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아, 5.18 !
전숙(맑음)
이름만 들어도 눈물겨운
그 날 나는 무엇을 하였던가
지산 유원지에서 리프트카를 타고
가족들과 하하 호호거리며 광란의 금남로를
평화로운 눈으로 조망하였다
내 누이가 나라를 지키는 공수부대원에게 성폭행 당하고
내 동생이 이성 잃은 군화에 짓밟히고
마구잡이 곤봉 세례와 대검에 찔려 피가 튀는데
나는 아이스크림을 핥으며 무등을 타고 있었다
산에서 내려오니 들리는 소리
군인들이 학생들을 다 잡아간다
개돼지처럼 닥치는 대로 패대기친다
경상도 군인들이 광주 사람 다 죽이러 왔다더라
대명천지 밝은 대낮에 무슨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당가
얼릉 집에 가서 박찬희 세계타이틀전이나 보장께
광주는 불이 꺼지고 숨쉬는 생명들은 모두
캄캄한 지하동굴에 몸을 숨기고
갑자기 귀머거리 벙어리가 되어
눈알 뒤룩거리며 손짓발짓만 하였다
나는 온갖 공포의 어휘들을 풍문으로 들으며
이제 발차기를 시작한 내 뱃속의 아이가
그 군화발의 주인도 아니고
그 군화 발에 채이지도 않기를 빌었다
권력의 시녀도
권력의 희생자도 되지 않기를 빌고 또 빌었다
광주 시민들은
목숨을 내놓고
총을 맞고
고문을 당하고
주먹밥을 나르고
아낌없이 가게 물건을 내어놓는데
도청 앞 분수대에서 함성을 지르며
맨몸으로 민주를 사수하는데
나는 이불을 뒤집어쓰고 악몽이 빨리 끝나기만을 기다렸다
뱃속의 아이가 커서 국방의 의무를 마치고 제대하였다
5.18 영령들과 수많은 종철이와 한열이의 피의 강을 건너서
내 아이는 군화발로 동족을 짓밟지 않아도 되었고
대검과 곤봉으로 미친 사냥개처럼 날뛰며
친구를
누이를 사냥하지 않아도
명령불복종 죄를 짓지 않았다
그래서 양심의 가책으로 미치지도 않을 것이며
군홧발에 채이지도
곤봉으로 두드려 맞지도
대검으로 찔리지도
수치를 안고 빨가벗겨지지도
지옥보다 더한 고문도 받지 않았으니
밤마다 고문후유증으로 고통의 세월을 울부짖지도 않으리라
이만하면 나는 기도의 응답을 받았는가
5.18 민주영령들의 희생의 대가로 얻어 탄
민주열차 무임승차의 기쁨을 만끽해도 되는가
해마다 5․18이 오면
5.18의 노래를 따라 부르며
가슴 뭉클하게 벅차 오르고
그 때의 기록물들을 보며 치를 떨고
그저 육두문자로 욕하는 것이 나의 분노의 끝이요
민주화운동임을 자각하는 것으로 나의 한계를 인정할 것인가
도대체 나는 그 날 무엇이었으며
20여 년이 지난 지금의 나는 무엇인가
다시 그 날이 오면 나는 총칼 앞에 당당히
‘아니오’ 하고 나설 용기를 낼 수 있을 것인가
여전히 겁 많은 한심한 인간으로서
나도 그 날 광주에 있었다고
5.18에 공치사를 할 것인가
5.18 영령들에게
당신들을 위해
존경과 애모(哀慕)의 눈물 몇 방울 떨구고
독재자에게 방안에서 주먹을 휘둘렀다고 자랑할 것인가
어쨌든 나는 그 날 역사의 현장에 있었다는
사실만으로도 가슴 뿌듯하다고 애원할 것인가
팔 개월 태아를 안고 가신 최미애 님의 비석을 부여잡고
나와 내 아이는 운 좋게 살아남아
당신을 애도한다고 통곡할 자격이 있는가
나는 광주 시민이었음을 자부할 자격이 있는가
나는 아아, 5.18 ! 하고 시를 쓸 자격이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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