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시’다
-애도의 아우라, 그 더운 설움의 소나기
전숙(시인)ss8297@hanmail.net
‘숨비소리’는 잠수하던 해녀가 바다 위에 떠올라 물속에서 참고 있던 숨을 휘파람을 불듯이 길게 내쉬는 소리입니다. 해녀들은 바닷속에서 한 개의 전복이라도 더 찾아내기 위해서 죽을 만큼의 고통으로 숨을 참아냅니다. 그녀들의 물질은 전쟁처럼 매번 목숨을 거는 일입니다. 구십이 넘도록 물질을 한 해녀를 본 적이 있습니다. 생사를 가르는 물질을 그녀로 하여금 그토록 오래 견딜 수 있게 한 힘의 원천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무당이 살풀이춤으로 누군가의 이승의 한을 올올이 풀어내듯이, 한 번의 잠수마다 겪는 지옥의 고통을 자기 안에 쌓아두지 않고 순간순간 휘파람에 얹어서 머나먼 이어도로 띄워 보냈기 때문일 것입니다. 통곡처럼 웃음처럼 가슴에 응어리진 상처를 상여소리 같은 한바탕 긴 숨으로 몰아냄으로써 해녀들은 날마다 새 잠녀(潛女)로 부활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한이 사라진 고통은 금세 아물고 그녀들은 다시 야차 같은 바다로 처음처럼 뛰어드는 것이지요.
‘애도’란 누군가의 죽음을 슬퍼하고 안타까워하는 것입니다. 죽음이 아니더라도 어떤 실체나 사건에 대해 슬퍼하고 안타까워하는 것이 애도입니다. 그러므로 애도는 위로의 의미를 품습니다. ‘위로’란 어떤 주체가 세계와 눈 맞추고, 귀 기울이고 손잡아주고 껴안아주는 일입니다. 그것은 ‘사랑’과 ‘자비’와 ‘仁’을 먹고 사는 종교의 한 영역입니다. 그러나 언어의 창조자인 시인도 어쩌면 멍에일지도 모르는 숙명을 타고 났습니다. 그것은 애잔한 세계에 대해 애도와 위로를 바치는 일입니다. 살풀이춤이나 해녀들의 숨비소리처럼 시로써 애도를 받게 되면 낮은음자리표들의 恨이나 안타까운 곡절도 다시 여행을 시작할 수 있는 힘을 얻게 됩니다.
문인수시인의 말처럼 절경은 시가 되지 않습니다. 미인이나 꽃미남은 시가 될 수 없음이지요. 재벌이나 고관대작도 시가 되지 못합니다. 시로 승화되는 애도의 울타리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것은 불가촉천민이고, 상처이고, 맨발의 릭샤꾼이고 들꽃이고, 왕따이고 천덕꾸러기입니다. 눈물이나 가난이나 고독의 강을 건너지 않은 것들은 시가 될 수 없습니다. 그것들은 성경말씀처럼 이미 상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한 사람, 아니 한 생명의 눈물겨운 삶은 그 자체가 시입니다. 우리들의 어머니가 그렇고 아버지가 그렇고 언제나 약자인 외할머니가 그렇습니다. 결과물이 시인의 영혼을 흔드는 것이 아니라 길 위의 ‘눈물’이 시인의 가슴을 파도치게 하는 것입니다. 꼴찌에게 박수를 보내는 이유도 거기에 있습니다. ‘진주’라는 보석을 생각해봅니다. 제 몸에 들어온 이물질을 몰아내려다가 태어나게 된 보석! 생사를 건 싸움을 하다가 고통의 몸내림이 발현된 진주! 그 영롱하고 귀한 광채로 말미암아 최고의 ‘보석’의 자리를 차지하게 된 진주, ‘상처의 눈물’인 진주야말로 한 편의 시입니다. 시인들은 제 영혼을 고통으로 활활 태워서 진주 같은 시 한 편씩을 빚어냅니다.
모든 물상들의 꿈은 인간이 되는 것입니다. 인간이 아닌 물상들은 인간이 되지 못해 슬프고 인간은 신이 되지 못해 서럽습니다. 인간은 신으로 가기 위한 마지막 디딤돌입니다. 모든 물상들이 인간이 되는 길은 시의 세계로 초대받는 것입니다. 시의 세계에서는 온갖 비유법을 통해 세계로 표현되는 모든 물상이 인격을 갖게 됩니다. 인격을 갖게 된 물상들은 시를 통한 애도의 대상이 됩니다. 시인의 가슴에 들어오면 애잔하지 않은 생이 없습니다. 어떤 삶이든 생의 소실점에는 애도의 바다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한 생명체가 ‘삶’이라는 고난의 길에서 벗어나지 않기 위해 얼마나 처연하게 얼마나 처절하게 울어야하는지 그래야 비로소 한 편의 시로 승화되는지 애도의 바다에 닿으면 알 수 있습니다.
단조의 노래를 들어보노라면 어둡고 느리고 낮은 것들의 소리가 애잔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단조의 시간에서만 시의 뼈가 자라고 날개가 돋아납니다. 이제 시인들이 제 영혼을 태워 세상의 물상들을 어떻게 애도하는지 들여다보겠습니다.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 천상병의 <귀천> 부분
천상병시인은 본인 자신이 세상의 잣대로 재자면 불행의 중심에 서있던 시인입니다. 시대의 피해자로서‘치욕의 끝’이라는 고문에 의해 몸과 정신은 걸레처럼 너덜거렸습니다. 부인에게서 막걸리 한 병 값과 담배 한 갑 값을 하루 용돈으로 받으면 행복한 하루였습니다. 걸음마다 恨이 발자국을 찍을 것 같은 남루한 생을 살다간 시인은 자신의 ‘생’에게 아름다운 꽃다발을 안겨주었습니다.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라고 말입니다. ‘귀천’이라는 시를 통해 천상병시인의 생은 모든 어둠을 물리치고 환하고 아름답고 향기롭게 종결됨을 우리는 느낍니다. 더불어 우리의 생도 그렇게 아름답게 마감하리라고 다짐해보는 것입니다.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 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안도현의 <너에게 묻는다> 전문
안도현시인은 가장 낮은 곳에서 뒹구는 불가촉천민 같은 존재인 연탄재를, 눈 맞추어 주는 일은 언강생심 기대도 못하고 접촉하기도 꺼려하는, 아무나 발로 짓뭉개도 비명 한 마디 내지르지 못하고 먼지처럼 바스러지는 존재에게 위로의 전언 한 마디를 보냄으로써 연탄재는 그동안 겪었던 수모를 한꺼번에 상쇄했을 것입니다. 그뿐입니까? 아무도 기억해주지 않았던 하마터면 헛것이 되었을 연탄의 노동을 환기시켜줍니다. 거기에 연탄재를 발로 찬 사람에게 부끄러움을 느끼게 해줍니다. 이 시를 읽은 연탄재는, 인도의 온갖 천한 일을 도맡아하는 불가촉천민들은 한순간에 만년설처럼 얼어붙은 가슴의 한이 봄눈처럼 녹아내렸을 것입니다.
물먹는 소 목덜미에
할머니 손이 얹혀졌다.
이 하루도
함께 지났다고,
서로 발잔등이 부었다고,
서로 적막하다고,
-김종삼의 <묵화(墨畵)> 전문
이 텍스트를 읽고 있으면 무슨 울음의 폭풍이 찰나에 온몸을 훑고 지나간 듯 합니다. 그리고 참고 참았던 소변을 쏟아낸 후의 진저리 같은 전율을 느낍니다. 삶이란 백석의 시구(詩句)처럼 얼마나 외롭고 높고 쓸쓸한 것일까요? 할머니 혼자서 하루를 지내고, 할머니의 발잔등만 붓고, 할머니만 적막했다면 이 시는 설움으로 끝났을 것입니다. 그러나 시인은 소와 할머니를 동행으로 엮어줍니다. ‘ 서로’라는 단어를 넣어 연결의 끈을 만들어줍니다. ‘서로’란 단어가 이 시에서처럼 아름다워 본 적이 있을까요?
비정규노동자들이 올라간 고공농성장에서
가난한 노동자들은 언제든지, 새들처럼
하늘로 올라가 둥지도 틀 줄 알아야 한다는,
원숭이처럼 어디에라도 매달릴 줄 알아야 한다는 학습
대추리에서 용산에서
못난이들의 집은 언제나
개미집처럼 쉽게 헐릴 수 있다는 학습
쫓겨나지 않고 버티면 죽을 수도 있다는 학습
-송경동의 <생태학습> 부분
‘쉬,쉬,쉬’오줌 누이는 소리처럼 비밀이 많은 세상입니다. 저임금과 폭력과 차별이 난무해도 제 일이 아니면 모른척하고 싶은 게 인지상정입니다. 그래서 비밀은 더 견고하게 지켜집니다. 양비론으로 물타기를 합니다. 정의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요? 그래서 시인은 폭로합니다. ‘가난한 노동자들은 언제든지, 새들처럼/하늘로 올라가 둥지도 틀 줄 알아야 한다는,/원숭이처럼 어디에라도 매달릴 줄 알아야 한다는 학습/’‘못난이들의 집은 언제나/개미집처럼 쉽게 헐릴 수 있다는 학습/쫓겨나지 않고 버티면 죽을 수도 있다는 학습’이라며 시대의 약자들의 고통과 핍박을 폭로함으로써 가슴에 돌처럼 굳혀있는 응어리들을 녹여내는 것입니다.
아버지는 마지막길이라고 사료 대신
따뜻한 여물죽을 쑤어 먹이셨다
안락사주사를 맞은 어미소는 죽음의 공포와 고통 속에서
새끼소에게 마지막 젖을 물렸다
중략...
나 혼자 아무리 서러워도
세상은 무섭도록 침착하게 자전도 하고 공전도 하고 있었다
아무도 모르게 자전축이 조금 흔들린 것 외에는.
-전숙의 <살처분> 부분
유행가 가사처럼 한마디 말도 못하고 수백만의 생목숨들이 ‘살처분’이라는 미명하에 죽임을 당했습니다. 시인이 혼자 아무리 서러워해도 세상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네온사인은 여전히 눈부십니다. 참다못한 지구가 허리를 꺾습니다. 지구가 어깨를 들먹이며 서럽게 울어주자 살처분 당한 생목숨들은 비로소 영면에 듭니다.
하늘 땅
그 사이
창을 닦고
내 가슴
더운 설움이
소나기로
울고 난 뒤
대숲머리 바람소리가
연등처럼 흔들렸다.
-김종의 <구름 높게 흐르면> 전문
이 시에서는 극히 개인적인 시인의 설움이 자연 순환의 진리로 환기되고 있습니다. 하늘과 땅 그 사이 광대무변의 허공이 건물의 안과 밖을 구분해주는 유리창 한 장으로 비유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그만큼 자연과 가까워지고 종단에는 합일되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그야말로 물아일체, 만물조응의 상태이며 인간과 자연과의 친화가 그대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이 시를 읽으면, 어느덧 마음까지도 편안해집니다. 대숲머리 바람은 우리의 현실입니다. 대나무가 가만히 있고자 해도 바람이 가만 두지 않습니다. 냉혹한 현실은 끊임없이 우리를 흔들어 괴롭힙니다. 속내가 답답할 때 한바탕 소리 내어 울고 나면 우리의 속내도 시원해지고 마음자리에 평화가 깃듭니다. 세사에 시달리는 바람소리마저도 오히려 어둠과 번뇌를 물리치고 영원한 진리의 광명을 밝히기 위해 부처님께 등불공양하는 연등처럼 평화롭게 느껴지게 됩니다.
김종시인은 자신의 시론에서 ‘시는 시인의 사리’라고 합니다. 한 편의 시가 탄생하기까지 시인들이 얼마나 각고의 노력을 하는지 그 한마디 말에서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시는 짧으면서도 큰 이야기가 담겨있습니다. 시인은 시대의 향도로서 직관과 상상의 힘을 발휘하여 시대의 눈물받이가 되고 손수건이 될 것입니다. 그리하여 시인의 애도는 우주의 먼지 한 톨에까지 스며들 것입니다. 終 -계간 *예술문화비평*2013년 봄호, 통권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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