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맑음시

2011년 발표작

전숙 2011. 12. 30. 11:42

 

납골당에서

                전숙


고요하다

세상의 모든 침묵이 여기 갇혀있다

화관을 단발머리에 두르고

꽃처럼 웃고 있는 어린 소녀

사진은 시간을 가두고

시간은 소녀를 가두고

소녀는 기억을 가두고

납골당엔 가슴에 얹힌 기억들이 갇혀있다

저 화관의 꽃처럼 한때 나를 피어나게 했던

곱게 빻아진 내 사랑도

저기 어디쯤에서 나를 가두고 있을 것인데

가슴에 얹힌 기억이 끄르륵 소화되어

세월이라는 망각의 창자 속으로

홀연히 사라져버릴까 봐

나는 차마 너에게 다가갈 수가 없다.


하늘말나리

                       전숙


치매요양원 햇볕 잘 드는 방이

하늘말나리 입담에 오늘도 수런거린다

시끄럽다는 비질에 풀썩 튀어 올랐다가

자리만 바꾸어 앉는 먼지군단처럼

어떤 따가운 햇살에도 그녀의 고백성사는 멈추지 않는다


비지땀에 전 속곳까지 발딱 뒤집어서

과거지사를 시시콜콜 풀어내는 하늘말나리

여섯살 쯤에 구멍가게 알사탕 한 개 슬쩍 입에 문 적 있었다고

무능한 서방 미워서 시어머니에게 악담부담 몇 번 했었다고

대면대면한 며느리 섭섭하다고 뒤돌아서 눈물 찔끔했노라고

실패가 된 몸을 뒤집어서 한생 동안 감은 실을 풀고 있다


무명실에 새겨진 물결치는 무늬를 하느님이 잘 보시도록

얼굴 복판에 점자로 찍어놓았다

그녀는 하느님이 소경이란 걸 어찌 알았을까

친절하게도 그녀가 한 획 한 획 꾹꾹 눌러 찍은

점자를 더듬으며 하느님이 심판하고 계신다


세상에서 가장 정직한 하늘말나리는

아리아드네의 실처럼 제 걸어온 길을 되짚어서

천국으로 돌아가는 중이다.


                               (시와사람 2011가을호)


살처분

                          전숙


아버지는 마지막길이라고 사료 대신

따뜻한 여물죽을 쑤어 먹이셨다

안락사주사를 맞은 어미는 죽음의 공포와 고통 속에서

새끼에게 마지막 젖을 물렸다

포크레인이 허겁지겁 땅을 파고

비닐이 깔리고 생목숨들이 우박처럼 쏟아지고

그리고 세상이 어두워졌다

몸 안과 몸 밖이 모두 캄캄해져도

여전히 해는 떴다 지고 달도 차올랐다가 이지러졌다

꽃이 피고 바람이 불고 겨울눈에서 새잎이 돋아났다

공룡이 사라지고 냉동된 매머드가 돌아왔다

나 혼자 아무리 서러워도

세상은 무섭도록 침착하게 자전도 하고 공전도 하고 있었다


아무도 모르게 자전축이 조금 흔들린 것 외에는.




선지국밥

                                 전숙


잡초뿐인 생쥐의 땅에 내 왕국을 세웠다

하, 언감생심 생쥐가 내 왕국을 침입했다

그를 몰아내기 위한 가장 손쉬운 방법은

강력한 접착제가 발라진 끈끈이를

그가 즐겨 다니는 음습한 길에 설치하는 것이다


접착제에 달라붙은 생쥐가 억압과 사투를 벌이는 동안

곁에 걸려있던 바지는 짓찢기고 헤지고 핏자국 선연하다

저 바지마저 없었으면

단말마의 순간에 그는 무엇을 붙잡았을까

얼마나 절실하게 허공에 매달렸는지

그의 유일한 무기이자 숙명인 송곳니가

너덜거리는 바짓가랑이에 아프게 박혀있다


그의 영토에서 그의 자유를 제압한

피 맺힌 곤봉을 전리품처럼 끼고 국밥을 먹는다

국밥 속에는 생쥐의 선지가

그가 누리고자 움켜진 한줌 허공만큼 가라앉아있다.


                                  (시선2011가을호)


폐지 보석

                    전숙


폐지 한 장이 빛나는 보석이라도 된다는 듯이

나이든 산이 굽은 등허리를 더욱 굽혀

쓰레기봉지에서 폐지를 집어내고 있다


평생 무엇을 저토록 간절하게 파냈던 것일까

주름진 길이 폭삭폭삭 주저앉아있다

괭이 끝에 걸리는 쓸모없는 쓰레기를 능숙하게 피해

폐지 한 장을 찾기 위해

지하 700미터 광맥을 파내려가듯

80Kg들이 쓰레기광산을 파내려가는 낡은 손가락 괭이들


폐지에서 빛이 나고 있다

생의 광산에서 미처 발견 못했던 보석들이

나이든 괭이 끝을 타고 고구마줄기처럼 쏟아지고 있다

눈자위 붉어지는 황혼이 되어서야

들 건너 산 너머 멀리 서있는 것들에게 눈 맞추고 있다


몇 굽이 전쯤에 아무렇지도 않게 집어던진

보석을 되찾기 위해

등허리 휘고 손 매듭 굵은 괭이가 된 나이든 하늘들


길 위에 흘려버린 눈물들이

쓰레기광산의 폐지처럼 숨어있다.




재개발

                        전숙


재개발을 기다리는 요양병원의 할미꽃들

복도에는 탄력을 잃어버린 집들이 쭉 늘어서있다


헐렁거리는 고무줄이 편한 뱃살들은

아무래도 땅냄새가 이무러운지 아래로 아래로 처진다

습관처럼 잡초만 보면 뽑아내는 옹이진 낙엽들의

페인트가 바스러진 맨살들이

구멍 난 창틈으로 길 건너편을 응시하고 있다

계단을 쿵쾅거리는 소리에 아무도 기울이지 않는 척 하지만

실은 모두가 ‘바스락’에도 귀를 대고 있다

위층 보일러가 요실금처럼 천정팬티에 세계지도를 그리는

7병동 444호실에서는

‘무슨 원인으로 새는지 진단을 해야 되는 것 아닐까?’

식구 중에 누가 문제를 제기하면

‘곧 무너진다는데 무슨 검사에요

헌집고치기라고 어설프게 손댔다가는 새집보다 더 들어간대요.’

새침때기 우듬지 막말에 아래가지들은 고개를 끄덕이고 만다


서쪽하늘구청에서 쾅하고 재개발도장이 찍히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소유주들이

보꾹의 사금 든 무늬를 가끔 올려다보며

‘그냥 새는 대로 사셔요, 헌집에는 헌옷이 편하지요.’

경전에도 없는 명언을 한다.


                                (시에2011겨울호)




김종

                            전숙

그는 아름다운 카리스마다

세상의 부드러운 칼이다

그가 하루도 쉬지 않고 걷는 이유는

그 부드러운 칼로 세상의 쓸쓸함을 다듬어서

환한 세상을 조각하기 위해서다


그가 가는 길은 언제나 새길이다

걸음걸음이 벼랑이고 허당이어도 길을 뚫고 다리를 놓는다

길을 내는 것이 그의 카리스마적 업보다

걸음을 딛는 그의 발자국마다 물비늘이 반짝인다

막다른 길에서 눈 딱 감고 뛰어내리는

서러운 햇살들을 일일이 손잡아주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의 길을 따라 걸으면

색색이 어우러진 무지개의 하늘 고운 웃음이 번져온다


그는 희망을 지피는 불씨를 품고 다닌다

엄지손가락을 턱에 괴고 명상에 잠기면

찢긴 가지에서도 새움이 돋는다

한숨짓는 꽃대의 꽃이 되고

드러누운 절망에게는 지팡이가 된다

그의 심장을 통과한 눈물들은

어느덧 사리가 되어 세상을 영롱하게 밝힌다


전생에 모든 풀꽃들의 귀였던 그는

이번 생에선 풀꽃들의 혀가 되었다

노을 좋은 어느 석양을 가만히 들어보면

시로 

그림으로 

글씨로 

그가 조용조용 이야기하는 세상이 

천년을 건너온 종소리처럼

웅숭깊은 파장으로 우리의 영혼을 흔든다.

 

기차여행


                                 전숙


가고 싶은 곳은 어디였을까


지루한 하품소리,

오래된 창틀은 목젖까지 열어젖히다가

삐끗한 시간관절을 얼추 꿰맞춘다


차표 한 장으로 어디까지 갈 수 있을까


간이역마다 외로운 풍경 두엇씩

바람처럼 보내고 꽃처럼 반기며 기차는 간다

목 잘린 풀대궁에서 되돌아보는 꽃때는

달착지근한 향수 같다

눈물 그 뜨거움에

풍경 그 적요에

사랑 그 영원한 풋것에 건배를 하던

푸른 정오일 때 하얀 깃발을 보았다


바위가 모래로 삭아 내리는 동안

깃발을 향해 가파른 능선을 올라채던 기차는

홀연히 달 속으로 사라지고

길은 실밥이 터져 줄줄이 달빛을 쏟는다

나는 황급히 은화를 주워 담는데.......


밑 터진 주머니다

실밥이 터진 길은 산허리에서 기어이 주저앉고 말았다

가고 싶은 곳은 어디였을까.  

               (이상 2011 ‘떠나가는 배’ 원고)  

 

2011 전남예총 예술제 축시

자유를 꿈꾸는 예술이여,

열 덩이의 무지개로 어우러져보세

                                            전숙       

우리, 서로의 젖은 가슴 들여다보세

만년 배경으로 태어난 꽃가지를 안아주고

언제나 조연인 꽃대의 눈물을 닦아주세

누군들 논두렁밭두렁에 코 박고 싶을까만

살아내는 일이 하늬바람에도 건들바람에도 저만치 아득하니

첩첩의 산 너머 두견이 먼 울음에도 속절없는 눈물이 나네


두견이울음 따라 흘러내린 눈물에 고흔 무지개가 뜨네

영산강도 드들강도 휘돌아 휘돌아 마른 목을 축이네

알락그늘나비도 부채장수잠자리도

꾀꼬리도 콩새도 제 소리가 있고 제 몸짓이 있어

꿈꾸는 저마다의 색깔대로 노래하고 춤추네


사자후 같은 열창에 하늘문이 열리고

화산폭발 같은 춤사위에

매듭도 옹이도 순한 실타래처럼 얼쑤얼쑤 풀려나서

바다가 산이 되는 파천황이 예술이네

은하수의 별들이 홀로 외롭게 반짝여도

모여 모여 아름다운 은하수 되어 흐르듯이

저를 꽃피우며 꽃밭으로 어우러지는 것이 예술제 아니겠나


여보시게, 예술혼으로 피와 살이 얽혀버린

연리지가 된 우리끼리 햇살처럼 땅밑까지 밝혀보세

살풀이로 백두산도 울려보고 휘몰이로 두만강도 웃겨보고

백두대간 지구촌 우주 끝까지

덩이덩이 열 덩이의 무지개를 띄워보세

일곱 빛깔 일곱 마음 대동세상 펼쳐내어

얼씨구 절씨구 우리 꽃밭 우리 무지개

어우러져보세 어우러져보세.


2011, 제3회 고운최치원문학상 본상 수상소감


눈물은 태초에 가시였단다


순한 눈을 지키라고 하느님이 선물로 주셨지


발톱을 세워 달려드는 적들을

가시는 차마 찌를 수 없었단다


마음이 너무 투명해서

적들의 아픔까지 유리알처럼 보였거든


세상의 순한 눈들은

가시의 방향을 바꾸어

제 마음을 찌르고 말았단다


도살장의 소


마음이 흘린 피


그게 눈물이란다.(졸시 ‘눈물에게’ 전문)


보상을 바라지 않는 눈물들이 있어 세상은 밝고 따뜻합니다. 자기희생이 꽃으로 피어난다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꽃 바로 ‘모성’일 것입니다. 그리고 모성의 열매는 “나는 괜찮다.” “나는 되었다.”로 마감됩니다.

 미물인 곤충에서부터 인간에 이르기까지 모든 모성은 종교 그 자체입니다.

누군가는 그 눈물을 닦아주어야 하리. 그리고 그 누군가가 시인일 것입니다. 이제 ‘시’라는 기나긴 모래사장의 모래 한 알이 되었을까요? 모래 한 알에 의미를 부여해주신 심사위원님들께 깊은 감사를 올립니다.





징검다리

                    전숙


산다는 것 어찌 보면 징검다리 건너는 일이지요


아스라한 둔덕을 건너다보며 긴 한숨을 몰아쉴 때

젖꼭지처럼 까맣게 반짝이는 별빛들

어미의 마음으로 누군가 괴어놓았을 징검돌들

건너가는 누구의 발걸음도 불안하지 않도록

흔들리는 가슴끼리 이리 내어주고 저리 덧대어서

하지 않은 약속처럼 아귀 맞는 조약돌이 되어

사이사이 요리조리 끼워놓은 정성을 딛습니다

아지 못한 그이의 지극한 마음이 길을 잡아줍니다


산다는 것 어찌 보면 같으면서 다른 우리끼리

이름도 없이 빛나는 은하수의 작은 별들처럼

이리 내어주고 저리 덧대어서

서로의 눈물을 괴어 징검돌이 되어주는 일이지요


계절을 건너기 위해 가을의 징검다리가 된 저 낙엽처럼

우리는 또 누구의 눈물을 딛고

오늘을 건너고 있는 것일까요.


아란야*

                               전숙

‘아란야’가 ‘알았냐’로 들리는 절집이 있다

심향사 마당에 서면

쇠지팡이를 짚은 나이든 팽나무 한 그루를 만난다

  

어린 나무를 마당에 앉히며 노승은 당부했다

세상을 좇지 말고 ‘아란야’가 되거라

스님을 알아듣지 못한

나무는 공명을 좇아 하늘로 하늘로 길을 잡았다

우연찮게 땅을 내려다본 나무는

뙤약볕에서 이글대는 불목하니를 만났다

나무는 저도 모르게 허리를 굽혀 그늘을 넓혔다

그늘에 들어 뜨거운 번뇌를 내려놓는 불목하니를 보고서야

나무는 비로소 스님을 알아들었다

나무는 벼락을 불러

한사코 하늘로 달려가는 다리를 불칼로 잘라버렸다

생살을 지지는 아리고 아린 시간이 억겁처럼 흐르고

젖이 덜 떨어진 상처는 궂은날마다 비명을 질렀다

환지통을 겪을 때마다 새살 같은 어린 가지를 토해

그늘을 키운 나무는 모든 번뇌들의 적정처가 되었다



*아란야: 적정처, 쉬어가는 곳이라는 의미의 산스크리트어


왼쪽이 아프다

                              전숙


땅이 왼다리를 전다

왼쪽으로 기울어지는 몸

강한 오른손에 밀려 움츠러든 왼손

주방보조처럼 제대로 된 음식 만들어 본 적 없다

길 왼쪽에 몸을 푼 작은 저수지

자궁내벽 생살 움푹 패어있다

군무를 추며 상처를 핥는 하루살이무리

치맛자락을 잡아당겨 흉터를 덮어주려는 듯

깊은 골을 따라 애잔한 물줄기 서넛 긴 자락을 끌고 있다

형제 중 공부가 뒤처진다고

왼손처럼 자꾸만 움츠러들었던 작은 언니

교통사고로 우리 곁을 떠난 뒤

어머니는 왼 무릎이 운다며

앉기만 하면 왼 무릎을 왼손바닥으로 쓸어주었다

모든 애잔한 것들은 왼쪽으로 몰리는 걸까

왼쪽 하늘이 붉게 충혈 된다

더는 못 참겠다는 듯 염증이 서럽도록 붉게 번진

어머니 왼 무릎이 산등성이로 풀썩 꺾이고

아픈 살이 떠나자 남아있던 몸도 이내 어두워졌다.




먹 한 도막

                        전숙


벼루에 먹 한 도막 누워계시네

이제는 누구에게도 짜줄 먹물 한 방울

남아 있지 않은 가슴에는 흡족한 웃음 몇 날 고여 있네


열세 살에 새끼머슴이 되었네

머슴살이 석삼년에 곱분이에게 장가들었네

세경으로 대밭이 딸린 작은 초가집 한 채 얻었네

아들딸 다섯 두었네, 별들이 돌아갈 시간이면

대숲이 우우 소리를 질러서 부부양주를 깨웠네

생의 다리품이 팍팍할 때마다

뒤꼍의 대나무밭은 밥이 되고 월사금이 되고 차비가 되어 주었네

봄이면 죽순으로 죽순이 여물면 대바구니로

오일장마다 시오리길 이고 지고 부부는 걸었네

다섯 아이 모두 대처에서 대학공부시켰네

막내가 대학 졸업하던 날

몽당먹이 곱분이에게 말씀하셨네

이제 남은 먹물을 우리에게 써도 되겠네

그러나 한평생 당신 위해 무엇도 써본 적 없어

누룽지처럼 말라붙은 먹물마저 통장에 들고 말았네

그해 대밭에 하얀 꽃이 무성하였네


무릎 꿇고 두 손으로 받쳐 든 먹 한 도막

생의 벼루에 박박 갈릴 때마다

손톱발톱 뼈마디가 녹아내렸네

서쪽하늘에 노을 한 자락 너무 붉어 먹빛에 들었네

말라죽은 대밭벼루에는 맛있게 갈아 마신 몽당먹 한 도막

웃는 듯 봉긋 누워계시네.      



하늘말나리

                       전숙


치매요양원 햇볕 잘 드는 방이

하늘말나리 입담에 오늘도 수런거린다

시끄럽다는 비질에 풀썩 튀어 올랐다가

자리만 바꾸어 앉는 먼지군단처럼

어떤 따가운 햇살에도 그녀의 고백성사는 멈추지 않는다

비지땀에 전 속곳까지 발딱 뒤집어서

과거지사를 시시콜콜 풀어내는 하늘말나리

여섯살 쯤에 구멍가게 알사탕 한 개 슬쩍 입에 문 적 있었다고

무능한 서방 미워서 시어머니에게 악담부담 몇 번 했었다고

대면대면한 며느리 섭섭하다고 뒤돌아서 눈물 찔끔했노라고

실패가 된 몸을 뒤집어서 한생 동안 감은 실을 풀어내고 있다


무명실에 새겨진 물결치는 무늬를 하느님이 잘 보시도록

얼굴 복판에 점자로 찍어놓았다

그녀는 하느님이 소경이란 걸 어찌 알았을까

친절하게도 그녀가 한 획 한 획 꾹꾹 눌러 찍은

점자를 더듬으며 하느님이 심판하고 계신다

세상에서 가장 정직한 하늘말나리는

아리아드네의 실처럼 제 온 길을 되짚어서

천국으로 돌아가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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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레 먹은 이파리

                          전숙


키 작은 화살나무 무성한 푸른빛사이로

언뜻언뜻 비치는 샛노란 빛

부지런한 벌레가 벌써 다녀갔나보다

벌레가 뜯어먹은 구멍 두엇 난 이파리에

때 이른 단풍이 샛노랗게 들었다


소년소녀가장의 캄캄한 귀로길 같다

고문당하는 투사의 구멍 난 가슴 같다

꽃기억들이 뭉텅뭉텅 빠져나가는 치매환자의 뇌수 같다


초록을 끝까지 걸어가면 만날

다홍빛 노을의 여정을 도둑맞은 벌레 먹은 나뭇잎

다홍빛에 도달하지 못하고

구멍 난 꿈과 구멍으로 흘러가버린 푸른 시간이

노랗게 단풍들어 있다


푸른 시간들이 절단 난 길 위에서

단풍은 스스로 애도하며

온몸이 만장이 되어 펄럭이는데


만장을 세차게 흔들어주는 바람군단은

떠나보내는 몸짓이라기보다

타오르는 촛불에 희망을 지피는 촛불집회 같다.


*********



헌것입니다

                                 전숙


헌 옥장판 한 장을 얻어왔습니다

주는 손도 받는 손도 흔연합니다

갖은서 한 줄 풀려도 노심초사 없습니다

쾅하고 문 닫는 소리에 소스라칠까봐

조심거리는 몸태는 더더구나 없습니다

물건이나 주인이나 대면대면입니다


헌차나 헌옷이나 헌사람은 김칫국물이 튀거나

돌팍에 흠집이 나도

소슬바람 한 점 일지 않고

작은 웅덩이 잔물결조차 오히려 조용합니다


아무리 高로 높여도 한 달에 기천 원 나오는

전기값, 그래 그 정도면 내 뼛속에 들러붙는

한기 내쫓는데 부담 없는 가격입니다

바로 그것이 내 몸값임을 자각하는 순간

이제는 스스로 헌 것이 되어버렸습니다

내 몸 어디 한 쪽이 우그러져도 아무도

눈썹 한 올 흔들리지 않을 것입니다


백내장 낀 헌 눈동자로 내려다보는 보름달이

허리 깊숙이 휜 강물을

헌 달빛지팡이로 더듬고 있습니다

고무줄 늘어진 헌 속옷처럼 편안한 밤입니다.

                       (2011전남시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