맑음시평

대한문학시평- 2014 가을호

전숙 2014. 12. 25. 10:35

계간평 -대한문학 2014년 가을호-시

프렌치키스

                         전 숙(시인)ss8297@hanmail.net

 

베를린은 기억의 도시다. 아니, 기억하는 도시라고 말하는 게 맞을 것 같다. 그들은 잊지 말아야 할 기억이나 추억하고 싶은 기억을 건축물, 표지판, 기념비, 공원으로 만들어서 기억한다. 그 중에서도 유명한 것은 ‘살해당한 유럽의 유대인을 위한 기념비’다. 기념비 제작에 참여했던 미국의 조각가 리처드 세라는‘사람들은 매일 같이 자신의 코앞에 있는 거대한 기념비로 인해 약 칠백만의 유대인을 살해한 그들의 잘못을 기억(Erinnerurg)하길 원하지 않는다.’라고 하면서도 그 앞에 서면 영원히 잊지 못할 기념비를 만들었다. 독일어 ‘Erinnerurg’은 우리말로 기억이나 추억으로 번역된다. 에밀 슈타이거는 서정시의 발생 원리를 회감(回感, Erinnerurg)으로 보았다. 즉 기억이나 회상 등에서 서정시가 시작된다고 본 것이다.

시인의 영혼은 시인의 가슴에 있다. 그러므로 서정시는 시인의 가슴에서 태어난다. 시인의 가슴은 그리움을 먹고 성장한다. 그리움은 시인이 체험한 과거의 어느 시간대나 사건에서 촉수가 길어 나온다. 아팠던 상처나 행복했던 시간들이 지워지지 않고 비석이나 표지판처럼 우리의 기억으로 각인된다. 그 각인된 기억이 회감이 되고 그리움의 본향이 되는 것이다. 그것들이 현재라는 시간을 끌어당기듯이 부르고 추억이라는 미증유의 인간감정이 촉수를 내어서 과거에게로 달려간다. 이 시점에서 프렌치키스가 일어난다.

입맞춤을 해보면 안단다/해의 살들이 지상에 쏟아져 내리는 이유/차가운 네 반쪽을 그저 내버려둘 수 없어서/심장이 얼마나 많은 산과 강의 요철을 지나/그 뜨거운 살의 뿌리를 뻗었는지//강철보다 단단한 의지가/얼마나 부드러운 살이 되어/너의 냉담을 따뜻하게 끌어안는지//삶이 도보여행이듯이/입맞춤도 맨발의 여행이란다/해변에 끊임없이 도착하는 파도처럼/전설의 산에서 잃어버렸던/반쪽의 기억을 배달하는 침묵이란다//자전거나 승용차에서 내린/단지 너의 순전한 영혼만이/그 바다를 건널 수 있단다/깊은 바다로 들어가려면/돛을 바람에 맡기듯이/두 영혼의 리듬에 맞추어 /해류를 따라 부드럽게 흘러가야 한단다//이제, 심장의 뿌리를 뻗어/두 가지가 하나로 엮이듯이/영혼의 체온을 나눌 때.(졸시, 프렌치 키스)

과거로 달려가는 촉수를 회감이라고 한다면 과거는 더 이상 과거가 아니다. 그것은 현재의 촉수와 프렌치키스를 통해 이미 체온을 나누고 한 영혼으로 거듭났기 때문이다. 그래서 혹자는 그 상태를 ‘과거의 현재화’라고도 한다. 과거가 현재의 시간대로 들어와 시적 상상력과 결합되면 과거는 재탄생되어 ‘창조적 과거’가 된다. 이 시점에서 시가 태어난다. 프렌치키스를 통해 사랑이 태어나듯이 과거와 현재의 깊은 교감을 통한 상상력이 창조적 과거로 이행하면서 비로소 시가 첫울음을 터뜨리게 되는 것이다.

이제 시인들의 창조적 과거가 시로 태어난 모습을 들여다보기로 하자.

 

이에 갑옷을 입힌다. 백전노장 어금니에

삶의 최전방에서 목숨을 지키기 위해

베어서 씹고 삼키며 쓴맛 단맛 다 겪었다

 

마모되고 금가고 그 전흔 역력하다

아직 늙마의 전선 한 고지가 남았는데

금 방패 재무장 시켜 퇴로 없이 돌격이다

-유휘상의 <보철을 하며> 전문

 

치아는 사람의 인생행로에서 오복에 꼽힐 만큼 중요한 몸의 기관이다. 먹지 않으면 살 수 없고 먹는 일 가운데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이 치아이니 건강한 치아는 한 생에서 꼭 받고 싶은 복 중의 하나가 되는 것이 어쩌면 당연하리라. 그러나 부실한 치아로 태어날 수도 있고 관리를 잘못해서 부실해질 수도 있겠지만 죽음의 그 시간까지 자연치아로 살기는 거의 불가능하다. 치아는 태어난 지 6개월을 기점으로 한 개씩 생겨나기 시작하는 유치단계를 거쳐서 사춘기 무렵이면 유치는 거의 빠지고 첫사랑만큼이나 앓고 난 뒤 생겨나는 사랑니를 포함해 영구치 32개를 가지게 된 날 비로소 어른이 된다. 수십 년 동안 나를 먹이기 위해 수고한 “삶의 최전방에서 목숨을 지키기 위해/베어서 씹고 삼키며 쓴맛 단맛 다 겪”어 낸 “백전노장 어금니”가 “마모되고 금가고 그 전흔 역력하다”그런데 “아직 늙마의 전선 한 고지가 남았”다. 시적 화자는 좌절하지 않고“금 방패 재무장 시켜 퇴로 없이 돌격이다”라고 굳은 의지를 보인다. 한 생을 수고한 치아(과거)에게 치료를 해주고 무공훈장을 주며 격려하는 시의 흐름은 독자로 하여금 주먹을 쥐고 백전노장을 응원하게 만드는 활력을 불러일으킨다.

 

지난해 낙엽 한 장을 들고

공원 벤치로 찾아와

해와 바람이 사랑으로 쓴

농이 붉게 젖은 시라며 낭송하던

내 속에 피었던 사람도

계절 따라 쉬이 먼 길을 떠났거늘

 

시린 하늘을 무심코 주시하던

내 눈 안에서

길 떠난 뒷모습

붉게 젖은 이별의 통증이 아른거려

국화꽃도 피기 전에 그 벤치에 앉아있다.

-이철수의 <가을 벤치에서> 중에서

 

“지난해”와 “내 속에 피었던 사람”이 촉수를 내미는 과거라면 “붉게 젖은 이별의 통증”과 “국화꽃도 피기 전에 그 벤치에 앉아있”는 것이 현재다. 과거와 현재가 오버랩 되면서 프렌치키스를 하듯이 한 편의 아름다운 시가 탄생하는 현장을 독자들은 보고 있는 것이다.

 

우리 집 화단에 뿌리내린 나팔꽃

창자가 꼬였나 몸을 비틀고

장미꽃 줄기타고 올라가더니

빨랫줄에 턱을 걸치고 살아간다.

 

...중략...

 

뿌리도 약하고 줄기도 실낱같은데

약한 체질 강한 의지력으로

빨랫줄에 등을 대고 누워서

태양을 쳐다본다.

-김나현의 <허약체질 낙상할까> 중에서

 

나팔꽃 줄기는 덩굴성으로 타 물체를 감아 올라가면서 길이 3m 정도로 자란다고 한다. 제 스스로는 설 수 없는 덩굴성이다. 지탱할 지팡이가 있어야 걸어가는 노년기처럼 허약체질로 태어난 나팔꽃은 “창자가 꼬였나 몸을 비”튼다. “뿌리도 약하고 줄기도 실낱같은데”에 시적 화자의 안타까움이 배어있다. 그러나 시인은 허약체질에서 “장미꽃 줄기타고 올라가”는 용기를 본다. “약한 체질 강한 의지력으로”에 시인은 격려의 박수를 치는 시적 장치를 해두었다. 더불어 시인은 허약체질로 태어난 업보 같은 과거를 이겨내고 “빨랫줄에 등을 대고 누워서/태양을 쳐다“보는 유유자적의 결말을 이끌어내고 있다.

 

푸른 잎들이 이제 우 우 우 푸르게 떨어져 나갔다.

뜨겁게 아프게 몸 부딪치며 떨어져 나갔다.

뼈만 앙상한 생선뼈처럼 살을 버린 나무들,

뼈만 앙상한 생선뼈처럼 살을 버린 나무들,

 

겨울나무들을 어이할까

사랑의 말 가눌 길 없는

나무는 겨울 적요를 안고 함묵(含黙)하다.

-박해수의 <나무가 하는 말> 중에서

 

위 텍스트에서 겨울나무는 생선뼈로 변주된다. 생선뼈가 살이 발라지듯이 “뜨겁게 아프게 몸 부딪치며 떨어져 나”가는 푸른 잎들. 그것은 노년기에 바라보는 젊은 날의 시간들이다. 아무리 붙잡고 싶어도 시간은 기다려 주지 않는다. 오동통한 볼살은 인정머리도 없이 사라지고 움푹 꺼진 눈두덩이며 주름살은 늘어 어디에도 고운 데라곤 없다. 시인은 “적요를 안고 함묵(含黙)” 할 수밖에 없는 겨울나무를 안타까운 시선으로 위로하고 있다.

 

봄이면 감꽃 목걸이 팔걸이

소꿉놀이 어린시절

새벽잠 설치고

청과로 떨어진 놈

주섬주섬 주어다가

단지 속에 우려낸

배고픔 달래던 시절

 

찬바람에 물드는 잎사귀

붉은 구슬 주렁주렁 매달고

가을 햇빛에 노골노골 익어가는 너

-변보연의 <시골집 감나무> 중에서

 

위 텍스트는 연 갈이로 봄에서 가을로 계절을 훌쩍 뛰어넘는다. 감꽃에서 청과로 다시 붉은 구슬로 시적화자의 시선이 이동하면서 감꽃 같은 어린 시절을 지나 청과 같은 사춘기를 보내고 가을 햇빛에 노골노골 익어가는 황혼이 되었다. 환유를 통해 사람의 일생과 감의 일생이 일치되고 있다. “새벽잠 설치고”와 “배고픔 달래던 시절”의 애틋한 기억이 “찬바람에 물드는 잎사귀”와 “가을 햇빛에 노골노골 익어가는” 현재가 프렌치키스를 함으로써 한 줄기의 가을 햇빛 같은 서정시가 태어나고 있다.

 

긴 허물만 이우는

꽃 진자리

한때는 용이었던

한때는 꽃이었던 우리의 삶도

 

어차피

사루어야 꽃이 되는 불꽃놀이.

-안성식의 <불꽃놀이> 중에서

 

밤하늘을 아름답게 수놓는 불꽃놀이! 그러나 펑펑 소리를 내며 우렁차게 화약이 타야 비로소 불꽃으로 피어나게 된다. “한때는 용이었던/한때는 꽃이었던”기억도 살라져서 완전 연소되어야 “불꽃놀이”의 창조적 시간인 꽃으로 피어나게 되는 것이다.

 

찻수저로 퍼낸 시간 움푹움푹 축이 나

한생의 가운데를 가로질러 훌쩍 지나

저승의 서러운 등대 갈피마다 스민다.

허름히 살아온 세상 미련만이 앙칼져

천지간 틈바구니 저 하나쯤 은근슬쩍

괜스레 가야할 길에 헛돌린 메아리다

-은봉재의 <끝자락> 중에서

 

“끝자락”은 중첩된 기억의 봉우리다. 시적화자가 첫울음을 터뜨릴 때 배급표처럼 배급받은 일생이라는 시간을 작은 차 수저로 아끼면서 퍼냈으나 화자의 조심성과는 반대로 “움푹움푹 축이 나”고 마는 시간이다. 어느덧 “저승의 서러운 등대”가 생의 “갈피마다 스민다”화자는 “미련만이 앙칼져”“메아리”처럼 돌아오게 하고 싶으나 헛바퀴일 뿐이다.

시적자아의 욕심은 끝이 없으나 세계는 여전히 객관적이다. 꽃을 끝없이 보고 싶으나 어느덧 녹음이 들고 푸르름에 잠기고 싶으나 벌써 단풍이다. 단풍을 오래 즐기고 싶으나 낙엽 되어 뒹굴고 있다. 세계는 무섭도록 침착하게 제 일을 한다. 자아만이 욕심과 기억에 얽매여 돌아보고 그리워한다. 창조적과거를 통해 시라도 써서 붙들어두고 싶은 것이다.

 

서울로 가는

기찻길의 끝없는 레일 위로

스쳐 지나가는 차창

밖에는 텅 빈

논 밭

무위한 허수아비

찾아오는 참새도 없다

-이독밀의 <가을 서정·1> 중에서

 

가을은 채움과 비움이 공존하는 미학의 계절이다. 생의 곳간은 채워졌겠지만 생의 들녘은 텅 비어 있다. 지킬 것도 없는 허수아비는 무위하고 주워 먹을 것 없는 수확이 끝나버린 가을논밭(노년기)에 “찾아오는 참새”는 당연히 없다. 쓸쓸함이 늦가을 소슬바람처럼 불어오는 텍스트다.

 

동그라미로 글썽이는 봄비

우묵하게 파인 가슴 물웅덩이다

 

파문으로 크면서 지워지는

무수한 동그라미 눈물로 고인다

 

한없이 들여다보는

찝찔한 삶의 맛이다

-이은무의 <빗방울로 그리는 동그라미> 전문

 

어쩌면 삶을 영위한다는 것은 이 텍스트에서처럼 “파문으로 크면서 지워지는/무수한 동그라미”들이 “눈물로 고”이는 일인지도 모르겠다. 걸음마다 가슴은 우묵하게 파이고 거기에 슬픔이 고인다. “한없이 들여다보는/찝찔한 삶의 맛” 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 찝찔한 맛에서도 그리움이 촉수를 내밀고 꿈틀꿈틀 다가온다. 상처뿐인 기억에도 시인의 상상력이 빙의를 하면 시가 되어 돌아온다.

 

눈깔 툭 튀게 부릅떠

꽉 물어도 숨 딱 멈추지 않게

거둔 내 새끼

 

온갖 것 밤낮 챙기는 애매비

철든 날 기달다 애간장 탄 날이

새끼 난 보람이다

-정선수의 <내 새끼> 중에서

 

새끼란 모든 피조물에게 영원한 그리움이다. 그리고 새끼는 기억에만 존재한다. 옛사람들이 효자비나 효자각을 세운 것도 그만큼 효자가 귀했기 때문일 것이다. “철든 날 기달다 애간장 탄 날이/새끼 난 보람”일 뿐이다. 요즘의 세태를 에둘러 완곡히 표현했으나 부모라면 누구나 공감할 텍스트다.

 

터지거라

화산이 뜨거운 언어를 뽑아내듯이

폭발하라

 

다시는 잊지 말아야 할 많은 것들 때문에

자꾸만 오늘을 잊어버리면서

겨우 꽃잎 하나를 만나기 위하여

나의 지금은 몹시 춥다.

-채규판의 <꽃과 철로>중에서

 

겨우 꽃잎 하나를 만나기 위하여”시적화자는

(한 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봄부터 소쩍새는/그렇게 울었나 보다.

한 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천둥은 먹구름 속에서 /또 그렇게 울었나 보다. ///노오란 네 꽃잎이 피려고 /간밤엔 무서리가 저리 내리고 /내게는 잠도 오지 않았나 보다. ― 서정주, 국화 옆에서)처럼 “몹시 춥다”그것은 “터지거라/화산이 뜨거운 언어를 뽑아내듯이/폭발하라”시를 기다리는 시인의 마음이 얼마나 춥고 처절한지를 느낌표처럼 노래하고 있는 텍스트다.

 

찾아가면 언제나

기다리듯 그 자리에 서있는 나무

 

바람 불면 같이 흔들리고

눈 비 오면 먼저 맞아 주고

여름 날 불볕 쏟아질 땐

시원한 그늘 펴주며

지친 발걸음 쉬어가게 하는 나무

 

그런 나무 같은 사람은 없을까

그렇게 사시사철 변함없는

소나무 같은 길벗은 없을까

 

아니, 이제라도

나부터 그런 존재로 거듭날 수는 없을까.

-채희문의 <나무 같은 사람>중에서

 

나무를 예찬하는 문학작품은 많다. 시적 화자는 많은 문인들이 예찬한 그런 “나무 같은 사람”을 찾고 기다린다. 어쩌면 세상의 모든 명줄들이 그런 길벗을 갖고 싶으리라. 화자는 독백처럼 “없을까?”로 청유를 하면서 “아니, 이제라도/나부터 그런 존재로 거듭날 수는 없을까”로 시적 주체인 자신이 세계와의 동화를 꾀하고 있는 것이다. 세계에만 바라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세계가 되어 다른 주체들을 껴안고 싶은 시적 의지가 견고하게 드러난 텍스트다.

 

한스 메이어홉에 기대면 “문학이란 체험적 시간 즉 의식내용을 의미관련으로 조직하여 예술화한 것”이라고 한다. 체험적 시간이 예술적 의도에 의해 표현되는 문학적 시간은 자연적 시간과 다르다. 그것은 예술적인 효과를 위해 자연적인 시간을 변용한 상상적인 시간이다. 과거의 체험이 허구라는 문학으로 이행하도록 하는 것이 문학적 시간이다. 김준오는 “상상력과 결합한 기억의 역할은 ‘창조적 기억’에 있다.”고 한다. 앞에서 말한 창조적 과거와 일맥상통하는 말이다. 즉 상상적 시간과 창조적 시간이 프렌치키스를 통해 결합한 것이‘문학적 시간’이란 의미이다.

김소월의 <진달래꽃>에 드러난 ‘상상적 시간’과 ‘창조적 시간’이 결합한 ‘문학적 시간’을 음미하면서 글을 맺는다.

나 보기가 역겨워/가실 때에는/말없이 고이 보내드리우리다//영변(寧邊)에 약산(藥山)/진달래꽃/아름 따다 가실 길에 뿌리우리다//가시는 걸음 걸음/놓인 그 꽃을/사뿐히 즈려 밟고 가시옵소서//나 보기가 역겨워/가실 때에는/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우리다 (진달래꽃 / 김소월) 終.