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 사람 집중조명-전숙시인
자기성찰과 현실인식 ; 변혁적 소양(素養)과 관련하여
백인덕
시인의 현실은 불가피하게 두 개의 층위로 구성된다. 아니 두 개의 충위가 겹쳐지고 밀어내고 허물이 벗겨지는 과정에서 순간적으로 형성된다. 그 마저도 이내 새벽이슬처럼 스러진다. 일종의 숙명성이다. 시인은 먼저 우리가 만나 눈빛을 교환하고 이야기를 나누고 이미지를 회상할 수 있는 물리적 실체로서의 존재다. 동시대인이라면 말이다. 그는 말 그대로 생생한 ‘현실(reality)' 속의 자연인이다. 이 시인은 여러 상황과 사태의 압력 아래서 사회문화적 존재로서 자기 정위를 위해 투쟁한다. 이 투쟁이 자아실현의 자양분이 되고, 나아가 미학적 진보의 원동력이 되기도 한다. 하지만 다른 하나의 시인, 즉 시라는 텍스트를 작성했을 것이라고 짐작되는 시인은 오직 ’현실성(actuality)‘을 드러낼 수 있을 뿐이다. 즉 우리가 아무리 생생하게 추체험하게 되더라도 재현된 사태와 상황들을 사실 그 자체로 되살려 낼 수 없다. 어쩌면 이 불가피한 괴리가 창작에 있어 소위 ’시간의 숙성 또는 담금질‘이라고 흔히 말하는 ’숨, 틈, 사이‘를 요구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전숙 시인은 예리한 현실인식을 바탕으로 시적 자기성찰의 한 단계 깊은 고민과 확장된 자장(磁場) 안에서의 분투를 보여준다. 경악과 분노로 가득한 이 시대를 건너가면서 목 안의 단말마를 어떻게 처리할지 지극한 시적 고뇌를 이번 작품들을 통해 던지고 되받고 있다.
대저 시인이란 무엇인가
창조주처럼 처음인가
달빛 같은 그윽한 동반자인가
별빛 같은 구경꾼인가
뻐꾸기 같은 무임승차족인가
밀폐시킨 암흑창고에 노동자를 몰아넣고
스티로폼도 녹여버리는 최루가스를
자선 베풀듯이 터뜨린 공권력에 공분하다가
뉴스가 시들해지면 분노도 시들해져버리는
부끄러움도 잊고 마는 나는 누구인가
-「자화상1」 부분
이 작품은 의미심장하게 제목이 ‘자화상1’이다. 자화상이란 말 그대로 스스로가 그리는 자기 초상인데, 우리는 감각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어쨌든 자기 자신을 볼 수 없다. 상상하는 것조차도 사실은 내가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하나의 ‘상(像)’을 그려보려면 반드시 ‘거울’이 필요하다. 물론 거울은 ‘타자’의 의미까지를 포괄한다. 시의 표면만 보자면, 이 거울은 가수 이효리가 된다. ‘노란봉투’에 동참한 그녀의 행동이 시인의 자의식을 반사하면서 시인은 오늘 자신의 얼굴을 민낯으로 되돌아보게 되는 것이다.
작품의 후반부는 반사되어 온 시선에 찔린 시인의 자의식이 겪게 되는 한 순간의 혼란과 대응이 드러난다. 그 내용은 두 개의 의문문이 뼈대를 형성한다. ‘시인이란 무엇인가’라는 정의(定義)의 문제와 ‘나는 누구인가’라는 정위(定位)의 문제가 핵심임을 알 수 있다.
시인은 먼저 “대저 시인이란 무엇인가”라고 묻는다. 이 질문은 ‘시’에 관한 해답 없는 수많은 질문의 연쇄 속의 한 결절이다. 시인이란 무엇인가는 시란 무엇인가와 같은 질문이고, 시란 무엇인가는 결국 시란 이 시대의 사회문화, 아니 미시적으로 한 개인의 삶에서 무엇이어야 하는가라는 질문과도 그 궤를 같이 한다. 사실 시인은 자문자답하고 있다. 이 자문자답이 전숙이라는 개인을 넘어 더 큰 질문의 동심원으로 퍼져나가게 된다는 것이 이 작품의 미덕이다.
역사적으로 시인은 예언자였고, 선구자였고., 혁명가였으며, 한낱 장식품이었다. 일반적으로 검증된 사실이지만, 시인은 ‘창조주’, ‘동반자’, ‘구경꾼’, ‘무임승차족’이 아니냐고 묻고 있다. 그러므로 다시 읽으면 ‘대저 시인이란 무엇인가’라는 의문은 사적인 정의를 묻는 것이 아니고, 우리 시대, 즉 동시대의 시인들이 자칭하는 시인의 정의, 혹은 역할에 대한 강한 의문이라고 볼 수 있다. 동어반복이지만 오늘의 시인들은 어쩌면 창조주, 동반자, 구경꾼, 무임승차족일 뿐이라는 강한 회의가 함축되어 있다.
전숙 시인은 이어 다음으로 ‘나는 누구인가’라고 묻는다. 사건을 기억하는 필자는 가급적 사건 자체에 대한 언급 없이 시를 읽고 싶다. 해고노동자들의 머리 위에 던진 47억이라는 것이 돈이 아니라 47억 번의 돌팔매라는 것을 알고 있다. 천민자본주의가 기어코 찾아낸 전가의 보도가 벌금과 손해배상과 각종 소송이라는 것도 알고 있다. 하지만 이 글을 그렇게 가파르게 밀어갈 순 업다. 독자들이 혜량하시리라 믿는다.
시 해석에 있어 ‘퍼소나(persona) 이론’은 이유 없이 배척당하거나 범주와 의미가 지나치게 축소, 적용되어 왔다. ‘시적 화자’, 즉 시에서 말하는 사람은 시적 자아일 수도 있고, 시적 주체일 수도 있고, 퍼소나일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의 발화자(함축적 시인을 포함하여) 전체를 퍼소나라고 통칭하면서 물리적 실체인 시인과 퍼소나의 관계를 도외시해 왔다.
전숙 시인은 “뉴스가 시들해지면 분노도 시들해져버리는/부끄러움도 잊고 마는 나는 누구인가”라고 묻고 있다. 작품에 등장하는 나는 ‘뉴스’의 충격 강도에 따라 반응하는 일상적 존재이다. 이런 태도는 사실 아무 문제도 발생시키지 않는다. 하지만 이 질문 ‘나는 누구인가’라는 묻는 이 텍스트 밖의 나는, 일상적 존재인 ‘나’에게 어떤 형질을 부여했고 그것이 지속되기를 바라는 진정한 ‘나’의 음성을 지닌다. 그가 묻는 것도 역시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인데, 이는 곧바로 ‘시인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으로 환원된다.
노란봉투를 처음으로 생각해낸 이름 모를 주부에게
‘시인’의 이름을 바친다
-「자화상1」 부분
이 한 연에 시인이 생각하는 ‘시인’의 정의와 나의 정위가 오롯이 드러난다. 직접적으로 말하자면 전숙 시인이 생각하는 ‘시인’은 진정한 의미에서의 ‘시민’이라 할 수 있다. 이 작품과 「변호인」, 「윤일병에게」 등의 작품만 놓고 이해할 때 그렇다는 것이다. 진정한 의미의 ‘시민’인 ‘시인’은 어떤 형상으로 맺혀지는가, 이는 좀 뒤에 다시 살펴 볼 것이다.
퍼소나, 즉 시적 인격은 ‘나’는 다양한 외부적 사태와 힘, 상황과 그 변화에 대해 자기정체성을 독립적으로 확보, 유지하려는 최소한의 장치라 할 수 있다. 시는 공감을 지향하되 직설적 감정이입을 통한 자기만족을 경계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필자는 안산에 거주하고 있다. 절규와 비명, 분노의 외침과 격정적 토로가 온전히 시가 되지 못한다는 사실이 괴로웠다. 그것은 오래 곱씹고, 되풀이 성찰해 변화를 이끌어내는 자기 원동력을 상실한 말 그대로 표피적 반응에 머물고 말았다. 무릇 시인이란 무릎 뼈 망가질 정도까지는 기다려야 하지 않는가, 생각이 다시 어두워진다.
축지법을 쓰듯이 하루에 한 나라씩을 건넌다
나라마다 핏줄 같은 강이 흐르고 있다
강의 깊이는 그 강을 마시는 명줄들의 가슴의 깊이다
깊은 강은 제 깊이만한 명줄을 받아들이고
얕은 강은 제 몸도 허우적거린다
강이 키우는 것은 목숨만이 아니다
강은 네로와 나폴레옹과
다빈치와 미켈란젤로와 메디치를 낳았다
바람의 방향에 따라 같은 강에서도
폭군도 종교도 예술도 태어난다
어떤 강은 통곡소리가 범람하고
어떤 강은 천년의 암흑을 깨운다
전설과 신화는 마천루처럼 쌓이고
악한 것은 더 악해지고 선한 것은 더 선해진다
아직도 생목숨 같은 강에는 숭고하거나 치욕이거나 분노가 흐른다
-「강에는 인문학코드가 흐른다 - 서유럽의 강을 건너다」 부분
문득, 시인은 서유럽으로 혹은 서유럽 여행의 추억으로 눈을 돌린다. 그런데 이 작품에는 역시 의미심장하게도 ‘인문학코드’라는 작금의 핫한 키워드가 보인다. 이 하나로도 이 작품이 단순한 추억담이거나 기분전환을 위한 배치가 아니라는 점이 드러난다.
지도를 펼쳐놓고 보면 서유럽의 강들은 대개 남북으로 흐른다. 한강처럼 큰 강은 없지만 그 강들은 동서로 경계를 가르고 아리안과 슬라브를, 선진과 후진을 가르고, 구교와 신교를 가르고, 심지어는 상징주의와 표현주의를 가른다. 하지만 시인이 여기서 깨닫게 된 것은 “맑은 바람이 바스티유를 흔들던 그날처럼 /악에 오염되었던 강은 검은빛에 다시 물들지 않는다/오늘의 상심에도 두만강이 주저앉지 않고 흘러가는 이유다/자유가 흐르는 강에서는 풀꽃들의 피냄새가 난다.”는 것이다.
시인은 ‘네로와 나폴레옹’, ‘다빈치와 미켈란젤로와 메디치’를 낳은 강을 축지법 쓰듯 숨 가쁘게 둘러보았지만. 시선은 결국 ‘오늘의 상심’에 사로잡혀 있는 ‘두만강’에 가 닿아 있었던 것이다. 거기 풀꽃들의 피 냄새 속에서 어떤 미래를 예감하는 것이다. ‘예언’이 아니라 ‘예감’하는 것이 ‘시민’인 ‘시인’의 참다운 자세일지도 모른다. “정의의 저울로 재면 가장 가벼운 것은 눈물과 한숨이고/가장 무거운 것은 오리발과 건망증이다”(「변호인」 )인 이상한 정의의 사회에서, 또는 “칼을 주지 않고/방패를 주지 않고/‘착하게 착하게 살아라’고 주먹으로 윽박지른/도덕교과서가 다시 회생하겠니?”(「윤일병에게」)라고 되묻을 수밖에 없는 현실에서 시인은 진동하는 ‘풀꽃들의 피 냄새’를 맡을 수밖에 없는 숙명에 치를 떤다. 어쩌면 시인은 “자유가 흐르는 강에서는 풀꽃들의 피냄새가 난다”는 사실을 일반명제로 기술하기 위하여, 아니 한 구절의 시로 만들기 위해 감내해야 하는 현실이 고통스럽고, 더 치욕스러울지도 모른다.
전숙 시인은 ‘나는 누구인가’라는 물음, 존재론적이 아닌 시적 질문을 통해, 오늘 최소한 대한민국 이 땅에서 쓰여 진 시와 그것을 생산하는 시인들에 대한 본래적 질문을 상기한다. 그러나 그 질문의 방식은 시의 바깥에서, 시를 너머서서 힐난하거나 조롱하는 것이 아니라, 시 본연의 심연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두렵고 무모한 시도이기에 더 무겁고 두렵게 들린다.
모든 상처에서는 꽃이 핀다
유년의 상처에 꽃이 피어있다
무르팍을 으깬 돌멩이가 꽃잎으로 박혀있다
꽃잎을 누르면 검색창이 열리듯 상처의 기억이 열린다
밥 대신 누런 코를 들이마시던 아이의
허물어진 담벼락 같은 가난도 망초꽃으로 피어있다
고래가 죽을 때 핀다는 ‘붉은 장미’에는 가시가 없다
상처는 가시를 버리고 꽃의 길을 택했다
마지막 호흡에서 피어나는 붉디붉은 상처의 꽃
‘신은 살아있다’고
아우슈비츠 수용소 벽에 손톱으로 새긴
아리디 아린 상처의 꽃
상처가 꽃처럼 아름다운 것은 스스로 기억한
암각화이기 때문이다
결코 잊지 말라고
상처가 오체투지로 새긴
눈물의 전언이 꽃으로 피어난다
밟히고 밟힌 풀꽃의 눈망울을 들여다보라
매듭 매듭 저린 아픔과 상처의 기억이
다시는 밟히지 말라고
눈부처로 피어 있다.
-「모든 상처에는 꽃이 핀다」 전문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전숙 시인은 결코 상처 자체에 집중하지 않는다. 상처란 이미 일어난 행위와 사태들의 결과일 뿐이다. 시인은 “상처가 꽃처럼 아름다운 것은 스스로 기억한/암각화이기 때문이다”고 선언한다. 우리는 상처의 도정이 다다르게 될 결말을 알지 못한다. 다만, 상처가 생겨난 원인에 대한 이해는 충분히 가능하다. 시인은 어느 쪽에 시선을 두는 자 이어야 하는가?
이번 집중조명의 작품들을 접하고. 대뜸 브레히트의 「서정시를 쓰기 힘든 시대」가 떠올랐다.
꽃피는 사과나무에 대한 감동과
엉터리 화가에 대한 경악이
나의 가슴 속에서 다투고 있다.
그러나 바로 두 번째 것이
나로 하여금 시를 쓰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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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호인*
전숙
극장문을 밀치고 쏟아져 나오는 침묵들
가슴속에는 정의의 불씨 한 톨씩 품고 있다
어느 힘없는 풀꽃도 어느 가난한 바람도
억울하지 않는 것이 정의라고?
극장계단을 다 내려가기도 전에 스러질
빈말이 유월 버들가지처럼 치렁치렁 햇살에 빛나고 있다
제 목숨도 변호하지 못하는 뼈 없는 혀로
풍장된 주검에 열광하는 스마트폰이 진동음으로 운다
다시 살처분이 시작되었다는 SNS
고병원성조류독감으로 판결 받은
오리들은 변호인도 구하지 못하고 다시 매몰되기 시작했다
정의의 여신은 구리에 내려앉은 인류의 푸른 추억이다
정의의 칼이 벨 수 있는 건 숙취에 목마른 자리끼 한 모금
정의의 저울로 재면 가장 가벼운 것은 눈물과 한숨이고
가장 무거운 것은 오리발과 건망증이다
정의는 크레인의 높이에 매달려 오금이 저리고
어여쁜 여신은 눈을 가리고 허기진 평등을 고수레 중이다
숲은 기진맥진한 연어를 잡아먹고 태양은 숲을 호령한다
달빛의 눈물은 투명체이므로 시인에게만 보인다
머리가 광속으로 회전하면 기억은 지워진다
생각나지 않습니다
생각나지 않는 증언만 유효하다
건망증이 나라를 구한다.
*변호인: ‘부림사건’을 모티브로 만든 송강호주연의 영화
조작된 ‘부림사건’은 33년만에 무죄판결을 받았다.
윤일병에게
전숙
아들아, 아침을 차리다가 네 소식을 들었다
숟가락을 놓다가 말고 하염없다가
다시 삶을 든다
네가 개처럼 핥아먹었다는 누군가의 가래침처럼
끈적한 액체가 숨구멍을 덮는다
발길질에 반듯한 무릎이 무너지고
욕설에 꿈의 새하얀 날개가 꺾이고
주먹질에 생의 포실한 지붕이 내려앉은
수치와 공포로 뭉친 주먹밥을 꾸역꾸역 넘긴다
삶이란 강이구나
흙탕물도 오물도 어떤 눈물도
다 받아먹어야하는 서러운 강이구나
인간을 지탱하는 뼈라는 뼈는 모두 부러진 너도
레고블록처럼 끼워 맞춘 개가 되어서도 무참히 흘렀구나
심장이 터지고 비장이 찢겨 핏물로 염색된 천사의 백의
네 하늘에 떠있던 새하얀 날개는 어느새 의자가 비었는데
주먹을 파르르 쥐고
숨넘어갈 비명을 지르고
십자가를 세운들
칼을 주지 않고
방패를 주지 않고
‘착하게 착하게 살아라’고 주먹으로 윽박지른
도덕교과서가 다시 회생하겠니?
자화상1
전숙
가수 이효리가 47000원이 든 노란봉투로
쌍용차해직자들의 손해배상금 47억원을 나누었다는 방송을 듣고
나도 보내야지 하다가 며칠 지내며 까맣게 까먹다가
1차 목표액에 도달했다는 추가방송을 듣고
부랴부랴 2차모금액을 보낸다
최초로 노란봉투운동을 시작했다는 주부는
아이의 학원비를 줄였다는데
작은 풀꽃의 향기를 알아챈 이효리는
찔레덤불처럼 무성한 향기를 품었을진대
시인의 이름표를 단 나는
허공에 잔 먼지만 일다가 주저앉아버린
의미 없는 파동일 뿐이다
대저 시인이란 무엇인가
창조주처럼 처음인가
달빛 같은 그윽한 동반자인가
별빛 같은 구경꾼인가
뻐꾸기 같은 무임승차족인가
밀폐시킨 암흑창고에 노동자를 몰아넣고
스티로폼도 녹여버리는 최루가스를
자선 베풀듯이 터뜨린 공권력에 공분하다가
뉴스가 시들해지면 분노도 시들해져버리는
부끄러움도 잊고 마는 나는 누구인가
노란봉투를 처음으로 생각해낸 이름 모를 주부에게
‘시인’의 이름을 바친다
시인은 눈물의 눈물을 닦아주는 눈물이다.
상처에서 꽃이 핀다
전숙
모든 상처에서는 꽃이 핀다
유년의 상처에 꽃이 피어있다
무르팍을 으깬 돌멩이가 꽃잎으로 박혀있다
꽃잎을 누르면 검색창이 열리듯 상처의 기억이 열린다
밥 대신 누런 코를 들이마시던 아이의
허물어진 담벼락 같은 가난도 망초꽃으로 피어있다
고래가 죽을 때 핀다는 ‘붉은 장미’에는 가시가 없다
상처는 가시를 버리고 꽃의 길을 택했다
마지막 호흡에서 피어나는 붉디붉은 상처의 꽃
‘신은 살아있다’고
아우슈비츠 수용소 벽에 손톱으로 새긴
아리디 아린 상처의 꽃
상처가 꽃처럼 아름다운 것은 스스로 기억한
암각화이기 때문이다
결코 잊지 말라고
상처가 오체투지로 새긴
눈물의 전언이 꽃으로 피어난다
밟히고 밟힌 풀꽃의 눈망울을 들여다보라
매듭 매듭 저린 아픔과 상처의 기억이
다시는 밟히지 말라고
눈부처로 피어 있다.
강에는 인문학코드가 흐른다
-서유럽의 강을 건너다
전숙
축지법을 쓰듯이 하루에 한 나라씩을 건넌다
나라마다 핏줄 같은 강이 흐르고 있다
강의 깊이는 그 강을 마시는 명줄들의 가슴의 깊이다
깊은 강은 제 깊이만한 명줄을 받아들이고
얕은 강은 제 몸도 허우적거린다
강이 키우는 것은 목숨만이 아니다
강은 네로와 나폴레옹과
다빈치와 미켈란젤로와 메디치를 낳았다
바람의 방향에 따라 같은 강에서도
폭군도 종교도 예술도 태어난다
어떤 강은 통곡소리가 범람하고
어떤 강은 천년의 암흑을 깨운다
전설과 신화는 마천루처럼 쌓이고
악한 것은 더 악해지고 선한 것은 더 선해진다
아직도 생목숨 같은 강에는 숭고하거나 치욕이거나 분노가 흐른다
다 잊혔으리라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리라
초승달처럼 캄캄하게 강물을 속여보지만
보이지 않아도 진실은 보름달처럼 이미
검은빛 또는 푸른빛의 발자국을 강물에 선명하게 찍어두었다
맑은 바람이 바스티유를 흔들던 그날처럼
악에 오염되었던 강은 검은빛에 다시 물들지 않는다
오늘의 상심에도 두만강이 주저앉지 않고 흘러가는 이유다
자유가 흐르는 강에서는 풀꽃들의 피냄새가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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