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름
전숙
개썰매를 몰아 방향을 찾는 이누이트들은
눈의 주름을 보고 길을 찾는다고 한다
설원을 쓸고 간 바람의 발자국이
주름을 만든다는 것이다
나는 머리카락을 추켜올리고
이마의 주름을 활짝 드러내었다
내가 걸어온 바람 같은 길이
생의 설원에 석 줄 깊은 발자국을 찍어놓았다
내 뒤에 오는 누군가
이 주름을 더듬어 가면
생의 크레바스를 무사히 비켜갈 수 있으리라.
다층2009여름발표작품
2010 오늘의 좋은 시 (푸른사상사) 선정
시평: 세상의 모든 주름에는 시간이 축적되어있다. 주름은 본래부터 있는 것이 아니라 무수히 많은 시간들이 지나간 흔적이다. 따라서 그 너비와 깊이만큼 시간이 들어 있으므로 주름을 긍정하는 세계관이 요구된다. 자신이 이룬 길이 비록 다른 길보다도 험하고 멀지라도 운명적으로 품는 자세가 필요한 것이다 "따라서 머리카락을 추켜올리고/이마의 주름을 활짝 드러내"는 시인의 자세는 바람직하다. 그와 같은 모습으로 나아가면 삶의 "크레바스를 무사히 비켜갈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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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치밥
전숙
미처 덜 익은 노을이 땡감처럼 얹히는
휴게소겨울주차장 따뜻한 기운을 염탐하던
마음의 촉수가 꿈틀거렸다
번쩍거리는 외제차를 지나쳐
귀퉁이의 구닥다리승합차를 주시했다
녹슨 세월을 청색테이프로 정성스레 기운
낡은 승합차에서 스파크가 일었다
차만큼이나 낡은 아내가
호호 입김을 불어 차창을 닦고 있다
잔등 위에 더께로 내려앉은 가난을 털어내듯
낡은 생끼리 건네받은 중고땟국을 지우고 있다
차안 쪽에서 차창을 닦던
남편의 입술과 아내의 입술이
유리를 사이에 두고 딱 포개졌다
금세 떫은맛을 지워낸
석양이 발갛게 빈가지에 걸리고
포로롱 날아든 신혼의 까치부부
갓 어우러진 부리가 달게 꽂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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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른호박넝쿨이 되어
전숙
노래를 멈출 수 없다
시베리아 자작나무의 설움이던
삭풍이 남도의 낮은 울타리
마른호박넝쿨이 되어 노래하고 있다
제 설움에 겨워 통곡하던 곡비(哭婢)처럼
산고에 든 지어미를 위하여
지붕 위에 올라가 비명을 지른다는
아프리카 어느 부족의 지아비들처럼
저 바람, 울음의 대리모가 되어 목울대가 쓰리다
강성하던 근육질에 끊임없이 수태되던
푸른빛이 혹은 누런빛이 지금쯤
그리워지는 것이 무엇인 줄 안다는 듯
온열매트의 다이얼을 돌려
눈꺼풀 아래 검은 그림자 앙상해진 기다림이
망각의 체온에 눈금을 맞추고 있다
몸의 물기가 모두 제거되면
한 방울의 눈물조차 남아있지 않으면
마음을 가누지 못하고
말라붙은 젖가슴으로 흐느끼는
저 호박넝쿨처럼 바람의 악기로 남으리라.
(이상 2010 시선 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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