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맑음시

나의 시작노트ㅡ

전숙 2009. 8. 5. 17:56

나이든 호미

                                        전숙


 나이든 호미가 힘들어 보여 젊은 호미를 샀다. 김을 매는데, 젊은 호미는 다짜고짜 풀숲에 달려들더니 날카로운 손톱을 바짝 세우고 풀뿌리를 댕강댕강 막무가내로 끊어버렸다.


 날이 밝자 글쎄, 잘려진 뿌리에서 새움이 쏘옥 혓바닥을 내미는 것이었다. 이제 그만 쉬라고 두엄자리에 얹어둔 나이든 호미를 다시 집어 들었다.


 호미는 오랜 노동에 뭉툭해진 손톱으로 뿌리에게 무어라 어르고 달래는 것 같았다.


실뿌리 한 올까지

호미에게 내어준 바랭이는

쌀강아지 혀처럼 보드랍고

따뜻한 햇볕에 순해진 눈물을 말렸다


나이든 호미는

잔뿌리에 달라붙은

설움 같은 흙덩이를

가만가만 털어주었다.

 




시작노트

나이든 호미, 그 무딘 눈빛

                                                전숙


 내가 누군지 알고 싶었습니다. 거울을 들여다보려는데 광속의 속도감에 떠밀려 끝도 없이 흘러오고 말았습니다. 아무리 멈추려 해도 빠른 유속으로 인하여 어느 언덕에도 발 딛을 수 없었습니다. 뿌리내리지 못한 장돌뱅이 같은 유랑의 계절이었습니다. 그러던 언제부턴가 내 신발 끈을 잡고 늘어지는 것이 있었습니다. 급브레이크 밟는 발바닥에 아스콘 타는 냄새가 배어들었습니다. 그래도 멈출 수 있어 얼마나 다행인줄 모릅니다. 한 눈금 앞에는 붉게 충혈 된 돌부리가 잔뜩 겁먹은 채 납작 엎드려 있었습니다.


 나이든 호미란 오랜 동안 땅을 파면서, 처음의 날카로웠던 날이 뭉툭하게 닳고 덕지덕지 녹이 슨 볼품없는 낡은 세월입니다. 나는 어느 날 나이든 호미가 너무 낡아서 새 호미를 샀습니다. 새 호미로 밭일을 하는데 젊은 호미는 날카로운 손톱으로 풀뿌리든 고구마줄기든 막무가내로 끊어버렸습니다. 젊은 지식의 날카로움이 얼마나 빠르게 이웃에게 상처를 입히는가를 목격하고서야 나는 나이든 호미를 다시 찾게 되었습니다. 눈과 귀가 낡아서 무뎌진 오감의 반응으로 한없이 느려진 나이든 호미는‘쯧쯧’혀를 차며 허기진 가슴들을 달래주었습니다. 바로 그 뭉툭한 덕성이 바람과 햇빛과의 오랜 우정 끝에야 비로소 우러나오는 묵은 장맛 같은 지혜라는 것을 나는 뒤늦게야 깨달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덕성은 나의 시의 영원한 화두인 모성으로 다가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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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아주를 만나다

                                                                                                                          전숙

 이름에 혹하여 무턱대고 명아주를 사모하였습니다. 청려장이라는 높은 뜻을 알고부터, 그녀는 내 안에 뿌리를 내리고 비틀거리는 나를 지탱해주곤 하였습니다. 어느 달빛 사무치게 가난한 날에 그녀를 만났습니다. 그녀의 숭한 얼굴을 보자 마음커녕 눈길조차 주기 싫어졌습니다. 아니, 뭉그적거리는 그녀의 잔상까지 말끔히 지워내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청려장이 나의 퇴행된 척추를 교정하고 있어서 그녀를 도려내려니 나는 앉은뱅이가 되고 말 것 같았습니다. 그제야 명아주의 마음을 들여다보게 되었습니다. 여린 풀대궁을 벼려서 금강처럼 단단한 청려장을 만들어, 누군가의 휘청거리는 몸을 지탱해주려면 겉 매무새 곱게 단장할 작은 틈새도 아까웠을 것입니다.


 어머니도 여인일진대, 얼마나 아리따운 꽃으로 피어나고 싶으셨을까요. 나는 누추한 어머니가 부끄러워 한 여름 내내 화려한 꽃만을 쫓아다녔습니다.


명아주는 저만치서

삼복의 화덕에 불붙은 꽃심지를

차가운 달빛에 밤도와 벼리고 있습니다

 

 백공단처럼 우련하게 어리는 달빛이 우물터에서 빨래를 하시는 어머니의 헤진 적삼에 올올이 배어들었습니다. 명아주의 초라한 향기가 내게는 비단꽃향무의 향기처럼 향기로웠습니다.


(시작노트)

 우리 세대의 대부분이 그렇지만 제 어린 시절도 누구 못지않게 가난한 세월이었습니다. 아버지는 사업 실패하신 후에 삶에 대한 의욕이 없으셨지요. 아홉 식구 대가족의 먹거리며 입성이 모두 어머니의 몫이었습니다.

 어머니는 외출할 때면 사계절 내내 입고 입던 몸빼에  홑다후다치마를 걸치셨습니다. 저는 어린시절에는 그 다후다치마가 세상에서 제일 좋은 옷인 줄 알았지요. 조금 철이 들어서는 수십 년을 그 다후다치마만 입으시는 어머니가 부끄러웠습니다. 친구들의 어머니는 젊고, 예쁜 옷만 입으시는데 우리 어머니는 늘 나이 들고 초라하였지요. 제가 늦둥이였거든요.

 제가 돈을 벌어 어머니께 좋은 옷을 사드릴 수 있게 되었을 때도 근검절약이 이미 몸에 배어버린 어머니는 새 옷은 농속에 저 몰래 넣어 두었다가 가난한 친척이 오면 들려 보내셨습니다. 어머니는 어려웠던 시절을 잊지 않으셨지요.

 명아주라는 풀이름을 듣고 나름대로 명아주의 생김새를 상상하였습니다. 더군다나 그 풀꽃대가 가볍고 튼튼하여 지팡이로서는 최고로 꼽아서 이름이 청려장으로 불리고, 장수노인들에게 나라님이 상으로 내리던 지팡이라더군요. 그 말을 듣고 더욱 기대 빵빵하였지요.

 필시 이름처럼 예쁜 꽃이 피는 야생화려니 하였지요. 어느 여름날 거친 들에서 명아주를 만났습니다. 명아주의 꽃은 꽃이라고 이름 붙이기에도 민망할 정도로 못생겼더군요. 꼭 부스럼딱지의 형상에 그 흔한 빨강 노랑도 채색하지 않았지요. 마치 한평생 립스틱 한 번 바르지 않으시던 우리 어머니의 부르튼 입술 같았습니다. 내 상상이 폭삭 주저앉으며 실망감에 꽃이 더욱 미웠습니다. 꽃의 기억을 지워버리려는데 문득 청려장이라는 말이 떠올랐습니다. 뇌리에 어머니의 다후다치마와 명아주의 미운 모습이 오버랩 되었습니다. 어머니도 꽃시절이 있었을 텐데…….고운 옷도 입고 싶고 좋은 화장품도 갖고 싶으셨겠지요. 명아주도 친구들보다 예쁜 꽃 피우고 싶었겠지요. 일곱 자식의 입이 어머니의 꽃시절을 빼앗아갔듯이 명아주도 제 풀대궁을 더욱 단단하고 더욱 가볍게 키우는데 정성을 들이느라 예쁜 꽃을 피워내지 못했겠지요.

 나이 들어서야 다시, 어머니의 다후다치마가 세상에서 가장 귀한 옷으로 추억되듯이 명아주의 어진 심중이 그때야 들여다보였습니다.

 그래서 이 시가 저에게 왔지요. 시에서는 명아주가 어머니로 은유되고 어머니가 명아주로 은유되었습니다. 어머니와 명아주의 일생이 한 편의 시에 압축되어 있습니다. 공감이 가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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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기술

                                전숙


창가에 놓아둔 작은 화분

애기별꽃이 별천지가 되었다

나를 보게 하려고

꽃의 얼굴을 돌려놓았다

웬걸,

이내 양지쪽으로 돌아서는 마음에

나는 혼자 화끈거린다


누군가를 외곬으로 바라본다는 것

멈출 수 없다는 것

그것, 불에 덴 듯

얼마나 아린 일인지


하지만 

사랑한다는 것은

다른 곳을 바라보는

너의 시선 또한 인정해 주는 일

그러나 그것 또한 얼마나 아린 일인지


그러므로

사랑하는 일은 언제나

가슴 복판에 매운 강물 한 줄기

흘려보내는 일.


시작노트


창가의 꽃들이 유리창에 달라붙어 햇빛만 바라보고 있습니다.

심통이 난 나는 꽃이 나를 보게 하려고 화분을 돌려놓았습니다.

며칠 후에 보니 꽃들은 어느새 고개를 돌려

다시 유리창에 찰싹 붙어있었습니다.

우리 집 애완견도 가족 중에 얘들 아빠를 가장 좋아합니다.

얘들 아빠가 차에서 내리면 그 뒷모습으로만 눈이 따라갑니다.

다른 가족이 아무리 맛있는 간식으로 유혹을 해도 눈길도 주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꽃을 미워할 수도, 애완견을 미워할 수도 없는 노릇입니다.

그런 관계가 사람 사이, 남녀 사이에 형성되었다고 합시다.

시앗을 보면 부처님도 돌아앉는다는데 인간이야 오죽하겠습니까?

애정관계도 그렇지만 종교가 틀리다거나

정치적 취향이 틀리다거나 할 때도 우리는 철천지원수처럼

서로 으르렁거릴 때가 많습니다.

서로 같은 방향을 보는 것이 사랑이라지만

같은 방향을 보지 않는다고 해서 사랑하는 이를 미워할 수는 없지요.

서로 맞바라보면 더할 나위 없는 행복한 사랑이겠지만

어찌 마음이 꼭 그렇게 됩니까?

그래서 외짝사랑이 생겨나고 그 설움이 불에 덴 듯 아린거지요.

내가 아닌 다른 곳을 바라보는 너를 사랑할 수밖에

없는 마음이 오죽하겠습니까?

참사랑이란 모든 악조건에도 불구하고

사랑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그 일은 가슴 복판에 매운 강물이

흘러가는 것만큼이나 또한 가슴 시린 일이겠지요.

아무튼지 진정한 사랑이란

아무리 아프더라도 다른 방향만 바라보는

그 마음까지도 사랑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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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에게

                      전숙


눈물은 태초에 가시였단다


순한 눈을 지키라고 하느님이 선물로 주셨지


발톱을 세워 달려드는 적들을

가시는 차마 찌를 수 없었단다


마음이 너무 투명해서

적들의 아픔까지 유리알처럼 보였거든


세상의 순한 눈들은

가시의 방향을 바꾸어

제 마음을 찌르고 말았단다


도살장의 소


마음이 흘린 피

그게 눈물이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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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노트


모든 착하고 선한 눈들에게 바치고 싶은 시입니다.

태초에 하느님께서 만물을 창조하실 때는

모든 피조물에게 동일한 조건을 주셨을 것입니다.

자신의 몸을 지켜낼 수 있는 방어용이나 공격용 무기를

신체의 일부로 만들어주셨겠지요.

그러나 순한 마음들은 차마 그 무기를 사용하지 못합니다.

아프리카의 누떼들을 보면 그 큰 몸집으로 들이받기만 해도

사자를 넘어뜨릴 수 있는데도 사자를 공격하지 못하고 도망갑니다.

고슴도치의 가시털이나 코끼리의 상아나

벌의 침 같은 것을 순한 사람들에게도 챙겨주셨겠지요.


저는 살아오면서 가슴 아픈 경우를 많이 보았습니다.

대개의 경우 순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은

타인에게 상처를 받아도

자신의 가시로 상대에게 되돌려 찌르지 못하고

혼자 끙끙 앓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대표적인 경우가 부모의 마음, 특히 모성이지요.

한없이 내어주면서도 자식이 섭섭하게 한다고 해서

자식에게 내놓고 꾸지람을 못하십니다.

남에게 자식의 흉도 못 보십니다.

자신보다 자식의 입장을 먼저 생각하기 때문이지요.

소도 도살장 앞에서 죽는 줄 아는 지,

주르르 눈물 흘린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아마 소가 악한 짐승이었다면

길길이 뛰면서 무엇이든 마구 들이받지 않았을까요?

제 생각에는 세상에서 가장 선한 눈을 가진

피조물이 소인 것 같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무기인 가시로 상대를 찌를 수 없습니다.

상대의 아픔이 자신의 아픔이기 때문이지요.

차라리 자신을 찔러 자신이 아프고 맙니다.

그 아픔이 소리 없는 신음이 되어

밖으로 흘러나온 것이 눈물이지요.

그들이 흘린 눈물이

순한 영혼들의 마음이 흘린 피로 제게 다가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