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매를 건너다
전숙
고사목이 되어
선 채로 피돌기를 멈춘 고사목이 되어
마음을 두드리는 모든 바람을 떠나보낸다
어떤 뜨거운 맹세도
나의 벼락 맞은 심장을 돌이킬 수가 없다
썩은 발가락이 떨어져나가듯
썩은 시간의 지체들이 뭉텅뭉텅 사라지고
울지도 못하는 발가락을 찾아서
해거름의 붉은 젖무덤을 더듬고 더듬는다
절벽,
절벽,
절벽
기억의 젖줄은 가난한 어미처럼 말라붙어
낯설고 낯선 망각의 안개바다
그 무표정한 파도에 떠밀리며
나 아닌 나는
선잠 깬 아이처럼 사랑에 허기져서
먹어도 먹어도 배가 고프다
얼마나 캄캄하더냐
얼마나 춥더냐
더운 눈물과 설레이는 미소가
무성하게 피어나던 꽃길을 지나왔노라
스스로 위로할 줄도 모르는 향기로운 영혼이여
명주손수건에 고이 접어둔 첫입맞춤도
이제 다시는
젖은 눈빛의 추억이 되지 못해
나는 당신에게로 갈 수가 없다.
아리바다*
전숙
나 돌아가야 하리
달이 반눈을 감으면
풀렸던 탯줄을 잡아당기는 얼레
방패연처럼 끌려오는 아리바다
그곳은 꿈을 낳기 위해 돌아가야 할 태반
생의 방향이 회오리치는 굴레에서
휘돌고 휘돌아도
각인된 향기는 눈물 그렁한 향심력
꿈을 낳는 일이나
꽃을 피우는 일이나
짚신 벗어놓은 댓돌 돌아보는 일이라고
반눈 감으신 어머니 삼천배의 삼천 배에
마음 약한 관절은 첫눈처럼 녹아내리네
끊임없이 가슴에 돋아나는 별을 헤며
끝나지 않는 길을 당기고 당기네
길 끝엔 이빨을 드러낸
허기진 목구멍들이 꿈을 기다리네
어떤 꿈은 눈뜨기도 전에 박살나고
어떤 꿈은 첫걸음이 벼랑이네
아리바다를 부르면 벌렁 뒤집어진 꿈이 곧추 서네
내 가슴에 돋아나는 별처럼 꿈은 멈추지 않네
되돌아오지 못할 꿈이 더 많아
가슴이 아린 바다는 오늘밤도 잠들지 못하고
서성이는 발걸음이 어느덧 육지 허벅지까지 찰랑대네
아리바다 아리바다 기다리고 기다리네
아리바다가 끝나지 않는 전설이 된 이유라네.
*코스타리카 현지어로 ‘도착’을 뜻한다 함. 바다거북의 산란을 말함
달의 무늬
전숙
소리 없이 어두워질 것
얘야, 네 가슴의 달을 잘 간수하거라
달의 무늬를 기억해야한단다
흔적 없이 스며드는 이슬도 무늬가 있단다
울타리콩이 울타리를 감고 자라듯이
네가 감고 자라야 할 것들
모든 스러지는 것들의 무늬를 만져보는 일이란다
몸을 떨며 뛰어내리는 단풍잎도
손을 잡아주는 달빛이 있는 한 외롭지는 않단다
풀벌레가 울음을 멈추지 않으면
떠나지 못하는 가을처럼
붉어지는 생이 결코 물들일 수 없는 것
나무껍질이 딱딱한 고목도
아기솜털처럼 순한 실뿌리가 있단다
고목이 살아가는 힘은
그 실뿌리에 기대어 깊어지는 그늘이란다
이윽고 한 잎 서러운 낙엽 되어
돌아가는 모든 달덩이는
남겨진 달빛이 외롭지 않도록
무늬를 벗어두고 간단다
무늬를 읽다보면 어느새
네 가슴에 떠있을 달
바이칼 호수를 비추듯이
또 누군가를 비출 저 서러운 달.
끈
전숙
윙 윙 윙
예초기의 살기가 바람개비처럼 돌았다
오색 깃털이 날아올랐다
살을 지지는 대낮의 불덩이도
몽둥이찜질 같은 소낙비도
온몸으로 막아내었을 깃털 주검 아래는
아직도 알맞게 따뜻한 여덟 개의 명줄들
둥 둥 둥
지축을 울리며 내달아오는 살기에
천애의 벼랑에서 까치발로 서있었을 날개
하늘 담은 눈에 맺혔을 더운 물방울
노심초사의 작은 기척도, 본능의 몸서리도
더 널찍하게 더 깊숙이 끌어안았을 모진 끈
고독 중의 고독
고요 중의 고요
모든 명줄의 명줄
우주를 먹여 살리는 저 끈
꿩 꿩 꿩
마침내 무정한 칼날을 맞고도
차마 아주 끊어내지 못해 대롱거리는
끈이 뜨겁게 울컥거리더니
이내 남겨진 알들에게로 스며들었다.
천지에서
전숙
시퍼런 기다림이 너무 길어서
가뭇해진 눈시울로 어머니는 출렁이고 있었다
은혜의 깊이를 헤아리기엔
호사수구狐死首丘도 못한 불효가 막심하여서
고개를 들어 차마 바라보지 못하고
찰칵찰칵 근사한 생의 배경을 요구하는
요란한 몸짓들 틈에서 북받치는 울음을 삼켰다
내가 통곡하지 않아도 어머니는 알고 있었다
텔레비전방송에 나가
가물거리는 모국어로 더듬거리지 않아도
얼마나 머나먼 길을 에돌아
당신을 마주하고 있는지,
토하듯 먹구름을 울컥 쏟아내어
당신의 속내를 은근히 드러내기도 했지만
솟구치는 반가움을 소리 내어 말하지는 않았다
사라져버린 갈기를 돌이켜 세워보겠다는 듯
바람이 천지의 등허리를 더듬었다
장백산에 억지입양된 천문봉이
장군봉 큰 눈망울에 뚜렷이 떠올랐다
누군가 목 놓아 부르는 소리 들렸다
피의 발원지를 향한 끊임없는 구도求道의 울림일까
백두대간의 영혼이 동강나고,
손발마저 편이 갈려
당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따로 노는
뇌성마비환자가 되어버린 어머니
내가 무엇을 보고 가야하는지
돌아가서 무엇을 기억해야하는지
그리고 어떻게 돌아와야 하는지
한결같은 출렁임으로 새기는 다짐이
물비늘로 반짝이고 있었다
‘결단코 다시는, 남의 땅을 밟고
내 어머니께 돌아오지 않겠다.’
**********
문학바탕 2010.12월호 '이달의 시인'
'☆˚ 맑음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신년시 -새해에는 순백의 토끼 같은 그런 예쁜 복을 짓자/전숙 (0) | 2010.12.31 |
---|---|
송년시 -호량이를 떠나보내며 (0) | 2010.12.26 |
징검다리/전숙 (0) | 2010.11.15 |
달의 무늬/전숙 (0) | 2010.09.10 |
그대 내 몸의 샘이 되는 동안/ 전숙 (0) | 2010.09.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