하는 바위의 시간, 그리고 「수박」에서 읽을 수 있는 것처럼 몸을 동그랗게 만드는 “변태(變態)의 고통”을 지내고 나야 가능한 것이다.


목마른 사람을 지나치지 못하는 수박은

처음에는 손바닥바가지를 만들어 타는 혀끝을 적셔주었다

(…)

손바닥바가지에서 옹달샘이 되기까지

(…)

육천매듭이 물러나고, 하늘이 찢기고 땅이 입을 벌리는

변태의 고통을 수억 겁 견디어낸 수박은

세상에서 가장 달고 붉은 옹달샘이 되었다

(…)

온 몸이 옹달샘인

이 땅의 어머니들.

- 「수박」 부분


따라서 시인에게 있어서 도처에 편재한 변형과 “무늬”(「유목의 무늬」), “주름”(「주름」) 등은 그러한 고통의 시간을 이기고 희생과 사랑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흔적이다. 그러한 흔적들을 알아보는 일, 그것이 시인이 이 시집에서 말하고 싶은 것은 아닐까. 시인은 강렬하지만 섬세한 눈길로 고통과 사랑과 희생으로 이어지는 흔적들을 재발견하고자 노력한다. 그리고 더 나아가 다음 인용한 「주름」에서처럼, 시인은 저 먼 나라의 “이누이트”들로부터 시인 자신의 “이마의 주름”으로 돌아오는 여정을 통해 자신도 그러한 흔적이 되고자 한다. 자신의 뒤에 올 누군가를 위해 ‘험한 세상의 다리’가 되고자 하는 것이다. 전숙의 시는 순교자적 면모를 보이며, 바로 이러한 점이 그의 시가 가진 ‘부드러운 힘’의 근원일지도 모른다.


개썰매를 몰아 방향을 찾는 이누이트들은

눈의 주름을 보고 길을 찾는다고 한다

(…)

나는 머리카락을 추켜올리고

이마의 주름을 활짝 드러내었다

(…)

내 뒤에 오는 누군가

이 주름을 더듬어 가면

생의 크레바스를 무사히 비켜갈 수 있으리라.

- 「주름」 부분 (시와사람 2012 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