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집중조명 | 작품론
존재의 시원에 대한 재해석
- 전숙론
김병호
그동안 전숙 시인이 구축한 세계는 존재론적 고독이나 자아성찰의 문제들과 밀접한 상관관계를 맺고 있었다. 시인은 체험의 영역과 상상력의 영역을 균등하게 배치하여 단순히 자신만의 경험에 의해서가 아니라 인식 주관의 상상에 의해 생산된 영역을 동시에 거느리고 있어 시의 세계를 풍성하게 만드는 탁월한 재능을 지니고 있다. 그리하여 체험과 상상에 의해 직조된 그만의 세계는 적절한 비율과 배합에 의해 새로운 세계로 독자들을 인도하고 귀한 감동을 선사하곤 하였다.
오늘 읽는 전숙 시인의 작품 역시 이러한 세계에서 벗어나지 않고 있다. 기본적으로 시인은 주변의 사물과 대상으로부터 의미를 끌어내는데 능하다. 비록 하찮고 보잘 것 없고 부조리하다 하더라도 그것들을 예외적인 국면으로 전환시키지 않고 기꺼이 끌어안아 그것들로부터 아름다운 의미를 구원해내고자 한다. 전숙의 시를 보면 바로 그 사소한 것들 속에 근원적이고 완전한 세계가 숨겨져 있음을 어렵지 않게 발견해낼 수 있는 까닭이 여기에 있기도 하다. 시인은 가시적 일상의 영역과 불가시적 상상의 영역을 동시에 제시하는 창작방법을 통해 현대인들이 지닌 소외와 불안, 현대적 삶의 부조리를 ‘지금 여기’의 세계와 균등한 질감으로 구현한다.
다시는 놓지 않겠다는 듯 삭아가는 볏짚을 한가슴 따뜻하게 안은 채로 질척거리는 생의 습기를 거두어들였다. 볏짚을 들어내자 논바닥에는 아직 빠져나오지 못한 무진댁의 얼굴과 가슴과 무릎이 음각으로 새겨져있었다. 귀향한 그녀의 몸을 타고난 지형뿐만 아니라 그녀의 퇴행된 시간들이 무채색으로 덧칠한 활처럼 휜 무릎이며 굵어진 손가락매듭까지 한 장의 항공지도처럼 논바닥이 기억하고 있었다.
- 「귀향」 부분
시와 생활이 분리되지 않는 것처럼 시인에게 시는 일상 속에서 피어나고 시의 중심에는 일상의 삶들이 아로새겨져 있다. 시적 내용에서도 드러나지만 시인의 작품은, 객관적 대상을 전제로 이루어지지만 대상 자체보다는 대상에 대한 인물의 행위를 중심으로 이루어진다. 즉 이야기를 내포하고 있기 때문에 시가 추상적이고 형이상학적 측면으로 경도되지 않으면서 구체적 경험과 밀착된 사실적 경향을 유지하게 된다.
「귀향」에서 보듯이 시인은 논바닥에 쓰러져 있는 무진댁의 모습을 감각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단순히 시적 대상을 미적이고 감각적으로 묘사하는 데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외적 형상을 묘사하는 순간, 대상이 지닌 외양은 독특한 이미지로 전유되어 곧바로 상상력의 원형적 지대로 이동시킨다. 가령 무진댁이 ‘요양원’에서 ‘딸네’로 그리고 ‘고향’으로 옮겨가면서 동원되는 ‘안개’와 ‘살얼음’ ‘능소화’ ‘볏짚’ ‘논바닥’이 이미지 한 축으로 작동되면서 시적 대상을 원형적 시각과 차원에서 해석할 수 있는 통로를 마련해 주는 것이다. 시인은 잠든 무진댁을 아득(늑)한 품으로 안고 있는 ‘안개’와 길을 벗어난 자동차바퀴 같은 그녀를 안쓰럽게 물고 있는 ‘논바닥’, 그녀의 몸을 감싸고 있었던 ‘볏짚’, 담벼락 아래로 통꽃 째 툭 떨어져버린 ‘능소화’의 이미지를 가장 순수한 이미지로 전유한다. 따라서 이러한 이미지들은 시인의 원형적 형상을 회복하게 만드는 시인의 독창적 인식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전숙의 작품들 다수는 어머니, 아버지, 죽음 등으로 유형화되는 근원적 세계에 닿아 있다. 시인이 인간의 과거를 추억하면서 부모와 고향을 그리는 까닭은 그것들이 존재의 시원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현재의 순간에서 존재의 시원을 끊임없이 재해석함으로써 자아는 분열과 파괴를 극복하고 동일성을 회복하게 된다. 자아에게 존재론적 근거와 자기동일성을 회복할 수 있는 아늑한 품을 제공한다는 점에서 우주적 시원은 하나의 공간으로 기능한다. 무진댁에게 고향의 ‘논바닥’이, 「아버지의 손」에서 아버지는 ‘사막’으로 기능하는데 이는 개인적이면서 원형적인 차원에서 초월적 심상을 제공하고 있다.
사막을 보고 있다
만지면 고운 모래가 묻어날 것 같은
고요가 고요를 말리는 건조증이 아직 진행 중이다
저 사막에도 용트림하듯 거센 강물줄기 흘렀었다
회초리를 들어 내 장딴지를 후려치던
그 강단진 패기는 어디쯤에서 말라버렸을까
한 장 한 장 생을 굽듯이 아슬하게 구워낸
대학등록금을 은행창구에 들이밀 때
아버지의 손은 사바나로 변하고 있었으리라
- 「아버지의 손」 부분
시인은 시원적 공간과 일상의 공간을 넘나들며 각각의 의미영역을 확보하는 양상을 보여준다. 이 지점에서 시적 자아는 현재의 일상을 초월하는 존재론적 근거를 확인해주는 시원적 상상의 영역을 추구한다. 아버지의 손에서 사막을 발견하고 사바나를 발견하는 시인의 인식은, 외롭고 쓸쓸하고 부조리한 삶을 살아가는 시적 자아에게 존재론적 근원을 마련해주는 계기가 된다. ‘사막’과 ‘섬’(「잔치」), ‘대합실’(「냄새의 역사」) ‘저수지’(「왼쪽이 아프다」) 등이 보여주는 원형적 상징은 모두 시인에 의해 시원적 공간의 의미망으로 구축되게 된다.
또 우리가 눈여겨 살펴야 할 부분은 시의 형상화 방법이다. 이는 작품 「눈물에게」나 「아버지의 손」에서 쉽게 찾을 수 있는데, 시인은 대상으로부터 근원적 이미지를 떠올리고 원형적 상상력을 전개하는 일련의 과정들을 거치게 된다. 이는 시인이 시를 형상화하는 가장 핵심적이고도 기본적인 틀인데, 「아버지의 손」에서 시인은 생명체가 살아가기 열악한, 대표적 공간인 사막을 통해 애처러움과 슬픔을 동시에 불러일으키는 존재로 아버지를 상정하고 있다. ‘하얗게 말라버린 강과 샘’은 영원성을 상실한 공간인 동시에 인간이 닿을 수밖에 없는 역설적 일상의 공간(「잔치」에서 그려지는 빈집의‘난장판’역시 이에 해당된다)이기도 하다. 인생과 삶에서 체득되는 역설적 일상이 시인의 작품에서 구현되는 대목이다.
아마 세 번쯤의 겨울을 이 대합실에서 보냈을,
몇 번쯤 쫓겨났다가
참나무 연기처럼 꾸역꾸역 스며들었을
냄새의 역사들이 의자에 박혀있다
냄새도 닮은 무늬끼리 좋아하는지
교환하는 눈빛에 싸구려로션 같은 끈적함이 배어있다
아침샤워로 냄새를 감쪽같이 지우고 나온
냄새초년병들은 오래된 냄새를 피해 자리를 옮긴다
- 「냄새의 역사」 부분
시인이 근원적 상상의 공간과 일상의 영역 사이의 경계를 허물고자 한다고 해서 그에게 일상이 언제나 긍정되는 것은 아니다. 일상의 영역은 항상 부조리하고 소외로 가득 찬 공간이어서 사람들은 언제나 탈출의 욕망을 감추고 생활하는 곳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러한 일상일지라도 시인은 이를 배척하거나 포기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냄새의 역사」나 「잔치」에서 알 수 있듯이 그는 사소하거나 보잘 것 없으며 흔하디흔한 대상에 대한 시인으로서의 포용력과 능력을 지니고 있다. 일상과 원형의 심상이 서로 대립적이며 갈등이 내재되어 있는 공간에서 전숙은 특유의 감수성과 상상력으로 이곳을 근원적 영역에 위치시킨다.
전숙이 시도하는 존재론적 근원에 대한 탐색은 현재와 분리된 채 먼 과거에만 속한 것도 아니고 일상과 구분된 채 초월적으로 존재하는 것도 아니다. 시인은 ‘지금 여기’에서 그것들을 찾아낸다. 일반화되고 정형화된 심상과 상징이 아니라 시인이 자신의 체험과 자신의 일상에서 발견한 심상과 이미지이기 때문에 오히려 우리에게 더욱 큰 의미를 제공해할 수 있는 것이다. 존재의 근원을 탐색하기 위한 전숙의 시적 시도는 언어를 매개로, 더 정확하게는 이미지와 상징의 언어를 통해 이루어진다. 용산역 대합실의 풍경과 겹치는 산봉우리의 이미지뿐만이 아니라, ‘싸구려로션’과 ‘삼년치의 냄새’‘단내’의 후각적 이미지는 대상을 단순히 미적으로 구현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대상을 가장 순정한 상태로 이끌어내기 위해 노력이다. 시인은 일상이나 세계를 폭로하고 비판하기 보다는 주관적이고 감정적 미학을 구현하면서 오히려 더욱 유기적 이미지를 배치하는데 노력한다. 그리고 이때 이미지는 어떤 티끌이나 얼룩도 말끔히 지워져 대상이 드러낼 수 있는 가장 순결한 상태가 되고 시인은 비로소 원형적 상징에서 존재론적 성찰을 시도한다. 시인은 대상을 이미지화하고 연이어 시원적 상상을 전재하는 과정에서 언어적 자의적 측면과 존재론적 측면을 모두 보여준다. 현대를 살아가는 자아는 일반적으로 자기의 존재 근거를 확인하지 못하고 모호한 ‘안개’ 속을 헤매는 양상을 쉽게 보여주는데, 전숙은 원형적 세계에 기대어 존재론적 의미를 캐내고자 하는 시인만의 대응법을 지니고 있다. 그것은 시적 자아가 ‘지금 여기’라는 시공간을 외면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근원적 세계로의 매개가 되는 ‘냄새’ ‘눈물’ ‘손’이 결국은 ‘지금 여기’의 복판을 지나는 기표이며, 시적 자아는 이곳을 떠나지 않은 채 ‘지금 여기’에서 존재론적 탐색을 펼쳐가는 것이다.
앞서 진술한 바와 같이 전숙은 대상들로부터 어떤 정형화된 상상을 끌어내지 않는다. 우연히 마주치는 사물들을 자신만의 이미지로 채색하여 보다 근원적인 세계로의 길을 만들어낸다. 이때 시인이 구현하는 이미지는 근원적 세계에 닿을 수 있는 절대적이고 순수한 혹은 응집되고 완전한 이미지에 가깝다. 즉 시인의 눈에 포착된 시적 대상은 전숙 특유의 관점과 대응에 어우러져 새로운 모습으로 탄생하고, 시적 자아를 존재론적 의미의 세계로 인도한다. 이러한 과정에서 볼 때 전숙에게 언어는 기교적 차원에 놓여 있는 것이 아니라 존재론적 탐색과 직결되는 매개라 할 수 있다. 우리가 전숙 시인의 작품을 눈여겨 읽고 아끼는 배경에는 그가 펼쳐내는 새로운 이미지와 새로운 언어를 통해 원형의 상상 세계가 펼쳐져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는, 시인이 하찮고 보잘 것 없고 부조리하더라도 그것들 속에 숨겨져 있는 근원적이고 완전한 세계에 대한 탐색을 쉽게 멈추지 않기를 기대하며 응원한다.
김병호 | 2003년 <문화일보> 신춘문예 당선/시집 『달 안을 걷다』가 있음/현재 협성대 문예창작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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