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간평 -대한문학 2013년 가을호-시
지푸라기, 그 빛의 시학
전숙(시인)ss8297@hanmail.net
‘숨비소리’는 잠수하던 해녀가 바다 위에 떠올라 물속에서 참고 있던 숨을 휘파람을 불듯이 길게 내쉬는 소리다. 해녀들은 바닷속에서 한 개의 전복이라도 더 찾아내기 위해서 죽을 만큼의 고통으로 숨을 참아낸다. 그녀들의 물질은 전쟁처럼 매번 목숨을 거는 일이다. 구십이 넘도록 물질을 한 해녀를 본 적이 있다. 생사를 가르는 물질을 그녀로 하여금 그토록 오래 견딜 수 있게 한 힘의 원천은 무엇일까? 그것은 매 잠수마다 겪는 지옥의 고통이 언젠가는 복으로 되돌아오리라는 희망이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해녀들은 숨비소리로 자신들의 희망인 이어도를 부른다. 이어도는 제주도 사람들에게는 물에 빠진 사람의 ‘지푸라기’고,‘피안’이고, ‘별’이고, ‘달’이고, ‘해’다. 이어도가 있기에 제주도 사람들은 육지 사람들의 핍박과 척박한 자연환경을 이겨낼 수 있었다.
노신은 그의 산문집 「아침꽃을 저녁에 줍다」에서 “존재가 있으면 희망이 있다.”고 한다. 전제와 독재의 어두운 시절에도 사람(존재)은 목숨을 담보한 꽃 피는 저항으로 희망을 이야기 했다. 폭력이 정의인 시대에 믿을 것은 붉은 피뿐이었다. 젊은이들의 피는 지푸라기보다도 더 힘없이 스러져갔다. 그런데도 노신은 절망하지 않고 지푸라기 잡는 심정으로 저녁을 기다렸다. 불꽃처럼 산화한 아침꽃을 줍기 위해.
“물에 빠지면 지푸라기라도 잡는다.”는 우리 속담이 있다. 간난신고에 빠지면 아무리 작은 것에라도 의지하려는 인간의 약한 심성을 말하는 속담이다. 그러나 그 말 속에는 지푸라기처럼 아무 힘없는 미물일지라도 누군가에게는 그것이 희망이 될 수도 있다는 또 다른 표현일 것이다.
단지 몇 행과 몇 연으로 이루어진 ‘시’일지라도 물에 빠진 사람의 지푸라기처럼 희망의 불씨가 될 수도 있다.
「대한문학」 2013년 가을호에 상재된 시편들을 보면 시인들은 지푸라기로 호명될 수 있는 비록 실낱같아 보이지만 누군가의 삶의 등불이 될 희망을 노래하고 있다.
길을 잃고 어둠 장막 헤매일 때 있었네
그때 희망은 구원의 불빛이었네
가야할 방향 아득히 비추어주는
삶의 벼랑길에서 추락했을 때
희망은 날 부축해주는 지팡이였네
밑바닥에 주저앉은 손목 잡아 세우는
-전석홍의 <희망의 불빛> 부분
희망은 삶의 벼랑길에 추락한 시적 화자를 부축해주는 지팡이다. 아우슈비츠수용소의 허름한 벽에 손톱으로 긁힌 듯한 선이 있었다. 자세히 읽어보니 “신은 살아있다.” 라고 씌어 있었다. 그것을 본 사람들마다 느낌이 달랐을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은 그러한 극한의 절망에서 어떻게 그런 글귀를 새겼는지 납득이 안 되었으리라. 감금된 포로는 지옥의 불구덩이 속에서 희망을 보았다. 그리고 그것은 지푸라기 같은 신앙의 힘이었을 것이다.
이제 그들을 위해 뭘 할 수 있나
자반뒤집기도 할 수 없는 몸으로
여행을 가고 싶어도 혼자만 두고 갈 수 없고
흉물 때문에 손님을 집으로 초대할 수도 없다고
식솔들에게서도 눈 밖에 난 존재
그래서 해충이라던, 그 벌레의
장례가 쓰레기장 치우듯 깨끗이 치러지고 나서
내다 버린 날에 칠면조 훈제는 입맛을 돋우고
누구의 가슴에도 슬픔 떨어지는 눈물은 없다
오히려 희망의 눈빛 활활하다
박종은의 <카프카의 변신> 부분
참으로 섬뜩한 희망이다. 중풍이나 어쩌면 치매환자일 “자반뒤집기도 할 수 없는 몸으로” 자리보존하고 있는 가장의 장례가 “쓰레기장 치우듯 깨끗이 치러지고” 남겨진 “누구의 가슴에도 눈물대신 희망의 눈빛 활활”할 뿐이다. 이것은 ‘반 지푸라기’로써 가족붕괴를 경고하는 시적화자의 어법이다. 독자들은 활활한 희망의 눈빛에서 분노를 느낀다. 자만과 이기의 시대에 젊음을 바쳐서 가족을 부양한 가장은 ‘흉물’이 되고 ‘벌레’가 되고 급기야 ‘해충’이 되고 말았다. 쓰레기장 치우듯 시신을 내다버린 날에 칠면조 훈제는 입맛을 돋우고 슬픔도 눈물도 없는, 아니 오히려 희망의 눈빛 활활한 ‘막장’의 가정을 사실 그대로 묘사함으로써 읽는 이의 가슴을 서늘하게 한다. 자신을 돌아보고, 가정을 돌아보고 부모에게 불효하고 있다면 뜨끔할 것이다. 독자의 양심을 일깨우고 싶은 시적화자의 희망이 심지를 돋우고 있는 텍스트다.
남편 삭이고
자식 삭이고
세월마저 삭히다 보면
푹푹 곰삭아
묵은지 맛 내게 될 테지
가끔 속이 더부룩할 땐
마른 침이라도 곱삭혀
되새김질 하다보면
주부맛 그런 거라고
주름진 거울 날 보고 빙긋 웃어주겠지
-신표균의<주부맛> 부분-
우리에겐 삭일 것이 너무 많다. 삭이지 않으면 그 날카로움에, 그 날것의 독성에 찔리고 중독될 수밖에 없다. 가부장적인 남편, 주고 싶은 도둑이라는 자식, 점점 낡아지고 퇴색되어가는 젊음을 가슴이라는 길고 긴 터널에 저장해 삭히다보면 어느새 곰삭아 몸에 좋은 유산균이 넘치는 묵은지 맛을 내게 될 것이다. 그런 세월을 되새김질 하다 보면 주름진 미래의 내가 주부맛 그런 거라고 빙긋 웃어주리라며 시적화자는 스스로를 위로하고 있다.
내 안의 나를 찾아
걷고 또 걷는다
진눈개비가 원하면
99년을 지켜온 나뭇가지도
한 짝 주어 버리고
폭풍우가 흔들어 대면
광란의 춤을 추듯이
흔들려 주기도 한다
-유후남의 <소나무> 부분
시적 화자는 ‘이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누님’처럼 달관의 경지에 있다. 나를 고집하지 않고, 나를 지우고 타자의 뜻대로 흔들려주겠다는 것이다. 원하면 사지육신이라도 절단해주겠다는 것이다. 염화시중의 미소처럼 우주의 질서를 다 알아들었다는 듯 자신에게 내재해 있는 부처를 찾아 끝없는 구도의 길을 걸어가는 시적화자의 정신이 잘 드러나 있다.
쌀 한 줌 덜 넣고 체중 줄여도
바닥을 치는 살림이
허리띠 한 구멍씩 조이더니
급기야 목숨까지 구걸한다.
무엇을 붙잡아야
무엇에 기대야
허물어진 자존심이 심지 세워
불꽃을 당길까.
-이길옥의 <불안의 안쪽> 부분-
좀들이 쌀 단지가 생각나는 텍스트다. 우리 어머니들은 아무리 가난해도 부뚜막에 작은 단지를 올려놓고 끼니때마다 쌀 한 줌씩을 덜어내어 단지를 채웠다. 가득 찬 쌀단지는 제수용이나 생일떡 아니면 가난한 이웃에게로 돌아갔다. “쌀 한 줌 덜 넣고”의 구절에서 좀들이쌀을 덜어내는 어머니가 생각난다. 가슴이 먹먹해진다. 살림살이 나아지기를 희망해보는 독자의 기대와는 반대로 가난은 시적화자의 자존심까지 허물고 있다. 급기야 목숨까지 구걸한다. 그런 악전고투의 상황에서도 시적화자는 무언가 붙잡을 것이 나타나거나 기댈 무엇인가가 내민 손을 잡고 싶다. 허물어진 자존심의 심지를 세워 희망의 불꽃을 당기기를 소망하고 있다. 이제 누군가의 좀들이쌀이 손을 내밀 차례다.
사람이 길을 열고
사람이 문을 닫는 날
사람은 다시 돌아본다.
내일은 오늘을 발판으로
가는 여정
다시 여는 날 문을 열었다
너에게로 가는
나에게로 오는 길이다
-이남로의 <다시 문을 세우며>부분 -
숭례문이 불에 타던 날은 사람이 문을 닫는 날이었다. 온 국민의 염원대로 숭례문은 복원되었고 다시 문을 열었다. 사람이 길을 열고 사람이 다시 문을 열었다. 나는 너에게로 너는 나에게로 가고 오는 희망의 문이 열린 것이다.
보지 않아도
듣지 않아도
만나지 않아도
보고 듣고 만날 수 있는 날들을 위하여
누구나 모래밭 백지에는
누구나 시간여행기를 쓰고 싶었으리라
-이동희의 <무단여행> 부분-
보지 않아도/보고, 듣지 않아도/듣고, 만나지 않아도/만날, 그 날은 바로 희망의 날이다. 백지는 무한한 가능성을 시사한다. 그리고 그 백지에 씌어질 시간여행기는 시적화자의 바람으로 채워질 것이다.
가을이
해바라기를 하고 있다
햇볕이 사정없이 내리꽂아
살갗이 벌겋게 익어도
모자도 쓰지 않고 손사래도 없다
초록 잎 물오른 날
다 태워버린 육신이
새바람에도
흔들거리며
지팡이에 의지한 채
걸어가고 있다
초록물이
별 같은 눈망울에
콕 박혔다
-정민주의 <노인> 부분-
온몸의 감각이 죽어가는 계절인 노인은 햇볕도 이제 더 이상 기피하지 않는다. 살갗이 익어도 가릴 생각도 밀쳐낼 기운도 없다. 젊음을 다 태워버린 줄 알았던 흔들거리는 육신의 눈망울에 초록물이 별처럼 콕 박힌다. 희망은 태워버릴 수도 없고 태운다고 타지도 않는다. 눈망울에 박힌 초록물은 은근하게 온몸으로 스며들 것이다.
환승역엔 언제나 불이 켜져 있다
흔들림 없이 가고 또 가야 하는
눈부신 그 곳
순간순간
내 몸 속 숨어 있는
불씨 꺼내어 어둠 밝혀 길 떠나야
너를 만날 수 있다
-정여울의 <다음 역은 왕십리 환승역입니다> 부분 -
환승역에는 언제나 희망이라는 불이 켜져 있다. 그리고 희망은 내 몸 안에도 내 몸 밖에도 있다. 내 몸 밖에 있는 희망을 찾아
“흔들림 없이 가고 또 가야 하는/눈부신 그 곳”에 가기 위해서 내 몸 속에 숨어 있는 희망의 불씨를 꺼내어 길을 밝혀야 몸 밖의 도 다른 희망, 너를 만날 수 있는 것이다.
위층 마룻바닥은
고운 소리가 나는 타악기
연주자는 예쁜 이웃집 아기
곡명은 발자국 소리
내 귀는 관람객
그 연주 들을 때마다
보드라운 그 소리 만지고 싶다
-조원기의<아기 발자국> 부분-
층간 소음으로 살인까지 서슴지 않는 세상이다. 그런 세상에서 시적화자는 객관적상관물인 아기의 발자국소리를 고운 연주로 변주하고 있다. 걸음마를 시작한 아기는 2,000번을 넘어져야 걷는 법을 배운다고 한다. 시적화자는 자녀나 손자들이 걸음마를 하는 것을 보았으리라. 넘어지고 엎어지고 엉덩방아를 찧어도 다시 일어나서 비틀비틀, 쭈뼜쭈뼜, 아슬아슬 걷고 또 걷는 것을 보면서 삶의 경이에 눈떴으리라. 그 땀방울의 수를 헤아린 화자에게 발자국소음이 연주소리로 들리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이리라. ‘아는 만큼 보인다.’는 여행가의 격언처럼 인생도 경험한 만큼 보이는 것이다.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다. 얼마든지 마음먹기에 달려있다. 듣는 사람의 마음에 따라서 똑 같은 발자국소리도 소음일 수도 고운 연주일 수도 있음이다. 이 텍스트에서 시적화자는 소음을 ‘고운’ ‘보드라움’으로 환기하고 그 소리를 만지고 싶어진다. 그래서 시가 필요하다. 시인의 아름다운 영혼이 필요하다. 시에서는 아무리 아픈 시간도, 상처도, 꽃이 되고 노래가 된다. 시를 쓰지 않더라도 시인의 영혼이 필요한 시대다. 시가 희망이고 웃음이고 빛인 이유다.
비바람에 가슴 시리지 않은
풀잎이 있으랴
아파하는 삶에
눈물 흘리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으랴
괴로운 세월만큼
풀잎은 자라서 작은 숲이 되고
또다시 쓰러지지 않는 풀잎으로
바람 잦은 언덕을 지킨다
-조주현의 <메마른 풀잎 가슴 되어버린 당신> 부분-
시적화자는 아무리 가슴 시리고 눈물을 흘려도 ‘작은 숲’이 되리라는 희망이 있기에 괴로운 세월을 견뎌낼 수 있는 것이다. 비바람과 아픔을 건너야 또다시 쓰러지지 않는 단단한 풀잎이 되어 바람 잦은 언덕을 지켜낼 수 있음이다.
이른 아침 잠깨어
길을 걷는데
꽃잎 지는 저 소리
맘에 어리어
울고 싶은 오늘은
피고 싶어라.
-조종래의 <꽃 지는 아침> 부분-
시적화자는 이른 아침에 산보하다가 꽃잎 지는 것을 보고 마음이 안타까워 그 소리가 마음에 어리고 만다. 시인의 경험은 그의 영혼에서 더욱 깊어지고 넓어져서 사유를 넘어 염원이 된다. 지는 꽃을 보며 울고 싶은 마음은 어느새 꽃이 다시 피어나기를 기도하고 있다.
경로당 사람들 마음은
하늘이다, 바다다
정치도 경제도 알 바 없는 그들
얼굴마다 넘치는 미소
오가는 농담 속에 정이 쌓이는 곳
허리띠 졸라매고
아득한 보릿고개 함께 넘으며
허기 참아왔던 그들
이제 옹이진 손마디 주무르며
여생을 즐기는 휴식의 공간
-편세환의 <경로당에서> 부분-
시적화자의 눈에는 경로당이 희망이고 행복의 공간이다. 아프고 비루하고 허기진 세월을 함께 건너온 그들은 이미 혈연을 넘어선 피붙이나 다름없다. 서로의 옹이진 손마디 주물러주며 떡 한 조각 사탕 한 알도 나누어먹으며 한숨과 웃음을 공유한다. 서로를 바라보고 서로를 품으며 서로를 위로한다. 그래서 그들의 마음은 이미 하늘이고 바다다. 정치나 경제 같은 계산적이고 이기적인 고단수는 알지 못해도 경로당 한 공간에서 일어나는 농담이나 미소나 눈물은 모두 애틋한 정으로 다 알아듣는다. 공감과 동거가 여생의 희망인 것이다.
빛의 화가 고호는 모진 현실 속에서도 빛을 잃지 않았다. 척박한 화폭에도 어디선가 한 줄기 빛이 비치고 있다. 또한 고호의 그림엔 곡조가 있다. 그의 그림을 이윽히 들여다보노라면 이야기 같은, 시 같은 노래가 들려온다. 그리고 그림들은 노래에 맞추어 어깨나 발장단을 맞추고 있다. 요즘의 3D화면을 보고 있는 듯 착각을 일으킨다. 이런 고호의 그림은 극한 상황에서도 그가 절망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발작과 정신분열의 절망 속에서도 빛을 찾아내고 가락에 맞추어 흥얼거리는 그의 영혼이 보인다. 가난이 가장 절친한 친구인 가운데서도 그는 삶의 의미와 눈물의 진정성을 알았다. 고호가 성직자에서 화가로 돌아선 계기는 그의 사명이 ‘말’이 아니라 그림으로 표현하는 ‘이미지’에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는 인물이나 풍경의 겉모습을 그리지 않고 물상의 내면을 표현하고자 했다. 그의 그림이 시공간을 뛰어넘어 우리에게 희망을 주는 것은 절망의 내면에 존재하는 지푸라기 같은 희망의 빛을 포착해내는 그의 정신력 때문이다. 그리고 그 빛을, 심혈을 기울여 아름답게 표현해낸 그의 열정 때문이다. 장미를 선물하면 장미향이 손바닥에 남는다고 한다. 희망을 선물한 시인의 영혼에는 희망의 향기가 남아있을 것이다. 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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