맑음시평

범대순시인과의 대담---문장21-2013 여름호

전숙 2013. 7. 26. 18:23

 

“만나고 싶었습니다”

-대담


원시적 야성을 찾아서

-범대순 시인


대담: 전숙(시인)


 나의 자연 나이는 공자도 누리지 못한 80이지만 그러나 나의 시적 시간은 결코 그 끝부분에 다 있지 않다. ...중략...나는 나의 새로운 출발점이 원시적 야성이기를 바란다. 나는 이 길이 나를 오래 살리는 길이라고 믿고 있다. 야성 즉 그 생명력으로 나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하나의 카오스 속에 뒤섞으면서 그것이 하나의 예술로 기억되기를 나는 바란다.

-범대순의 「담론」 중에서


전숙: 선생님, 그동안 안녕하셨는지요? 문단에서나 학문적으로나 너무 높고, 크고, 깊은 분이라 감히 무엇을 여쭤야할지 막막합니다. 질문을 여쭙고자 선생님의 삶의 여정을 살펴보면서 참으로 행복한 시간이었습니다. 거대한 산의 내밀한 곳까지 들여다보는 느낌은 한 권의 경전을 읽는 것과 같은 감동이었습니다. 선생님을 뵈면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말이 과연 진리라는 생각이 듭니다. 얼굴에는, 죄송합니다만 요즘 여성화장품의 대세인 물광 같은 광채가 자연스럽게 우러나오고 목소리는 우렁우렁하신 게 청년의 기상보다도 더 씩씩하십니다. 무등산 산행으로 건강을 가꾸시는 줄은 익히 알고 있습니다만 그 외에도 건강을 위해 하시는 운동이나 정신수양의 방법이 있으신지요?


범대순: 무등산 산행은 나의 죽음에 이르는 병입니다. 건강의 문제가 아닙니다. 무엇인가 운명 같은, 저주 같은 관계입니다. 광기 같은 것이지요. 그 광기가 잡히지 않은 한 나는 건강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한 나의 광기는 산행 말고도 시나 산문 등의 글쓰기 때문입니다.


전숙: 예, 선생님의 시들지 않는 야성이 광기를 지나 지금은 파안대소로 안주한 줄 알았는데요. 아직 여전하시군요. 과연 큰 광인이십니다. (웃음) 선생님, 그러면 어떤 연고로 시의 숲에 들어 이토록 무성하게 가꾸게 되셨는지요?


범대순: 나도 몰라요. 50년 넘게 같이 사는 아내의 말에 의하면 나는 타고난 시인이랍니다. 변덕스럽고 속마음을 잘 모를 때가 많다는 군요. 아무래도 타고난 기질 때문일 것입니다. 내가 어머니를 많이 닮았다는데요. 그것은 아마 내가 어렸을 때 너무 빨리 어머니를 떠난 일과 관계가 있을 것입니다. 나의 어머니는 불행하였어요. 어머니는 꿈이 많고 영리한 여자였는데, 그래서 외로운 분이셨지요. 네 살 때 나는 어머니의 품을 떠나 감옥 같은 아버지의 사랑에서 거처하게 되었는데 아마도 말할 수 없이 정서가 불안했을 것입니다. 유학자요, 한시인(漢詩人)이었던 아버지는 나를 맞춤형으로 만들고 싶어 하였지만 늘 실망하는 기색이었어요. 나는 늘 먼 산만 바라보았어요. 아버지는 어린이가 먼 산을 보면 안 된다고 꾸중하셨지만 먼 산은 나의 꿈이고 출구였어요. 우리 집 사랑채에서 보았던 그 먼 산이 무등산입니다. 내가 평생 무등산만 다니는 까닭일까요.


전숙: 무등산이 선생님의 유년의 피안이었군요. 이제 무등산하면 선생님이 떠오를 것 같습니다. 감히 분리할 수 없는 물아일체를 느낍니다. 그러면 시는 선생님의 삶에 무엇입니까?


범대순: 시 쓰는 일은 나의 사는 이유입니다. 괜히 화가 나고 답답할 때 시를 쓰면 속마음이 풀려요. 시는 마음고생의 치료제이기도 해요. 1981년 여름 두 달을 윤삼하 시인과 같이 옥스포드 대학의 하계 연수에 참여한 적이

있어요. 처음으로 하게 된 외국 생활이라 스트레스가 많았어요. 괜히 머리가 아픈 거요. 그때 시를 쓰면 아픈 머리가 나았어요. 그래서 우리는 서로 천생 시인이라는 생각에 공감한 적이 있습니다. 아마도 정신을 몰두해야 하기 때문에 통증도 잊히고 말았을 것입니다.


전숙: 선생님, 1958년 1월호 『문학예술』에 조지훈선생이 선생님의 시 '불도우자'를 추천하기로 약속했다가 불행하게도 잡지가 그 호부터 폐간되었다는 이야기는 더러 화제가 되고 있습니다. 가슴 아프시겠지만 그 때 이야기 좀 들려주셔요.


범대순: 나는 1965년에 시집을 내고 문단에 섰습니다. 광주일고 영어선생이었는데 사표를 내고 받은 연금 전액을 시집 내는데 썼어요. 지금 생각하면 미친 짓이었어요. 나의 첫 시집은 50년대에 쓴 작품이 대부분이어요. 그것은 조지훈선생이 알고 있었어요. 그 시집의 서문에서 지훈이 그 점을 밝혔습니다. 그래서 나는 내가 50년대 시인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사실상 나의 시인 친구는 대부분이 50년대 시인들이어요. 박희진, 성찬경, 인태성, 윤삼하, 권일송, 허만하, 강태열, 정현웅, 송선영 등이 그들입니다. 50년대에 전쟁을 겪었고 너무 많이 고생하였고 나는 그때 많이 배회했습니다. 오늘 다시 돌이켜보면 그것은 행운입니다. 그 시절이 나의 문학청년 시기를 길고 탄탄하게 만들었습니다.


전숙: 선생님, 임보 시인은 담론에서 선생님의 시적 경향을 ‘파안대소’또는‘헛소리의 지성’이라 하셨고 임환모 교수는 ‘경험의 질서와 원시적 생명력’이라 평하였고 김성곤 평론가는 ‘기계시와 백지시의 미학’이라 예찬하였는데, 말씀 나온 김에 시집 별 시기별 사유의 변화에 대하여 말씀해주시지요.


범대순: 최근에 낸 시집 '가난에 대하여' 후기에 '나의 시 삼백은 일언이폐지하고 야성'이라고 했습니다. 나의 시는 일관성이 없어요. 시집마다 늘 새로운 경향을 가져요. 변합니다. 실험적이어요. 첫 시집 '흑인고수 루이의 북'

은 전쟁 직후의 작품들입니다. 전쟁의 현장, 그 아픔과 분노를 극복하기 위한 기계를 앞세운 힘의 추구였습니다. 50년대 한국시의 주류인 서정시와 상반되는 경향이었어요. 1971년 제2시집 ‘戀歌 ⅠⅡ 其他’를 냈는데 그때는 마음이 많이 안정되었어요. 그래서 전통적 시풍을 좇았습니다. 그 뒤 15년만인 1987년에 낸 제3시집 '이방에서 노자를 읽다'는 미국에서 쓴 시로 미국에서 살면서 문화의 충돌을 다룬 시가 대부분입니다. 즉 문화의 충돌이 주제였습니다. 그리고 다음 시집 '기승전절'과 '백의 세계를 보는 하나의 눈' 으로 이어지는데 이들은 서양문명에 대한 동양적 대안을 모색한 것이었고 1996년 시집 '아름다운 가난' 은 파격적인 시집으로 다음 해 '세기말 길들이기'와 같이 형식과 내용에 큰 변화를 모색하였습니다. '북창서재'와 '파안대소'에서 동양적 구원과 여유를 찾아보다가 시집 '나는 디오니소스의 거시기다'에서 다시 나는 자기 배신적이고 자기 부정적이고 야성적인 나의 본래의 기질인 광기나 야성을 회복하였습니다. 최근의 시집 '산하' 나 '가난에 대하여'는 무엇인가 동양적 달관 같은 데에 집착하고 있습니다. 조금 실거워진 것이지요. (웃음)


전숙: 선생님, 본래의 기질인 광기나 야성을 회복하셨다는 말씀을 들으니 역시 모두에 밝힌 선생님의 담론처럼 이제 다시 시작되는 새로운 출발점에 서신 것이 확실해보입니다. 역시 시들지 않는 야성이십니다. 선생님, 결코 만만치 않은 60년의 시력에 담고자했던 선생님의 영혼이랄까 또는 시론을 한번 펼쳐주시지요.


범대순: 미국시인 로버트 프로스트가 대학생과의 대화에서 ‘시와 대학이 어떻게 다른가’의 질문을 받고 잠깐 생각하다가 ‘대학은 지식을 전수하는 곳이고 시는 생명을 찾는 작업’이라고 말하였습니다. 나는 시가 ‘생명’이라는 말에 동의합니다. 생명은 싸워야 합니다. 저항적이고, 역설적이고, 배신적이고, 하극상의 기질이고 부정적이어야 합니다. 그래야 시가 삽니다. 내가 추구하는 생명은 역설이고, 대들기고, 변화이고, 배신이고, 저항이고 때로 파안대소같이 희롱이기도 합니다. 나의 생각이 포스트 모더니즘적 경향을 많이 가지고 있어요. 이 생각은 동양의 노자사상과 맥이 같습니다. 권위에 도전하는 문명 비평적인 태도인 거죠. 나는 독립운동을 한 것은 동상이 아니라 잡초라고 늘 생각합니다. 지도자가 아니라 무식한 대중이 나라나 세계의 주인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어요. 나의 지론인 '속(俗)이 하늘이다' 나, 나의 시 '백지'가 그것을 말합니다. 이것은 며칠 전 타이완 국립 고궁 박물원에서 가진 생각이기도 합니다.


전숙: 네, 선생님의 깊고 깊은 사유의 숲을 걸어 나오니 선생님 영혼의 피톤치드에 제 마음과 눈이 환하게 맑아지고 밝아집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땅의 젊은 시인들에게 한 말씀 해주시지요?


범대순: 할 말이 많아요. 시는 아무나 쓰는 것이 아니라 전문적이고 직업적이어야 해요. 그리고 무엇보다 타고나야 해요. 생이지지(生而知之)입니다. 그리고 죽을 뻔한 사람이 도달한 고개입니다. 많은 시인이 불행하였어요. 오늘 시단은 문학청년 수준입니다. 시가 있고 욕심이 나는 법인데 욕심이 먼저에요. 그러니 자기만 자기 시를 읽어요. 시인은 남과 달라야 해요. 먼저 선배에게 대들고 선배를 이기고 다음엔 세상에 대들고 세상을 이기고 그러자니 고생이 많고 배신자가 되고 왕따를 당해요. 거기서 살아나야 해요. 고독하지요. 때로 미친놈이 되기도 하고. 시인은 먼저 시를 버려야 해요. 허욕이나 허세에서 해방되어야 해요. 먼저 시 쓰기를 중단하세요. 남의 시나 자기시를 읽고 시인이 되겠다는 생각은 세속에 홀린 것이어요. 시를 버려야 시가 나옵니다. 시도 ‘무소유’입니다. 시는 저주이어야 하고 운명이어야 해요. 멋 부리는 일이 아니라 고통이어야 하고 광기이어야 하고 미친 사람이어야 해요. 그 밖에는 다 가짜입니다. 민주주의는 상식이지 시가 아닙니다. 몰려다니는 일 없이 혼자서 더 깊은 고뇌, 고독, 고통 말하자면 죽음에 이르는 병을 앓아야 해요.


전숙: 예, 선생님의 비수 같은 고언 가슴 깊이 새기겠습니다. 그런데 선생님의 숲을 벗어나지 못하겠습니다. 아직 허기집니다. 아무도 밟지 않은 새벽눈밭 같은 원시적인 담론 한 도막만 더 들려주세요.


범대순: 시인은 철학자에게서 사학자에게서 시인은 과학자에게서 존경을 받아야 합니다. 그들이 죽어도 할 수 없는 일을 하기 때문입니다. 시인은 십자가를 진 희생자이어요. 말하자면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러나 예수 12 제자 중 유다가 가장 시적입니다. 권위가 상징하는 이성을 버렸기 때문입니다. 유다는 너무 인간적입니다. 용서할 수 없어야 인간적인 것이 아닙니까. 이것은 상식적인 차원이 아닙니다. 아르젠친에 보르헤스란 큰 현대소설가가 있는데 그의 ‘유다에 대한 세 가지 이야기’란 글에 나온 말입니다. 배신이 가장 인간적이고 가장 인간적이기 때문에 시적입니다.

 . 영국 옥스포드대학에는 시인 ‘쉘리’의 벌거벗고 누워있는 와상이 있습니다. 그는 무엄하게 무신론을 주장하다가 대학에서 쫓겨났습니다. 객지에서 그가 죽은 뒤에 대학은 그를 발가벗겼어요. ‘옥스포드’가 미쳤는지 시인 ‘쉘리’가 미쳤는지는 보는 사람에 따라 달라요. 시는 벗어야 해요. 사상적으로 말하자면 벌거벗은 시인상은 해체론 즉 포스트모더니즘을 시적으로 설치한 것이지요. 동양의 노자사상과 가까워요. 플라톤이 시인을 추방한 것은 플라톤이 이성적이기 때문입니다. 이성적인 것은 공자도 마찬가지죠. 공자는 시를 이성적인 자기 사상에 종속시킨 것입니다. 이성은, 말씀은, 상식은 시의 정도가 아닙니다. 시는 대들기고 배신이고 변화이고 미친놈의 장난입니다.


전숙: 선생님, 지금까지 들려주신 말씀 가슴 창고에 잘 갈무리하겠습니다. 귀한 시간 내주셔서 고맙습니다. 선생님의 깊고 넓은 사유의 숲은 많은 후학들에게 청량한 피톤치드가 될 것입니다. 다음에 뵐 때까지 건강하시고 행복하십시오! 終

문장21 2013 - 여름호

 

                                                                                  범대순시인님과 한 컷


백지 시(白紙詩)

                범대순













































그 다음

                       범대순


모래밭을 온 사람이 뒤돌아보면서

스스로 흐트러지지 않는 한결같음을 찾듯

산길을 가는 사람이 고개 앞에 쉬면서

가파른 길 앞으로 하얗게 있음을 구하듯.


관목을 쪄 말리는 작업을 거들면서

묘를 미리 준비해둔 할머니가

곱게 접어 장안에 넣어두고

가끔씩 만족스레 수의를 꺼내보듯.


전집을 엮고 짜는 일로 일하다가

고개를 들어 군간 눈을 감고 바라노니

글 하나 하나가 살아온 흔적이기보다는

살고 난 뒤 앞으로 먼 보람이기를.

하늘에 구름이거나 푸름이거나

석양 너머 빛나는 어둠이거나

백의 세계를 보는 하나의 눈

나의 처음 다음 그 다음이듯.














무등산이 불이었을 때

                          범대순


무등산이 불이었을 때

무등산은 시인이었다


너덜겅이 불로

살아있을 때


절벽과 돌기둥과

봉우리는 시인이었다


숨결이 하늘에 닿았을 때

먼 바다에 대륙을 일으키고


무등산이 화산이었을 때

그때 무등산은 시인이었다


큰 틀의 침묵이듯 지금은

다만 푸르게 오월이지만


가슴 깊은 곳에 숨은 불같이

어느 날 다시 불나기 시작하면


그때 다시 너덜겅이 불로 돌아가면


분노한 화산이여 다시 불로 일어서라

광기의 무등산이여 다만 시로 있어라








시정신

              범대순


고래잡이가 고래를 잡는 것이

작살질이 뛰어나서가 아니듯

사냥꾼이 호랑이를 잡는 것이

불질이 세상 없어서가 아니듯.


만 리 험한 바다에 나아가서

고래가 아닌 자기와 싸우듯이

시베리아에 닿는 장백산 깊은 골에

호랑이 아닌 자기가 적이듯이


시인이 싸워서 무찌르고 이기는 일은

사나운 호랑이도 고래도 아닌

한 줌의 흙으로 된 자기의 뼈 안에

수없이 작살을 꽂고 불을 놓는 일.


수도 없이 작살을 맞고 불을 맞고

안간힘으로 도망치는 짐승을 향하여

다시는 못 일어나도록 마지막 순간의 한 대를

심장을 향하여 힘껏 내꽂는 일.












불도오자

                범대순



다이너마이트 폭발의 5월 아침은 快晴

아카시아 꽃 향기, 그 미풍의 언덕 아래

황소 한 마리 입장식이 투우사보다 오만하다.


처음에는 여왕처럼 조심스레 주위를 살피다가

스스로 울린 청명한 나팔에 氣球는 비둘기

꼬리 쳐들고 뿔을 세우면 홍수처럼 신음이 밀려 이윽고 바위돌 뚝이 무너지고


그것은 희열

사뭇 미친 폭포 같은 것

짐승 소리 지르며 목이고 가슴이고 물려 뜯긴 신부의 남쪽 그 뜨거운 나라 사내의 이빨 같은 것


그리하여 슬그머니 두어 발 물러서며

뿔을 고쳐 세움은

또 적이 스스로 무너짐을 기다리는 지혜의 자세이라.


파도 같은 것이여

바다 아득한 바위 산 휩쓸고 부서지고 또 부서지며 봄 가을 여름내내 파도 같은 것이여


BULLDOZER.

正午되어사 한판 호탕히 웃으며 멈춰 선 휴식 속에

진정 검은 대륙의 그 뜨거운 발목은 화롯불처럼 더우리라.


다이너마이트 폭발의 숲으로 하여 하늘은 환희가 자욱한데

내 오래도록 너를 사랑하여 이렇게 서서 있음은

어느 화사한 마을 너와 더불어 찬란한 화원

찔려서 또 기쁜 장미의 茂盛을 꿈꾸고 있음이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