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포리즘과 페이소스
-강만의 시집 『푸른 단검』을 중심으로
전숙ss8297hanmail.net
『푸른 단검』을 펼치면 촌철살인 같은「서시」를 만난다.
나의 꿈은
팔 척 장검을 갈아
짧고 예리한 단검을 만드는 일이다
뭉클! 하고
당신의 심장에 깊이 꽂히는.
그리고 자필로 쓴 붉디붉은「전율」이 다가온다.
심장이 북을 친다
붉은 피가 만국기처럼 펄럭인다
그녀가 왔다!
위 두 편의 텍스트를 통해서는 도통 시인의 나이를 짐작할 수가 없다. 내가 아는 강만시인은, 말 그대로 ‘나이는 숫자에 불과’한 시인이다. ‘얼굴’에서도 나이를 읽을 수 없고 ‘시’에서도 나이를 읽을 수 없다. 이제 시인의 자연적인 연륜은 접어두기로 한다. 그리고 풋풋한 한 청년시인의 맑고 투명한 그리고 단검처럼 예리한 시의 숲을 산책하기로 한다.
강만시인은 시집『푸른 단검』에 상재된 시론(내 시를 말한다)에서 “나는 시를 짧고 간결하게 쓰려고 한다. 선승의 화두처럼 짧지만 깊은 사유가 스며있는 그런 시를 쓰고 싶은 것이다.”라고 피력한다. 그래서인지 이번 시집의 시편들은 용암처럼 끓어오르는 쇳물을 만년설산에서 녹아내리는 옥수에 식혀 만든 범종처럼 진중하고 울림이 깊다.
아포리즘은 골계미를 추구한다. 군살을 발라낼 수 있는 한 발라내고, 분수에 넘치는 물기를 짤 수 있는 한 짜내어 더 이상의 물기나 살집을 허용하지 않는 것이 골계미다. 그러나 패션모델처럼 무슨 걸어 다니는 해골이 아니라 거기에는 모델이 모델일 수 있게 하는 디자이너의 영혼이 담긴 아름다운 의상 같은 페이소스가 있어야한다. 아포리즘에 페이소스가 없다면 그것은 말장난에 불과할 것이다. 강만시인은 아포리즘에 단검이라는 도구를 작동함으로써 자신이 추구하는 “독자의 가슴팍에 단검을 날렸을 때 뭉클한 감동이 밀려오는 그런 시를 쓰는 꿈”을 이 시집에서 이루어냈다고 볼 수 있다.
“시는 번갯불의 섬광이어서 어휘들의 배열로만 끝날 때는 단순한 작문에 불과하다. 시는 영혼의 비밀인데 왜 어휘들을 가지고 수다스럽게 그것을 소모시켜버리는가.”라고 말한 칼릴 지브란이, 어느 안개 낀 새벽에 대빗자락으로 마당을 쓸어놓고 강만 시인의 시론을 미리 짚어 놓은 듯 하다. 시인은 오랫동안 아픈 아내를 간병하면서, 가슴 허전한 불모지를 인심 좋은 망초가 무성히 덮어주듯 시인의 가슴에 모성이 씨를 뿌리고 이윽고 무성해진 것 같다. 모든 시인의 의식저변에 모성이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이 나의 지론이긴 하지만 강만시인의 시편들을 보노라면 그러한 모성적인 페이소스가 강한 울림으로 스며들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시집 일부에서 사부에 이르기까지 고루 배치되어있는 아버지나 어머니를 노래한 시편들은 시인이 말하는 ‘웅담전략’에 가장 근접해있다. 사물에 대한 연민을 깊이 사유함으로써 날카로워진 단검으로 벼려진 시편들이 풍유의 옷을 입고 런웨이를 걸어 나온다. 펄럭이는 시인의 재치와 위트에 미소가 살포시 떠올랐다가 눈물 같은 아픔이 어룽진다. 그의 푸른 단검에 너무 깊이 찔린 탓이다.
나는 늙은 왕이다
나는 밤마다 죽어 1동 1002호 고분에 묻힌다
죽어 있다가 문득 눈을 떠보면
내 옆에 억울하게 순장된
아내가 누워있다
미안하다.
-「순장」전문
화순과 보성의 경계에 포실하게 터 잡은 대원사라는 절에 가본 적이 있다. 그 절에는 티벳박물관이 있는데 박물관 안에는 관 속에 들어가 죽음을 체험하는 공간이 마련되어 있다. 어떤 관람객은 들어가 누워보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흠칫 몸을 떨며 그냥 지나친다. 나도 마음속에서는 ‘한 번 들어가서 누워봐’ 하고 속삭이는 소리 있었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나는 그때 평소에는 초연한 듯 했던 죽음이 무의식에서는 공포로 자리 잡고 있다는 걸 알았다.
시적 화자는, 여기서는 시인의 즉자화에 틀림없어 보이지만 “밤마다 죽어 고분에 묻힌다” 보통사람들이 느끼는 죽음에 대한 흔들림이나 공포는 없다. 휴식하고 잠자는 공간이 무덤이고 되풀이되는 밤마다 죽는다. 날마다 새로운 죽음이지만 밥을 먹듯, 길을 가듯 일상처럼 익숙하다. 이 대목에 시인의 경륜이 배어 있음이다. “죽어 있다가 문득 눈을 떠보면” “아내가 누워있다” 시인과 수십 년 동고동락을 해온 아내다. 즐거울 때도 많았겠지만 어쩌면 힘들 때가 더 많았으리라. 쌕쌕 잠든 아내의 얼굴을 보며 시인은 회한처럼 지난 세월이 파노라마 쳤으리라. 바다처럼 출렁거리는 시인의 가슴에서 진주처럼 떠오른 말은 단 한 마디다. “미안하다.” 거기에는 ‘고맙다’ ‘사랑스럽다’ ‘호강시켜주고 싶다’ ‘손잡아주고 싶다’ ‘ 안아주고 싶다’ 등등의 해변의 모래알만큼이나 많은 의미들이 함의되어 있는 것이다.
밥 앞에서는 누구나 고개를 숙인다
밥을 위해서는 목숨도 바친다
그렇다 밥은
살아있는 자들의 황제다.
-「밥」전문
인도의 어느 현자(賢者)가 대단한 부자왕을 찾아갔다. 왕은 마침 기도 중이라 만날 수가 없었다. 현자는 기도실 밖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왕의 기도소리가 문밖까지 흘러나왔다. ‘아직도 이것저것 부족한 것이 많습니다. 궁궐도 더 크게 짓게 하시고, 왕관의 보석도 더 큰 걸로 바꿔주시고 영토도 넓혀주소서.........’ 현인은 되돌아서며 ‘나는 부자왕을 만나러 왔더니 하마터면 거지를 만날 뻔 했다’고 도망치듯 궁궐을 떠났다고 한다. 그렇듯 탐욕은 부자왕도 거지로 만드는 법이다. 이 텍스트는 재물일 수도 있고 권력일 수도 있을, 인간의 끝없는 탐욕을 단 4행으로 풍유하고 있다. 과연 예리하다. 요즘 젊은 세대들은 명품을 사기위해 신체포기각서까지도 불사한다고 한다. 밥(탐욕)이야말로 우리를 다스리는 황제인 것이다.
허물을 가르고 나온 매미가
날아 가버린 뒤에도
허물은 나무 등걸에 붙어 오래 기다렸다
세상을 떠돌다 철이 들어
늦게야 매미가 돌아왔을 때는
허물은 이미 바스러지고 없어진 뒤였다
한 계절이 저물도록
목놓아 운다.
-「붉은 울음」전문
시집의 많은 시편들의 시적대상이 시인의 부모님이지만 「붉은 울음」은 이제 시인 자신이 부모가 되어 부모를 호명하고 있다. 자식이 제 꿈을 찾아 “날아 가버린 뒤에도” 부모는 고향에서 “오래 기다렸다” 자식이 “세상을 떠돌다 철이 들어” “늦게야 돌아왔을 때는” 부모는 “이미 바스러지고 없어진 뒤였다” 시적주체도 이제 자신이 ‘허물’인 붉게 물드는 황혼이 되어 “목놓아” 울어도 유행가 가사처럼 ‘때는 늦으리’인 것이다. 한편 “목놓아” 우는 매미는 이 텍스트에서처럼 우리네 삶의 치열함을 보여주는 시의 좋은 질료가 된다.
깊은 산
암자 방문 앞에 놓인
낡은 고무신
방안에서 스님 홀로 고요히
먼 길 뜨신 줄도 모르고
나오실 때까지 몇 날을
엎드려 기다리고 있다
-「스님의 고무신」전문
활유의 전형을 보여주는 텍스트다. “낡은 고무신”은 그 자체만으로도 고즈넉한 분위기가 물씬하다. 고무신이 낡기까지는 얼마나한 시간이 필요할까? 시인은 고무나무에서 고무를 채취하기까지의 농부의 노동과 고무나무가 한 땀 한 땀 수놓듯 실뿌리 뻗어간 시간까지를 넘겨다보았을 것이다. 그러면서 고무신을 단지 무생물인 ‘신’으로만 치부할 수 없었을 터이다. 앞 텍스트에서의 시인의 아내처럼 스님과 동고동락한 고무신이 시인의 시안(詩眼)으로 들어오면서 고무신은 충견처럼 ‘된숨’을 고르며 ‘생명성’을 부여받는다. 이제 고무신은 스님의 발바닥의 지문과 티눈과 발가락 냄새까지 기억하게 된다. 고무신과 스님은 어느덧 가족이다. 고무신은 스님을 제 한 몸이 낡을 때까지 제 힘껏 업고 다녔을 것이고 스님은 당신의 무게로 짓눌리고 찌들은 고무신을 저녁이면 깨끗이 씻어서 댓돌위에 올려두었을 것이다. 어쩌면 스님은 고무신을 어루만지며 김종삼시인의 「묵화」‘이 하루도 함께 지났다고/서로 발잔등이 부었다고/서로 적막하다고’를 들려주었으리라. 그런 스님이 “홀로 고요히 먼 길 뜨신 줄도 모르고” 고무신은 스님이 “나오실 때까지 몇 날을 엎드려 기다리고 있다.”
살아내는 일이 힘들어서 ‘서로 발잔등이 부었어’도 「묵화」가 우리에게 위로를 건네는 것은 ‘서로’라는 단어의 힘이다. 이 텍스트에서 범종소리 같은 짠한 울림이 발원하는 것은 ‘서로’의 한쪽 날개가 스러졌기 때문이다. 독자가 곡비(哭婢)가 되어 땅바닥에 퍼질러 앉아서 고무신 대신 땅을 치며 한바탕 통곡을 해주야 속이 시원하게 정화될 것 같은 뛰어난 문법을 사용한 텍스트다.
자비를 베풀며 사시오
설법하는 스님의 팔뚝에 모기 한 마리 앉는다
탁!
-「자비」전문
‘자비’의 사전적 의미는 남을 크게 사랑하고 가엾게 여기는 마음이다. 스님은 누구인가. 자비를 크고 환하게 베풀어야하는 큰 도량이 아닌가. 필부도 아닌 자비의 도량인 스님께서도 무의식에는 내가 먼저 있다. 모기에게 보시하는 한 방울의 피가 아까워서가 아니다. 본능적으로 무심히 행동한 것이 모기에게는 치명적인 상처가 되었다. 아니 상처가 아니라 죽음에 이르렀다. 친엄마에게 학대받은 아이가 있었다. 아이를 학대하는 장면을 촬영한 동영상을 엄마에게 보여주었더니 펑펑 울면서 잘못을 뉘우쳤다고 한다. 친구를 ‘왕따’시키는 아이들도 저희가 한 행동을 객관적으로 보게 되면 분개한다고 한다. 우리는 ‘자비’라는 말을 네온사인처럼 황홀하게 설법하면서 자신도 모르게 “탁”하고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고 한술 더 떠서 죽이기까지 하고 있다. 그것도 우리보다 약자인 그 누구나, 그 무엇을 학대하거나 목숨까지 빼앗으면서 일말의 가책도 못 느낀다. 시인의 단검에 ‘뜨끔’할 일이다.
힘들겠지만 아들아
저 산까지만 나를 데려다다오
거기서부터 저승까지는
혼자 찾아 가마.
-「저승 가는 길」전문
시인은 시집에 상재한 자신의 시론에서 “나는 ‘삶과 죽음’의 문제를 시 속에서 역설적으로 희화시켜버리고 싶었다.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평범한 일상이라는 듯, 나비가 날 듯 가볍게 가볍게, 더러는 빙그레 웃으며 고통과 절망과 두려움을 극복해보려고 애썼다. 내 시에서 종종 해학과 가벼움이 묻어나는 것은 전략적 차원의 의도적인 결과라 하겠다.”고 설파했다.
이 텍스트는 시인의 그러한 전략이 충분히 성공한 작품이다. 시인의 말처럼 “징징거린” 대목이 없다. 천상병시인이 하늘로 소풍가는 것 같다. 기차역이나 버스역까지만 배웅하고 차표 한 장만 끊어드리면 아버지(어머니)는 ‘저승’이라는 목적지에 택시를 타든, 걸어가든 무사히 찾아가실 것만 같다. 자식은 두 다리 쭉 뻗고 자도 될 것만 같은, ‘저승노잣돈’이나 ‘사십구제’나 ‘위령미사’ 같은 망자들을 위한 세상의 관습이 단지 산 자의 마음을 편하게 하는 일일 뿐이라는 듯 시인은 “저승까지는 혼자 찾아”가겠다고 푸르게 말한다. ‘춤은 무거움을 가벼움으로 전환시킨다.’고 한 들뢰즈의 말처럼 ‘시는 무거움을 가벼움으로 전환시킨다.’는 명제를 도출시켜볼 수 있는 텍스트이다.
이상으로써, 강만 시집 『푸른 단검』에 상재된 몇 편의 텍스트를 살펴보았다. 소설가 김훈은 ‘모든 풍경은 상처의 풍경이다’라고 하고 김종시인은 ‘모든 시는 상처의 해석이다.’라고 말한다. 시인에게는 모든 세계가 상처 입은 영혼이다. 그 상처를 시로 품으면서 위로해주는 일이 시인의 숙명일 것이다. 시창작에서 ‘아포리즘’은 시적 사유를 경직시킬 수 있다는 우려를 하는 이들도 있다. 하지만 강만시인은 인문학적인 깊은 사유와 해학이 잔디처럼 따뜻하게 뿌리내린 아포리즘을 선택함으로써 독자에게서 긴 여운의 페이소스를 끌어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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