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성 위에 꽃 피어난 울림과 파장
- 전숙論
김 종/시인
한 사람의 시인에게 자신의 작품에서 개성을 평가받는 일만큼 영광된 일도 드물 것이다. 문학이 개성의 산물이고 승부처라는 사실이 더 이상의 설명을 불요하게 한다. 문학에서 개성은 창작한 시인만의 고유성이다. 본디 타고 났거나 후천적으로 길러진 시인의 체질이며 작품 속에 담아낸 차별화된 가치성이다. 문학작품을 평가하는 일이란 항상 그 시인의 개성을 어찌 끌어낼까로 고민하는 것이 평자들의 공통된 고민이다. 이 같은 개성을 어찌 추출해낼 것인가. 딱히 생각되는 것이 미세한 부분으로 전체를 열어가는‘기미에서 전체’라는 확산성의 방법이 효과적이겠다. 말인즉 태평양의 물맛을 알아보기 위해 그 바닷물 전부를 마셔볼 필요는 없는 것이다. 손가락 끝으로 조금 찍어 맛보고도 짜다 싱겁다 맵다 등의 표현으로 나아간다. 시인의 작품 속에 내재한 개성 또한 마찬가지이다.
시인 전숙에게서 찾아낸 관세음보살의 이미지
전숙(全淑,1955-) 시인의 작품을 읽으면서‘기미에서 전체’의 논법이 그의 문학을 재는 쓸만한 방법이라 여겨진다. 이의 연장선상에서 ‘글은 곧 사람’이라는 부폰의 생각이나 레온 에델이 말한 ‘그 나무에 그 열매’ 또한 전숙 문학의 표정을 재는 요긴한 방법으로 쓰일 터이다. 그만큼 그의 문학은 작가의 인간적 면모에 가깝게 이어져 있다. 부폰에 기대보면 문학은 개성의 산물이라는 의미일 것이다. 레온 에델 또한 인간과 문학을 일치시킨 셈이다. ‘전숙’이라는 나무에서 ‘전숙’이라는 시의 열매를 수확하는 것은 정한 이치이며 어쩌면 그의 문학을 가름하는 보다 적절한 논의가 될지 도 모른다.
전숙이라는 나무에서 전숙이라는 시의 열매라! 작은 물줄기에서 시작한 그의 언어적 흐름이 폭과 깊이와 길이를 더하면서 이미 상당한 수량의 강물에 이르렀다. 이제 더욱 우거져서 요량한 문학의 대처를 향해 여러 굽이의 샛강을 보태면서 유장한 물길이 될 것을 기대하면서 시인의 평을 열어본다.
전숙 시인을 처음 만났을 때 인상이 낯설지 않았다. “우리 만난 적 있던가요?” “대한민국 표준형인 둥글넙적벙벙형이라 그런 말 곧잘 들어요.”한다. “둥글넙적 벙벙형이라?”나는 자신을 표현한 전시인의 말을 듣고 내심 그 말을 곱씹어 봤다. 아하, 그랬구나. 어디선가 본 듯한 얼굴 생김새, 그의 문학에서 읽었던 우리들의 어머니 상 내지는 관세음보살의 이미지가 아닌가. 시인의 첫인상은 그의 문학과 함께 그렇게 다가왔다. 후덕한 미소를 담은 얼굴에서 따뜻함을 읽어내는 것, 어쩌면 전숙 시인과 문학을 스케치한 가장 마땅한 표현일 듯 하다. 그래서일까. 시인이 지금껏 보여준 시적 표정이랄까, 기질이랄까를 부연하자면 사물의 내면에 스민 모성을 끌어내어 그것들을 언어화시키고 있다.
전숙 시인이 시단에 소개되기는 어림잡아 5,6년쯤. 그러나 시인 자신이 본격 등단으로 꼽은 것은 2007년의 『시와 사람』신인상 수상 때부터다. 창작 연조로는 불과 3,4년의 세월인데 그가 보여준 성과는 괄목할만하다. 첫 시집 『나이든 호미』(2009) 이후 문단에서 그의 시적 장도(壯途)를 지지하는 평가가 신문기사문, 월평이나 서평 등에서 줄줄이 사탕으로 이어졌다.
모르는 것을 아는 척 하는 허황한 포즈도 없으며, 뜸이 덜든 밥알의 거친 숨소리도 없다. 시인은 차분하고 진지한 사색을 통해 사소한 것들에게서 생의 미묘한 기미를 문득문득 발견해낸다.
-안도현(시인)
모든 시는 결국 자신의 생이 내미는 이름표와도 같은 것이다. ‘늙은 오이의 노래’를 읊조리는 ‘삶의 낮은 자리’에 대한 성찰이 돌연 눈부시다.
-정윤천(시인)
과거를 회상하거나 그리워하는 데에 함몰되지 않고 현실을 직시하고 미래를 지향한다.이리가라이의 세계관처럼 자신의 여성성을 품으며 여성의 족보를 만들어가고 있는 것이다.
-맹문재(시인)
늙은 여자들은 전부를 자식들에게 내줘서 현재의 삶이 초라하다. 남은 것은 아픈 몸밖에 없다. 전숙은 시의 문장들을 통해 세상의 모든 늙은 여성들에게 위로를 건넨다. 명절은 시골에 남겨진 부모들에게 일생의 꼭 하루처럼 특별한 날이다. 자식을 만나는 일처럼 효과 높은 진통제는 세상에 없다. 쑤시던 뼈마디의 통증이 어느 추석 달빛과 함께 잠든다.
-정상철(시인)
어머니기 시집올 때 가져온 장롱에서 숲을 본다. 육십 년이 된 장롱은 낡았지만 어머니의 삶의 흔적들이 배인 것으로 화자 역시 어려서부터 같이 해 온 물건이다.……오래되어 낡은 장롱에 배인 수많은 서사가 끊이지 않고 이어지는 모습을 그린 시인의 상상력에서 삶의 진정성과 깊이를 느끼게 한다. 또한 경박한 것들이 자리를 차지한 오늘날 삶의 의미를 다시 한 번 사색하게 한다.
-강경호(시인)
가족관계에서 동행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는 것이나 ‘복룡댁의 가슴에도 누군가 부드러운 객토를 듬뿍 깔아준 것일까’로 마무리되는 따뜻한 시선은 동행의 의미를 새롭게 변주하고 있다.
-박해림(시인)
“걸레”는 ‘섬김’과 ‘죽음’의 상징이 되어 “세례”의 참된 정신을 구현하는 것일진대, 모름지기 “세례”를 주고받는 모든 행위 이면에는 “걸레”의 정신이 깃들어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이종섶(시인)
전숙 시인의 시적 미래를 담보한 관심의 언어들이 이처럼 여러 갈래로 빚어져 나와 정작 시인 자신은 노적가리 덩실한 기분이리라. 시인은 시적 자존심이 생존의 거의 전부를 가름하는 경우가 많다. 그만큼 시인에겐 언어로 쌓아올린 자존심의 높이가 생존의 절대성이며 이만한 평가가 객관화된다면 밤잠 줄여가며 절차탁마한 그간의 시간들이 보상된 셈이다.
바람과 햇빛과의 오랜 우정으로 빚어낸 장맛 같은 詩
전숙 시인도 『나이든 호미』머리말에서 자신의 시의 발원지가 ‘어머니’이며 자신 또한 한 사람의‘그 과일 속살 같은 촉촉하고 달콤한 말, 엄마’가 되어있다. 그로부터 자신과 마주치는 삼라만상의 뒤꼍에‘없는 듯 숨어있던’ ‘모성’이 ‘시의 기둥이 되고 심장이 되었음’을 고백처럼 밝혔고 실제 평자들이 보아낸 모성의 언어들이 시인에게서 의도되었던 것을 인지할 수 있겠다.
나이든 호미가 힘들어 보여 젊은 호미를 샀다. 김을 매는데, 젊은 호미는 다짜고짜 풀숲에 달려들더니 날카로운 손톱을 바짝 세우고 풀뿌리를 댕강댕강 막무가내로 끊어버렸다.
날이 밝자 글쎄, 잘려진 뿌리에서 새움이 쏘옥 혓바닥을 내미는 것이었다. 이제 그만 쉬라고 두엄자리에 얹어둔 나이든 호미를 다시 집어 들었다.
호미는 오랜 노동에 뭉툭해진 손톱으로 뿌리에게 무어라 어르고 달래는 것 같았다.
실뿌리 한 올까지
호미에게 내어준 바랭이는
쌀강아지 혀처럼 보드랍고
따뜻한 햇볕에 순해진 눈물을 말렸다
나이든 호미는
잔뿌리에 달라붙은
설움 같은 흙덩이를
가만가만 털어주었다.
〈나이든 호미〉
위의 작품이 추진되는 과정에는 ‘나이든 호미’와‘젊은 호미’가 배역으로 상대화되어 있고 다분히 우리들 시대의 풍속화처럼 그려졌다. 숙련된 독자가 아니어도 요즘 세상에 늙은이가 ‘뒷방차지’인 것은 새삼스럽다. 그래서 ‘이제 그만 쉬라고 두엄자리에 얹어든’ 호미는 요샛말로 퇴물이다. 그리고 ‘젊은 호미’는 세상의 흐름을 타고 한 마디로 잘 나가는 대단한 능력의 소유자다. 다짜고짜 덤벼들 힘 있겠다 바짝 세울 날카로운 손톱 있겠다. 그랬으니 달려든 풀숲에서 풀뿌리 따위야 막무가내 댕강댕강 끊어내 버리는 것은 문제도 아니다. 앞뒤 살피지 않고 실적과 성과만을 내세우는 세태에 잘도 편승한 ‘젊은 호미’를 ‘나이든 호미’는 자못 걱정스러운 것이다. 젊은 호미 날에 잘렸으나 쏘옥 혓바닥 같은 ‘새움’을 밀어 올리는 풀뿌리에게 나이든 호미가 ‘무어라 어르고 달래는 것 같았다’는 표현에 오면 ‘실뿌리 한 올까지/호미에게 내어준 바랭이’의 그 ‘순해진 눈물’의 의미까지를 읽어낼 수 있겠다.
세상회전이 빠른 관계로 나이 40도 못 되어 퇴출도장이 찍힌 세태를 설득력 있게 조심조심 다독이고 위무하는 〈나이든 호미〉의 시적 교훈성은 새삼 ‘설움 같은 흙덩이를 /가만가만 털어주는’ ‘모성’에 모아져 있다. 시인은 젊은 지식의 날카로움이 이웃과 주변에 얼마만큼 상처를 입히는가를 목격하면서 나이든 호미의 “그 뭉툭한 덕성이 바람과 햇빛과의 오랜 우정 끝에야 비로소 우러나오는 묵은 장맛 같은 지혜라는 것”을 뒤늦게야 깨달았음이 이 시의 절정이다. 모성의 세월은 뒷전에 밀린 인고의 세월이다. 감싸고 어루만지고 새싹 올라오는 자리를 북돋아주는 것은 또 다른 자리의 상처마저도 부러진 흥부네 제비다리처럼 약 발라주고 동여매주는 정성과 사랑의 성정과 일치한다.
암컷들은 아무리 가난해도
몸속 은밀한 곳에 주머니 하나씩 숨겨둔다고 한다
암컷들의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것들은
주머니 속에 알콩알콩 쌓여 젖별이 된다
주머니를 뒤집어보면
은하수 같은 만경창파에 빨대들이 빼곡히 꽂혀있다
빨대 끝에는 실팍한 젖별들이 남실거리고
초승달 같은 어린 주둥이들이 찰싹 달라붙어있다
오목오목 물 당기는 소리
꼴딱꼴딱 논밭 적시는 소리
아름답다
오랜 가뭄 끝의 저수지바닥처럼
생살이 다 타버릴 때까지
주머니는 제게 남은 젖별을 아낌없이 흘려보낸다
암소를 잡던 날 알았다
주머니를 들어내니
암소의 살집은 몇 점 발라낼 것도 없이 초췌하였다
누군가 말했다
암컷들은 주머니 빼면 허방이여.
〈소 잡는 날〉
우선 제목에선 섬뜩한 느낌이 스친다. 〈소 잡는 날〉, 처음에는 필자도 그 같은 심정으로 조심조심 이 작품에 진입하다가 ‘어어 이게 아닌데’에 이르렀다. 도축장에 끌고 갈 소를 흥정하는 자리에서 착상된 이 작품은 새끼 길러낼 주머니를 본능적으로 여민 암컷에 대한 인간적 연민을 결곡하게 담았다.
은밀하게 새끼 기를 주머니 하나씩 숨기는 암컷은 빨대 끝에 ‘어린 주둥이들’을 매달아두고 있다. 이 작품에서 ‘꼴딱 꼴딱 논밭 적시는 소리’나 ‘가뭄 끝의 저수지 바닥’등은 표현이 핍진하며 만경창파에 빼곡히 꽂힌 빨대들을 위해 온갖 것을 제공하는 헌신의 우주가 된다. 그래서 어미는 태내에 저장할 영양소를 위해 늘 빈혈에 시달려야 하고 결국 남는 것은 허방뿐이라는 사실에 다다른다. 시작메모에 기대면 “암놈은 무게가 아무리 많이 나가도 헛것이여. 자궁 빼고 나면 고기는 수놈 반도 안 나간단 말이시.”축사에서 소를 팔면서 거간꾼들의 두런거리는 소리에 필자는 신과 인간과의 관계도 이 같은 것이 아닐까를 생각했다고 한다.
천국과 극락도 어머니의 胎中이라는 사실!
줄이고, 주머니 속에 아껴두는 마음과 자궁과의 상관관계. 측은지심에서 집어낸 생명정신의 근원은 삼라만상 모두에게 귀결될 터이다. 어미와 새끼는 희생과 섭생으로 좁혀지고 산모는 빈혈에다 영양실조여도 태내의 새끼만은 영양공급이 충분한 이 엄청난 모성의 절대성! 종교에서 설정한 천국과 극락도 모두가 어머니 태중이라는 것은 고급상징이 되지 못한다. 태아의 열 달 간은 모든 조건에서 원만구족의 극락 체험이며 다시금 돌아가는 회전성으로 구원의 세계가 마무리에 이른다.
〈눈물에게〉에서 읽어낸 정신도 눈물을 매제로 한‘적들의 아픔까지도 유리알처럼’투시하는 ‘세상의 순한 눈들’과 방향을 바꾸어 제 마음을 찌르는 ‘가시’로서의 눈물을 희생과 관용을 바탕에 깐 모성세계의 한 모습으로 읽을 수 있다. 상대의 아픔마저 자신의 아픔으로 받아들이는 인식은 당초 눈물이 가시였다 해도 상대를 향한 공격용도 자신을 지키는 방어용도 못된 터에 여기에 자신의 내출혈을 감행하는 시인의 자기희생이 고스란히 스며있다. 한없이 자신을 내주고도 자식들의 마음이 다칠까봐 내놓고 꾸짖지도 못하는 어미의 헌신적 심성이 못내 아름답다.
어느 때쯤부터 명절에도 어머니 약지가 빈자리였습니다.
세월의 어금니에 뭉그러지던
팔순의 무게와 부피는
조금씩 헐거워지더니
어머니는 생의 반지에서 아예 흘러내리고 말았습니다
장롱 깊은 곳, 빛바랜 자수손수건에 서너 겹 고이 싸인
반지의 약지에서
어머니, 빛나고 있었습니다
눈가에는 네 겹 잔물결 오지게 일렁였습니다
반지를 문지르니
“옆집 새댁 알반지 참말로 곱드랑께.”
어머니....... 꽃시절, 들렸습니다.
〈반지〉중에서
일상에서 어머니는 호사에서도 늘 뒷전이다. 〈반지〉속의 어머니 또한 청빈이나 사양이 몸에 밴 터. 그래 ‘곧 죽을 목숨이 무슨 새 옷이냐며’ 금붙이마저 손사래 치던 칠순의 어머니도 막내를 시켜 ‘알반지 하나 맹글어’오라는 ‘뜬금없는 통사정(?)에서 여성 특유의 호사취미가 숨쉬고 있다. 그러나 그마저 ’고실라진 꽃대에‘ 물오르듯 딱 하루만의 호사였다가 식구들 모이는 명절날만 약지를 밝히는 반지였는데 어느 때부터의 ’빈자리‘에 오면 나이 들어가면서 받아들인 운명의 뒷자리가 자못 쓸쓸하다. 어미에게도 ’알반지 참말로 곱던‘ 옆집의 새댁 시절이 있었다. 그러나 시간은 어머니 눈가에 네 겹 잔물결 오지게 일렁였을 뿐 반지의 약지는 장롱 깊은 곳 서너 겹 빛바랜 자수손수건에 싸여있다. 허나 그 반지에서 화자는 어머니의 꽃시절도 들었고 어머니 또한 반지의 약지에서 빛나고 있었다는 이 작품의 시적 체험은 어쩌면 화자에게 대물림되는 것은 아닐까.
땅이 왼다리를 전다
왼쪽으로 기울어지는 몸
강한 오른손에 밀려 움츠러든 왼손
주방보조처럼 제대로 된 음식 만들어 본 적 없다
길 왼쪽에 몸을 푼 작은 저수지
오랜 봄가뭄에 자궁이 열려 있다
낙태의 흔적일까
자궁내벽 생살 움푹 패어있다
군무를 추며 상처를 핥는 하루살이무리
치맛자락을 잡아당겨 흉터를 덮어주려는 듯
깊은 골을 따라 애잔한 물줄기 서넛
긴 자락을 끌고 있다
형제 중 공부가 뒤처진다고
왼손처럼 자꾸만 움츠러들었던 작은 언니
교통사고로 우리 곁을 떠난 뒤
어머니는 왼 무릎이 운다며
앉기만 하면 왼 무릎을 왼손바닥으로 쓸어주었다
모든 애잔한 것들은 왼쪽으로 몰리는 걸까
왼쪽 하늘이 붉게 충혈 된다
더는 못 참겠다는 듯
염증이 서럽도록 붉게 번진 어머니 왼 무릎이
산등성이로 풀썩 꺾이고
아픈 살이 떠나자
남아있던 몸도 이내 어두워졌다.
〈왼쪽이 아프다〉
〈왼쪽이 아프다〉의 에스프리는 이 나라의 왼쪽 콤플렉스까지 의미적 세계가 확대되는 작품이다. 흐름에 따라서는 자칫 제목에서부터 도그마의 한계를 보여주기 십상인데 풍성한 언어적 진행과 여러 갈래의 밀도 있는 개성을 만들어가고 있다. 제시된 풍경은 무관심에 가깝게 땅, 몸, 왼손, 길 왼쪽에 고여 있는 작은 저수지 등등을 치맛자락 잡아당기듯 끌어다 덮어두고 뒤처진 공부 땜에 자꾸만 움츠러들던 작은 언니가 교통사고를 당한 뒤 왼 무릎을 왼손 바닥으로 쓸어주던 어머니의 왼쪽사랑이 도드라진다. 새삼스럽지만 성경속의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도 같은 맥락의 비유이며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 없다’는 속담 또한 마찬가지의 비유이다. 기울어지거나 애잔한 것은 오래도록 눈에 밟히는 법. 그것들이 지어내는 슬픔이라야 더 큰 감동이 물결쳐 간다. 아름다움의 속성은 슬픈 것이며 약자의 시련은 시련 이상의 연민과 관심을 얻는다. 놓쳐버린 것에의 아쉬움 또한 상대적으로 극대화된다. 놓쳐버린 것은 뭉게구름 같은 환상에 이르고 환상의 외진 길목이 아픈 왼쪽처럼 아름답다.
‘고독 중의 고독, 고요 중의 고요’가 ‘끈’으로 이어져
근자에 좌측보행을 우측보행으로 바꾸었다. 레드컴플렉스가 원죄시되는 대한민국에서는 이 부분만으로도 진정을 외면하는 또 다른 상상을 지어내고 ‘모든 애잔한 것들이 왼쪽으로 몰리는’일에 신경이 쓰여 더는 못 참을 만큼 왼쪽하늘이 붉게 충혈 될 만도 하다. 더 큰 관심 밖에서 항상 소외되어 지내던 작은 언니는 살아평생 조연이거나 순종하는 왼쪽이었기에 아픈 살이 떠나간 뒤에 남겨진 살들은 연민으로 어두워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하늘이 땅이 되고 땅이 허방이 되는 허기의
번뇌에서 날개는 정지한 듯 보이지 않는
속도의 퍼덕임으로 어미의 강을 날았다 맨땅에서
버둥거리는 날갯짓은 바윗덩이를 매단 자맥질이었다
어미는 삭아 내리는 날개를 옹이 박힌 입으로 핥았다
날 수 없는 날개는 눈물이었다
〈바람을 위하여〉중에서
이제 〈바람을 위하여〉에 이르렀다. 지면의 한계로 여기에서는 평면적인 작품 감상에 만족하지만 편 편의 작품들이 모성적 진실을 공통분모로 하면서도 저마다 표정과 기질이 차별화되어 이들을 굳이 하나의 자리에서 한 두 개의 갈래로 추상화시킬 필요는 없겠다는 생각이다. 〈바람을……〉도 작품의 문제성은 진지하고 깊다. ‘스스로 입을 지워버린 어미’인 황금누에는 생의 절정인 우화한 순간에 별을 향해 날던 나무가 옹이를 만들듯 입을 꿰매어 퇴화시켜버렸다. 그러니까 바람이 된 황금누에는 허기진 날개만으로 어미의 강을 날았으나 바윗덩이를 매단 자맥질로 비상은 미수에 그치고 만다. 이미 어려운 시절 부황증 든 어미처럼 생의 소실점이 되어 깃털 하나씩 뽑아내며 멀어지는 비행운의 현상에까지 나아간다. 생활이 어려워도 나아져도 어미는 늘 고난의 중심이다. 식구들을 먹이고 뒷전에서 맹물로 허기를 채우다 보니 어머니가 맨 먼저 부황이 들었을 것은 불문가지. 먹이를 두고도 새끼 산란을 위해 입을 퇴화시킨 황금누에 나방이나 새끼양육을 위해 긴 시간을 허기 속에 지내는 왕문어 등속을 대하다 보면 삼라만상에 깃들어 있는 모성은 차마 입으로 발설하기에 너무나 큰 우주다.
꿈을 낳는 일이나
꽃을 피우는 일이나
짚신 벗어놓은 댓돌 돌아보는 일이라고
반눈 감으신 어머니 삼천배의 삼천 배에
마음 약한 관절은 첫눈처럼 녹아내리네
〈아리바다〉중에서
둥 둥 둥
지축을 울리며 내달아오는 살기에
천애의 벼랑에서 까치발로 서있었을 날개
하늘 담은 눈에 맺혔을 더운 물방울
노심초사의 작은 기척도, 본능의 몸서리도
더 널찍하게 더 깊숙이 끌어안았을 모진 끈
〈끈〉중에서
두 편의 작품에서도 예의 모성은 주제적으로 읽힌다. 〈아리바다〉는 코스타리카 현지어로 ‘도착’을 의미하고 800m에 불과한 좁은 해변에서 8월부터 11월까지 수만 마리 바다거북이 4천Km의 대양을 건너와서 땅을 파고 알을 낳는다. 그런 뒤 거북은 즉시로 바다에 돌아가고 최대 7천만 개의 알이 50일 동안에 부화하는 지상적인 장관이 펼쳐진다. 그 과정에서 사람이나 오소리, 독수리 등 맹금류가 가져가거나 포식하고 여기에서 살아남은 놈이 3%, 어미 거북으로 자라 돌아온 놈이 0.1%인데 바다거북은 이들 포식자들 몫까지 넉넉히 알을 낳아 행운(?)으로 부화한 새끼가 돌아오기만을 기다리고 새끼들은 그 희박한 생존확률 속에서 뒤집어지고 찢기고 잡아먹히면서도 모성을 찾아 어미의 품으로 달려가는 것이다. 바로 이 사연을 노래한 화자에게 生이란 ‘휘돌고 휘돌아도’눈물 그렁한 향심력으로 그려지고 있다. 어미가 자식 갖는 일은 본능 가운데서도 꿈을 낳고 꽃을 피우는 일이다. 한편으로‘짚신 벗어놓고 댓돌 돌아보는 일일시 분명하다.
〈아리바다〉에서 읽어낸 모성의 견인력은 가히 초월적이다. 신이 설계한 집요한 구도 속에 0.1%만의 확률로 어미는 기다리고 새끼는 달려가는 과정이 아직도 끝나지 않은 우리 시대의 전설이 아닐까.
〈끈〉은 ‘노심초사의 작은 기척’을 ‘더 널찍하게 더 깊숙이 끌어안았을 모진 끈’으로 설정한 시인의 안목이 또 하나의 모성에 굽이를 만든다. 모성은 희생 그 자체이며 동물세계에서는 사랑의 절대성이다. 예초기 칼날에 목이 잘리면서도 알을 품는 까투리의 그 넘어설 수 없는 모성의 세계를 성스럽다거나 아름답다는 수사적 표현만으로 가당키나 하겠는가. 시인의 〈끈〉의 은유적 의미화로 산을 태우는 열기에 타죽을지언정, 모가지가 잘려나갈지언정 제 목숨에 우선하여 새끼를 보호하는 동물들의 ‘본능적 어미 사랑’에 연유된 끊어낼 수 없는“고독 중의 고독/고요 중의 고요/모든 명줄의 명줄/우주를 먹여 살리는 저 끈”으로서의 형상성이 직핍하다. 그리 보면 이 지상의 모든‘모성 이데올로기’는 전숙의 이‘끈’으로 수렴되는 셈이며 시 정신으로써‘한 마디 弔辭’까지를 목표하는 것이다
문학이 인간의 작업임을 전제할 때 모든 문학이 시작되는 곳이 바로 모성이다. 마쳐지는 문학의 마지막 자리 또한 모성이다. 누구나 모성의 우산을 처마처럼 올려놓고 계단을 오르듯 한때는 아기였고 소년기, 청년기, 장년 기, 노년기를 거치면서도 인간은 늘 모성의 그늘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여기에 전숙 시인의 작품이 위치한다면 시의 주제적 ‘모성’은 인술을 베푸는 자신의 생활환경에도 이어진 작품의 광각적인 오지랖일 수 있겠다.
모성은 복사열처럼 번져온 위안의 時空
프리즘 적으로 펼쳐놓은 전숙 시인의 8편의 작품들을‘모성’ 내지는 ‘모성성’을 중심으로 독서하였다. 굳이 이 글의 성격에 이르자면 의미와 흐름을 함께 거쳐 왔다는 편이 맞을 것이다. 상식선상의 논의지만 모성(Maternity)은 출산과 양육행위에 관련한 일체의 행위와 성향을 말하며 속성적으로는 무한하고 추상적이지만 현상적으로는 역사적이며 유한성에 터 잡고 있다. 이것들이 미세한 부분까지 표현의 묘(妙)에 이르렀는데 이들이 지닌 언어적 울림과 파장이 깊고 넓다. 전시인이 구사한 언어는 그만큼 굴절과 확산, 변용에 나아간 개성적인 이미지가 많았고 그래서 경험 내지는 담론이 스미듯이 펼쳐졌다. 사실 한 시인에게 8편의 작품(등단연조에서 3,4년을 계산할 때에도)은 극히 제한적인 편수이다. 물론 시인에 따라 과작이냐 다작이냐 차이는 있겠으나 필자가 아는 전숙은 다산종의 어미를 떠올릴 만큼 다작의 시인이다. 이는 그가 지천명을 넘기고야 등단한 자연 발화적 창작에 기인한 현상이랄 수 있겠다. ‘늦게 배운 도둑이 날 샌 줄 모른다.’는 좀 어울리지 않는 비유가 용서된다면 그의 창작적 에너지와 추진력은 불퇴전의 흐름이 되어 볼만한 현상에 나아갈 것이다.
어머니는 비유컨대 직사광선 같은‘말초 신경적 행복’보다는 복사열처럼 번져서 채운 ‘위안’의 時空이다. 그래서 모성은 기억과 그 기억의 응용을 통해 프리즘적 변용으로 빚어지고 무지에 대한 가르침 보다는 감각적 깨우침에 도달한다. 아니, 모성은 미세한 풀뿌리에도 머물지만 우주의 옷을 입고 창조의 장이 되기도 한다.
시가 성공한 세상은 콧노래도 무지개로 뜬다. 현실에서 시는 미세한 몸부림이기 십상이다. 그러나 장엄하고 무소불위라는 정치나 경제가 뒷자리 차지가 되면 그 죽음 같은 폐허위에 새살 차오르듯 생명의 기운을 꽃피우는 것이 시인이고 시이다. 조금 거창해졌지만 전숙 시인의 ‘모성’의 언어는 현실에서는 풀잎 하나 들어 올릴 힘도 못 된다. 허나 여기에서 설득된 표현의 위력은 너끈히 우주를 지탱하고 채우는 에너지로 확대된다. 좋은 시의 장인 전숙 시인의 전도를 오래도록 지켜보려 한다. (문장21) 2010 가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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