맑음시평

대한문학시평 2014여름호

전숙 2014. 12. 25. 10:33

계간평 -대한문학 2014년 여름호-시

恨의 해법

-우리들의 아리랑고개

 

                                                       전숙(시인)ss8297@hanmail.net

 

‘화병’은 세계질병사전에 한국에만 있는 병으로 등록되어 있다. 그만큼 우리 민족의 정서에는 ‘화’로 표현되는 울화 즉 ‘한’이 강물처럼 흐르고 있다. 한을 풀어내지 않으면 화병이 생겨 종내에는 화병으로 인하여 존엄한 생명까지 잃게 된다.

요즘 우리 사회는 집단화병에 시달리고 있다. 실타래의 시작을 찾아야 실을 풀어낼 것인데 아무리 실타래를 돌려도 실끝이 보이지 않는다. 火(恨)의 실타래는 무슨 침묵처럼 앉아있다. 모두들 말을 잃고 있다. 온 나라가 막장드라마의 현장이 되고 있다. 날마다 들리는 끔찍한 엽기행각들.......세월호참사와 윤일병폭행치사사건....... 얼마나 더 놀라야 놀람이 끝을 낼까? 국민들은 공분에 밥맛을 잃고 넋을 놓고 있다. 다산은 시를 통해서 백성을 일깨워보고자 하였다. 우리 시인들이 무슨 힘이 있어 몽당연필 같은 필력으로 국민을 위무하고 짐승이나 악마에게 점령당한 가해자를 일깨워 사람을 만들 수 있을까? 금수강산에 화와 한의 실타래가 둘둘 감기고 있다. 한의 실타래를 풀어내야 할 멍에가 운명처럼 시인들의 어깨에 얹혀졌다. 국민을 위로하고 침몰해가는 나라를 구해야한다.

희망을 잃은 국민들이 영화 ‘명량’으로 몰리고 있다. ‘명량’은 날마다 모든 흥행기록을 갱신하면서 국민들을 위로하고 있다. 임금에 대한 충성과 애국애족밖에 모르는 이순신을 고문하고 감옥에 넣는 나라는 무슨 나라인가? 그런 한을 가슴에 품고도 사필즉생을 각오한 이순신은 또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는가? 이순신을 보더라도 우리 민족은 한을 풀어내는 민족이다. 굿으로든 노래로든 곡비나 귀신을 내세워서라도 묵은 한을 가슴에 남겨두지 않는다. 떡을 삼키듯이 꿀꺽꿀꺽 삼켜서 아리랑고개로 넘겨버린다.

恨을 옛사람들은 마음이 어긋난 것으로 생각했다. 마음의 흐름이 순탄하지 않고 무언가에 막혀서 어려운 지경에 이른 것이 한이다. 원망스럽고 억울하고 안타깝고 슬퍼서 응어리진 마음이 한이라고 국어사전은 설명해준다. 세월호 침몰현장을 보면서 온 국민의 가슴이 답답하고 숨을 쉴 수 없었던 이유가 바로 한이 가슴에 자리 잡았기 때문이다. 한은 세월호 피해유족과 온 국민의 가슴에 똬리를 틀었다. 침몰하는 세월호와 함께 모든 국민이 침몰한 것이다. 내가, 내 가족이 수장되는 것을 보면서 손을 쓸 수가 없다. 지켜보고 있는 해경들의 바짓가랑이라도 잡고 늘어지고 싶은데, 시간은 속수무책으로 흐르고 눈을 뻔히 뜬 채로 삼백 명을 수장시켰다. 몸을 던져 이웃을 구하는 선한 사마리아인이 없었다. 국가가 국민을 지켜주지 않는 것을 보면서 국민들은 하염없다가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졌다. 학생들과 함께 수장되는 악몽이 대한민국의 밤을 지배했다.

F.휠더린은 ‘시인의 사명은 신의 빗살을 잡아 천상의 선물을 감싸 민중에게 건네주는 것’이라고 했다. 우리 시인들도 몽당연필의 필력으로라도 한풀이의 한 역할을 감당해야 할 것이다. 포기하지 않으면 희망의 등불도 꺼지지 않는다. 마지막 한 사람을 찾는 그날 바다 밑이나 바다 위의 기다림도 끝나고 세월호의 통곡도 끝나고 한도 풀려서 노란리본은 풍등을 타고 편안히 떠날 수 있을 것이다. 우리 가슴에도 절망이 아닌 희망이 닻을 내리리라.

이제 우리 시인들의 한의 해법을 들어보자.

 

은장도 가슴에 품은

청상의 절개

한을 품으면 오뉴월에 서릿발 서고

독을 품으면 자결하리니

 

뜨거운 모래 속에 발을 묻고

끓어오르는 말 대신

서슬 퍼런 칼날 세워

울타리 치고 그 속에 갇혀있다

 

어떤 접근도 허용치 않는

독기 서린 표정

세상 누굴 향한 항변일까

백년을 참았다가 제 가슴 찔러

쏟아 낸 붉은 피

눈물일까

콧물일까.

-장원의의 <선인장> 전문

 

위 텍스트는 ‘선인장’이라는 객관적상관물을 통해 청상과부의 한을 그리고 있다. “청상”이 “쏟아낸 붉은 피”를 먹고 홍살문이 세워진다. “어떤 접근도 허용치 않는 독기 서린 표정”은 “세상”의 누군가를 “향한 항변”이다. 누군가는 조선유교의 잘못된 법도와 윤리다. 조선의 예법은 과부의 재가를 막고 “은장도를 가슴에 품”고 절개를 지킨 “청상”에게 홍살문을 내렸다. 홍살문은 가문의 영광이 되었다. “백년을 참았다가 제 가슴 찔러 쏟아 낸 붉은 피”는 다름 아닌 홍살문 같은 선인장의 꽃이다. 남에게는 존귀한 상징인 홍살문이 정작 청상에게는 “피”요, “눈물”이요, “콧물”이다. 선인장이 백년의 수절로 피워낸 꽃을 “붉은 피”로 변주한 시인의 상상력이 참신하다. 홍살문이 청상의 한을 녹일지는 ?이나 선인장이 피워낸 꽃은 백년을 기다린 선인장의 한 풀이로는 충분하리라.

 

생전에도

이렇다 저렇다 말이 없으셨던

 

막내 동생 파독 간호원으로 떠날 때 그때서야

공항 바람 속에서 우셨던 어머니

 

까슬까슬한 어머니 얼굴 부비며

나는 흐느낀다

 

내 통곡

어르고 만져주시던 거친 손

갈라터지던 마음 밭 감추시고

 

묻어두지만 마시고

말씀 하시지

 

철이 없던 딸들.

-엄영자의 <한 말씀> 전문

 

모성을 어찌 한 마디로 정의내릴 수 있을까? “갈라터지던 마음 밭 감추시고” 어머니는 당신의 흔적을 드러내지 않는다. “내 통곡/어르고 만져주시던 거친 손” 어머니는 당신의 안쪽으로 안쪽으로 말려서 당신 육신의 바닥이 메말라 더 이상 아무 것도 내줄 수 없을 때까지, 당신이 품은 사랑의 육즙을 자식에게 짜 먹이신다. 그러기에 ‘어머니’라는 세 음절만 들어도 팔딱거리던 심장이 느려지고 꼿꼿하던 눈동자가 풀리고 만장굴처럼 그 깊이를 알 수 없는 그리움에 유아시절에 각인된 젖내음을 킁킁거리게 된다. 그러므로 모성은 그 자체만으로 위대한 철학이요, 도덕이요, 종교가 되는 것이다. 어머니.......

“묻어두지만 마시고/말씀하시지”로 시인의 회한의 강은 한없이 출렁거려 “ 까슬까슬한 어머니 얼굴 부비며” 화자는 “흐느”끼다가 “철이 없던 딸들”이라는 시어로 불효의 한을 풀어가고 있다.

일어나려는 순간, 장애인은 고목처럼

앞으로 쓰러졌다

 

대지大地가 그를 치마폭에 꼬옥 안았다

마지막까지 손을 뒤로 뻗치며

생生의 증오와 삶의 저주가 각인 된

저, 무언의 절규 소리

 

‘우리도 인간人間이다!’

 

고통을 견디다

청동인간이 되어버린 장애인

오늘도 대지 품에서 *나마스테의 꿈을

꾸고 있는 것일까?

 

*나마스테: 존경과 건강, 사랑이 담긴 인사말(인도 티벳트 人의 인사말)

-조숙형의 <삶, 대지大地-광주문화예술회관조각공원에서(삶, 대지)조각상을 보며>

전문

 

화자는 대지에 안긴 장애인의 조각상을 보며 장애인의 한을 읽는다. “우리도 인간이다” “일어나려는 순간, 장애인은 고목처럼/앞으로 쓰러졌다”의 상황이 되면 누가 편견의 손가락질을 하기 전에 장애인 본인의 자존감이 흩어지고 만다. 순간 몰려오는 “생生의 증오와 삶의 저주가 각인”되고 화자에게는 장애인의 “무언의 절규 소리”가 들린다. “고통을 견디다/청동인간이 되어버린 장애인”에게 화자는 “나마스테”라고 위로의 인사말을 건넨다. 시인의 위로를 통해 장애인의 한이, 문득 그 단단한 줄기가 사르르 뭉그러지는 듯 하다. 청동조각상에 대한 깊은 사유를 통해 시인은 장애인에게 위로의 손을 내밀고 있다.

 

 

화장실 갈 때마다

다리 잘린 풍뎅이처럼 웅크린 몸을

버둥거리다 몇 바퀴 뱅뱅 돌면서

간신히 상체만 일으켜 앉는다.

엉덩이로 미끄럼을 타면서

문지방을 넘어 주방을 지나

고사목처럼 마른 엉덩이를

방석에 대고 삐꺽삐꺽

욕실 안으로 미끄러져와

돌멩이 같은 두 발을 내게 내민다

그때마다 나는 그녀의 분홍신이 되어주는 꿈을 꾸었다

-강명미의 <꿈꾸는 욕실화> 부분

 

활유를 통해 욕실화가 화자가 되었다. 아마도 그녀는 하반신마비환자인가보다. 하반신마비환자이니 설 수 없고 설 수없으니 욕실화를 신을 수도 없다. 걷지 못하니 퇴행된 발은 “돌멩이”처럼 굳고 말았다. 돌멩이처럼 굳은 발을 “욕실화”에 끼워보려는 그녀를 보며 화자는 치밀어 오르는 측은지심에 꿈을 꾼다. 어쩌면 발목이 잘리더라도 그녀를 끝없이 춤추게 할 수 있는 동화 속의 분홍신(안데르센의 빨간 구두)이 되어서라도 그녀의 한을 풀어주고 싶은 시인의 간절함이 돋보이는 텍스트다.

 

사람들로 꽉 찬 지하철에서 어떻게 자릴 잡고 이제 편히

가려고 눈 감았다 그런데 다음 역에서 내려야하는 정류장이 아닌가

겨우 한 정거장.

 

인생의 나그네 길이 결국 그러하다.

-김영철의 <지하철> 전문

 

화자는 만원 지하철에서 내내 서 있다가 겨울 자리를 잡고 편히 가려고 눈을 감는다. ‘딩동뎅’ 다음 역을 알리는 안내방송, 다음 역이 바로 화자의 목적지다. “겨우 한 정거장” 편했다. “인생의 나그네 길이 결국 그러하다.” 시인은 지하철에서 아포리즘적 교훈을 얻는다. 한을 표출하는 것이 아니라 한에 순응하는 해법이다.

 

일주일 삶을 위하여

아침의 정적을 깨고

푸른 나뭇가지에 앉아

세상을 향한 화두인 듯

온몸으로 울어댄다

-맹인섭의 <매미> 부분

 

시의 일차적 발화점이 매미의 울음이다. 그러나 발화 저변에는 “ 세상을 향한 화두”가 있다. “단 일주일 삶을 위하여” 참매미는 땅속에서 7년을 수행한다. 땅속에서의 삶은 빛나는 일주일을 위한 준비기간이다. 아무런 기쁨도 없이 오직 성충이 되기 위해 본능으로 몸피를 키운다. 드디어 날개를 얻고, 목소리를 얻어 울음이 아닌 노래를 하게 된 매미는, 칠 년의 묵언수행의 한이 마치 봉인이 풀린 것처럼 풀렸으리라. 그 작은 발음기로 여름을 쩡쩡 뒤흔들어대며 세레나데를 부른다. 언젠가 풀릴 한이라면 견뎌낼 만 하다고 “세상을 향‘해 ’화두”를 던지는 것이다.

 

조그맣게 굳어간 헝겊 인형이 되어

소꿉놀이 하듯 저녁상 차리는

빈처의 뒷모습

업어 주고픈 시간 한 자락.

-손우석의 <낫살이나 먹은 저녁> 부분

 

현진건의 소설 『빈처』처럼 시적화자는 자신과 어려운 시절을 함께 건너온 조강지처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만감이 교차한다. 한때는 사랑하는 아들딸들과 번성한 두레밥상을 차리며 왁자했을 가정. 이제 자녀들은 다 솔가해서 나가고 부부 양주만 덩그마니 남은 시간에 “소꿉놀이 하듯 저녁상 차리는” 빈처가 가슴 짠하게 다가온다. 조그만 헝겊인형처럼 왜소해지고 가벼워져 볼품없어진 아내지만 함께 두 손 잡고 걸어온 아린 시간들이 중첩되어 “업어 주고” 싶어진 화자. “조그맣게 굳어간 헝겊 인형”으로 끝났다면 연속되었을 한이 “업어 주고픈 시간 한 자락.”으로 슬며시 한의 끝자락을 내려놓는다. 어쩌면 정년 후의 우리 모두의 모습일 텐데 시인의 따뜻한 시선으로 몸내림 받은 위 텍스트는 저녁노을처럼 아름다운 노부부의 일상에 미소가 지어진다.

 

중병에 걸린 일상

산수유랑 매화꽃 한 아름 안고

봄이가 문병 왔었어

 

지난 해

모질게도 추웠던 재개발 선거

박박 긁힌 양심 위장한 술수에

 

...중략...

 

고래 등에 터진 새우 궁전

봄아

둥지 틀 곳 일러다오.

-이도연의 <게딱지의 비애> 부분

 

집게는 고둥껍데기를 집 삼아 집을 짊어지고 살아간다. 그것이 집게의 숙명이다. 짊어지고 다니는 고둥껍데기가 작아지면 좀더 큰 고둥껍데기로 이사해서 짊어지고 다닌다. 인간도 마찬가지다. 오막살이든 타워팰리스든 각각 형편에 따라 집을 짊어지고 살아야한다. 그리고 서민은 모기지론까지 끼어 한층 무거운 짐 같은 집이다. 안 긁어도 상처뿐인 서민은 “위장한 술수”에 넘어가 사방이 긁히고 만다. “일상‘은 ’중병”에 걸리고 “재개발선거‘는 ’모질게도” 춥다. 시적화자는 중병에 걸린 일상에서도 몸져눕지 않고 봄에게서 위로를 받고 봄에게 해법을 듣고자 한다. 한에 주저앉지 않고 희망을 찾고자하는 긍정의 힘을 발휘하는 텍스트다.

 

이꼴저꼴 보기 싫어 비행기를 타고 떠났습니다.

12시간을 달려 남쪽나라 뉴질랜드

...중략...

말 그대로 지상천국이었습니다

 

옛날옛적 이민을 왔던 교민들이 울고 있었습니다

죽은 사람 사라진 사람 살아남은 사람

아픈 사람을 위하여 대신 울어 주는 나라

미워도 미워도 소주맛이 그리워 돌아왔습니다

-이용수의 <대신 울어 주는 나라> 부분

 

화자는 “이꼴저꼴 보기 싫어 비행기를 타고 떠”난다. 부당한 공권력이든, 암울한 현실이든 마땅치 않아 멀리 떠난 화자는 지상천국으로 보이는 뉴질랜드에서 교민들의 슬픔을 본다. 외롭고 고단했을 교민들이 향수에 젖은 모습을 보며 “죽은 사람 사라진 사람 살아남은 사람/아픈 사람을 위하여 대신 울어 주는 나라”는 살 비비며 살아온 조국 밖에 없다는 것을 환기한다. 셀 수 없는 불합리가 판치는 대한민국일지라도 그래서 “미워도 미워도” 이웃과 친구들과 막소주 기울이며 성토할 수 있는, 누군가를 위해 흥분하고 울어주는 인정이 남아있는 조국이기에, 결국 “소주맛(조국)이 그리워 돌아”올 수밖에 없음을 화자는 고백하고 있다. 세월호참사에 온 국민이 애도한 것처럼, 우리에게 아직 희망이 남아있음을 그래서 한풀이의 해법을 찾아낼 수 있음을 암시하는 텍스트다.

꽃, 그리움이 아니라

희망이 아니라

형벌임을 알겠다

-임인숙의 <꽃의 알림장> 부분

 

찾아오겠다는 기별이나 기약이 있어야 기다림은 그리움이 되고 희망일 수 있다. 약속도 없는데, 올 사람도 없는데, 기다리는 누구 있어 무작정 기다린다는 것은 형벌이다. 꽃보다 더 예쁜 것 있으랴! 꽃보다 더 향기로운 것 있으랴! 그러나 아무리 예쁘고 향기롭다 하더라도 찾아오는 벌, 나비 없으면 꽃은 하염없이 기다리다 홀로 뭉그러지고 고실라져 버릴 수밖에 없다. 꽃은 벌, 나비를 만남으로써 한이 풀어지는 것이다.

 

자리 지켰던 순진하기만 한 수학여행 어린 학생들

끝내 피어보지 못한 채 죽음으로 내몰았고

중략

전 국민의 슬픈 가슴을 치료해보자

-전근표의 <이 땅에 진정 봄은 오는가-슬픈 기도> 부분

 

화자는 세월호참사의 원인을 추론하면서 어린 학생들의 죽음을 애도하고 다시는 이 땅에 그런 비극이 없기를 기도한다. “전 국민의 슬픈 가슴을 치료해”보고자 하는 화자의 강한 의지가 잘 드러나 있다. 한 편의 시가 전 국민을 위로할 수 있기를 한 사람의 시인으로서 무릎 꿇고 기원해본다.

 

한의 해법이란 말 그대로 한풀이다. 한의 원인을 없애거나 아리랑고개로 넘겨버려야 한다. 한이라는 놈을 가슴에 품고는 누구도 살 수가 없다. 한이라는 놈은 마치 못된 세균이나 바이러스처럼 악질이다. 우리 가슴에 들어오는 순간 가슴은 난도질당하고 만다. 그래서 한의 응어리를 풀어주어야 한다. 그것이 시인과 시의 역할일 터이다.

다산 정약용은 18년 동안 억울한 유배생활을 했다. 유배생활을 하는 동안 존경하는 형님이 죽고 네 살짜리 어린 자식과 사별했다. 그의 아리랑고개는 무엇이었을까? 한자가 생겨난 이래로 가장 많은 저술을 했다(정인보)는 다산은 아무래도 저술이 아리랑고개였을 것이다. 글을 읽고 쓰노라면 억울함도 답답함도 원망도 슬픔도 아리랑고개로 다 넘어가버렸을 것이다. 뭉친 응어리도 술술 풀려버렸을 것이다. 다산은 힘겹던 유배생활 중 아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국량(아량)이 큰 사람이 되기를 당부하면서 국량의 근본은 용서에 있다고 했다. 나이 마흔에 시작한 유배가 예순이 다 되어서야 풀렸는데 그의 마음에 용서가 없이 한만 쌓였다면 어떻게 그런 방대한 저술을 할 수 있었겠는가. 다산만 보더라도 한은 친친 감아 놓을 것이 아니라 어떤 방법으로든 풀어 없애야 마땅한 놈이다. 終