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는 여자*
-피카소에게
전숙
나는 태양의 어린 연인 세상의 모든 바람을 낳았네
정지된 시간의 벽에서 어린 내가 울고 있네
젖은 기억뿐이네 어머니가 된 내가 울면서 나를 어르네
검정색과 빨강색은 내 슬픔의 주조
멈추지 못하는 바람을 가슴에 품는 일은
슬픔의 강에 온 생을 던지는 일이었네
프로메테우스의 심장을 쪼아 먹는 독수리처럼
내 남은 길을 파먹는 절망의 부리
벼랑 끝의 아스라한 슬픔의 둥지
회한의 바람은 너무 늦게 도착하고
알은 이미 둥지에 없네
빈 둥지의 어깨가 들썩이네
눈은 더욱 깊어져 바람의 등뼈를 반추하네
태양이 끊임없이 욕망했던 꽃의 눈물이
누구도 결코 해체할 수 없었던
곱게 빗질된 나의 사랑에서 주룩주룩 흘러내리네
여인의 눈물을 퍼 올리는 태양의 원초적인 후각은
곡비처럼 세상의 모든 연인을 위해 울고 싶었네
여인은 울다가 울다가 스스로 정화되고
스스로 용서하고 스스로 눈물을 닦고 스스로 일어서네
울음을 삼키던 이빨 사이에서
붉은 미소가 햇살처럼 새어나오고
엉망으로 젖은 기억을 말리네
아침이면 새 눈을 뜨는 아무도 못 말릴 저 햇살의 힘
나는 태양의 어린 연인, 세상의 모든 바람을 낳았네.
*피카소의 작품, 모델은 그의 다섯 번째 연인인 도라마르.
************
먹 한 도막
전숙
벼루에 먹 한 도막 누워계시네
이제는 누구에게도 짜줄 먹물 한 방울
남아 있지 않은 가슴에는 그래도 흡족한 웃음 몇 날 고여 있네
열세 살에 새끼머슴이 되었네
머슴살이 석삼년에 곱분이에게 장가들었네
세경으로 대밭이 딸린 작은 초가집 한 채 얻었네
아들딸 다섯 두었네, 별들이 돌아갈 시간이면
대숲이 우우 소리를 질러서 부부양주를 깨워주었네
생의 다리품이 팍팍할 때마다
뒤꼍의 대나무밭은 밥이 되고 월사금이 되고 차비가 되어 주었네
봄이면 죽순으로 죽순이 여물면 대바구니로
오일장마다 시오리길 이고 지고 부부는 걸었네
다섯 아이 모두 대처에서 대학공부시켰네
막내가 대학 졸업하던 날
몽당먹이 곱분이에게 말씀하셨네
이제 남은 먹물을 우리에게 써도 되겠네
그러나 한평생 당신 위해 무엇도 써본 적 없어
누룽지처럼 말라붙은 먹물마저 통장에 들고 말았네
그해 대밭에 하얀 꽃이 무성하였네
무릎 꿇고 두 손으로 받쳐 든 먹 한 도막
생의 벼루에 박박 갈릴 때마다
손톱발톱 뼈마디가 녹아내렸네
서쪽하늘에 노을 한 자락 너무 붉어 먹빛에 들었네
말라죽은 대밭벼루에는 맛있게 갈아 마신 몽당먹 한 도막
웃는 듯 봉긋 누워계시네.
***********
아란야*
전숙
‘아란야’가 ‘알았냐’로 들리는 절집이 있다
심향사 마당에 서면
쇠지팡이를 짚은 나이든 팽나무 한 그루를 만난다
어린 나무를 마당에 앉히며 노승은 당부했다
세상을 좇지 말고 ‘아란야’가 되거라
스님을 알아듣지 못한
나무는 공명을 좇아 하늘로 하늘로 길을 잡았다
우연히 땅을 내려다본 나무는
뙤약볕에서 이글대는 불목하니를 만났다
나무는 저도 모르게 허리를 굽혀 그늘을 넓혔다
그늘에 들어 뜨거운 번뇌를 내려놓는 불목하니를 보고서야
나무는 비로소 스님을 알아들었다
나무는 벼락을 불러
한사코 하늘로 달려가는 다리를 불칼로 잘라버렸다
생살을 지지는 아리고 아린 시간이 억겁처럼 흐르고
젖이 덜 떨어진 상처는 궂은날마다 비명을 질렀다
환지통을 겪을 때마다 새살 같은 어린 가지를 토해
그늘을 키운 나무는 모든 번뇌들의 적정처가 되었다.
*아란야: 적정처, 쉬어가는 곳이라는 의미의 산스크리트어
******************
시작노트
징검다리
전숙
산다는 것 어찌 보면 징검다리 건너는 일이지요
아스라한 둔덕을 건너다보며
긴 한숨을 몰아쉴 때
젖꼭지처럼 까맣게 반짝이는 별빛들
어미의 마음으로 누군가 괴어놓았을 징검돌들
건너가는 누구의 발걸음도 불안하지 않도록
흔들리는 가슴끼리 이리 내어주고 저리 덧대어서
하지 않은 약속처럼 아귀 들어맞는 조약돌이 되어
사이사이 요리조리 끼워놓은 정성을 딛습니다
아지 못한 그이의 지극한 마음이 길을 잡아줍니다
산다는 것 어찌 보면
다르면서 같은 우리끼리
이름도 없이 빛나는 은하수의 작은 별들처럼
이리 내어주고 저리 덧대어서
서로의 눈물을 괴어 징검돌이 되어주는 일이지요
계절을 건너기 위해
가을의 징검다리가 된 저 낙엽처럼
우리는 또 누구의 눈물을 딛고
오늘을 건너고 있는 것일까요.
시작노트: 개울을 건너려고 두리번거리면 우리네 개울에는 하지 않은 약속처럼 꼭 징검다리가 있습니다. 뒷걸음들을 위해 간절하게 괴어놓았을 그 마음들을 생각하면 가슴이 뭉클해집니다. 나도 작은 징검돌이 되어, 흔들리는 생을 건너가는 누군가의 디딤돌이 되고 싶기도 했습니다.
**************
기행시
내 여자*
전숙
첫날밤처럼 잔뜩 수줍은 먹구름에 기대어
낯선 감각으로 더듬어 내려가니
삼복콩밭 김매느라 얼씨구 돋아난
땀띠의 촉감이 낟알처럼 서걱거렸다
담담하던 손길이 문득 뜨거워지는데,
생의 반나절을 남의 동네 먼 곳만 서성였다
내 것이라고 눈길도 주지 않고
소박 놓았던 내 여자, 영산강
허깨비 같은 외로움만 일어나고 눕던 세월은
제 빛과 향기를 놓아버려
적막한 등대와 황토빛깔은 한 치의 마음도 내비치지 않았다
잔뜩 웅숭그린 파도가 성난 황소처럼 달려들고
급기야 소낙비 같은 눈물에
오장이 뒤집어지고 한풀이 같은 강풍이 휘몰아쳤다
그녀를 꼭 안고 기도하듯 토닥였다
구름 너머 햇살에 살풋 볼우물이 파이고,
깊이 가두었던 속내가 가볍게 들썩이더니
미운 나에게로 싸목싸목 열렸다
저고리고름이 어룽질 때마다 한 뼘씩 웃자란 갈대는
수런대는 바람에 고개를 끄덕거리고
차곡차곡 개켜두었던 주름진 사연은 어느덧 날개를 펼친다
창공에 펄쩍펄쩍 펼쳐내는 숭어를 좇아
검은 해오라기 스치듯 짝을 부르고,
고흔 가르마처럼 달려오는 내 여자를 소박 놓고
나는 내 안의 어떤 허상을 그리워했던 것인가
그윽한 손길이 포로롱 풋잠에 빠진 내 이마를 쓸어주었다.
*영산강탐사를 다녀와서
'☆˚ 맑음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2011년 발표작 (0) | 2011.12.30 |
---|---|
사랑하는 일이란/ 전숙 (0) | 2011.07.24 |
5.18 31주년 추모시 ---목숨으로 길어 올린 민주의 빛이여! (0) | 2011.05.12 |
고향축/전숙 (0) | 2011.01.25 |
울음소리/전숙 (0) | 2011.01.1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