맑음 수필

꽃밭에 꽃

전숙 2014. 9. 19. 08:25

꽃밭에 꽃

                                       전숙

봄비 내린다. 빗속에 빛나는 광명 있다. 다가가보니 빛줄기 속에서도 살포시 미소 띠우듯 꽃잎 열려있다. 역시 꽃이로구나. 개나리든, 수선화든 목련이든 꽃밭의 꽃나무를 생각하면 자연스레 그 꽃나무의 대표적 이미지로 꽃을 떠올리게 된다. 그 꽃을 피워 올리기 위해 뿌리가 어떤 수고를 하고 잎과 줄기가 허공을 걸으며 어떤 절망과 희망을 쏘아 올렸을 지의 과정은 잊혀지는 것이다. 아니 처음부터 사초에 기록되지도 않는다. 왕과 왕비와 걸출한 충신과 역적 등으로 한바탕 회오리치지 않으면 역사의 수레바퀴 아래 깔려서도 누구의 시선도 잡아끌 수가 없다.

어느 누가 스스로 뒤란의 생을 택할 것인가. 어쩔 수 없는 운명으로 잎이 되고 뿌리가 될 수밖에 없다고 치부하면서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평범한 생을 사는 삶이 대부분일 것이다. 그러나 그 평범함에서 뿌듯함을 느끼고 희망을 길어 올리는 삶들도 있다. 부모, 특히 어머니들의 삶의 여정은 자식들 뒷바라지 하는 일이 생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그래도 뿌리가 되는 걸 후회하고 잎이 되는 걸 절망하는 어머니는 없을 것이다. 어머니의 사랑은 인류역사를 지탱하는 도덕이요, 종교 아니던가. 그런 모성을 느끼게 하는 바라지의 삶을 흔연히 택한 한 남자를 보았다. KBS의 한 다큐프로에서였다.

티벳은 하늘 아래 첫 동네다. 하늘의 푸르름이 온 나라를 물들이고 있는 그 나라는 태초부터 사람들의 마음에서 욕심을 지워버린 것일까. 평생에 한 번이라도 라싸를 향해 오체투지를 하는 것이 평생소원인 티벳 국민들을 바라보면 그 순수의 열정에 절로 감읍될 수밖에 없다. 라싸까지의 순례를 택하면 고통이 행복이 된다. 삼보일배를 하면서 일배는 오체투지를 한다. 이마와 양 무릎과 두 손이 땅바닥에 닿아야 하니 도리 없이 온몸을 찰싹 땅바닥에 붙일 수밖에 없다. 누가 시켜서 억지로 하는 것이면 슬쩍 꾀부릴 만도 하련만 이는 스스로 우러나서 하는 것이니 여지없이 이마가 깨지고 피딱지가 말라붙어 굳은살이 반질반질 길이 들고 이내 옹이가 되어 사리처럼 영롱한 광명이 되는 것이다. 머리와 입과 가슴에 합장을 하고 머리와 사지는 땅과 한몸이 된다. 그러면서 기도를 하고 영혼을 씻고 말을 그치고 가슴을 여는 것이다. 이윽고 오체투지 하는 사람은 몸 전체가 멍이 들고 상처가 터지고 아무는 과정을 겪어낸 뒤에 그 몸이 광배에 휩싸인 듯 서기가 서리는 것이다. 삼보일배의 오체투지하는 순간만은 성불의 경지에 이른 것처럼 보인다. 왜 그래야만 하는가? 간절해보지 못한 눈으로는 간절함을 볼 수 없으니 결코 답을 말해줄 수 없는 질문일 것이다.

오체투지하는 순례의 뒤를 따르는 짐수레가 있다. 짐수레를 끄는 사람은 60세가 넘은 결핵을 앓고 있는 환자다. 자신은 병들고 쇠약해서 오체투지의 삼보일배고행을 할 수 없으니 오체투지하는 사람을 뒷바라지함으로써 오체투지의 고행순례길에 동참하는 것이다. 오체투지를 실행하는 꽃에게 따뜻하게 먹여서 먼저 출발시키고 자신은 뒤늦게 출발해서 무거운 짐수레를 비 오듯 땀을 흘리며 끌고서 먼저 도착해야한다. 먼저 도착해서 오체투지의 하루를 끝낸 꽃들이 먹을 음식과 차를 준비하는 것이다. 그것이 무엇이든 간절한 것들은 감동을 준다. 미련하게까지 보이는 우직하고 투박한 저 믿음을 보며 간절하다는 말이 간절해지는 것을 어쩌랴. 절하기 전에 세 번 손뼉을 친다. 몸과 마음과 말 세 가지를 부처님께 바친다는 뜻이다. 모든 중생이 자신을 따라서 절을 한다고 믿는다. 그 절을 부처님이 기쁘게 받아주실 것이라는 믿음이 모든 고통을 감내할 수 있는 힘을 준다. 설령 부처님이 받아 주시지 않으면 어떤가. 내가, 나의 뿌리가, 내 몸의 줄기가, 잎이 온 힘을 다해 꽃을 피워냈는데 아무도 보아주지 않으면 어떠랴. 아무도 알아주지 않으면 어떠랴. 꽃은 이미 피웠고 나비나 꿀벌이 날아와 꿀을 취하면 더할 수 없는 상호 보시련만 누구의 눈에 띄지 않아 아무 보람 없이 고실라진다 하여도 간절하게 꽃을 피운 것만으로 그 생은 간절함을 이룬 것이다. 지금 이 순간 나에게 간절한 목마름이 있다면 나는 얼마나 행복한 것인가.

해발 5,000미터의 미라산을 오른다. 바위가 내 몸에 눕고 아직 굳지 못한 연한 살에 돌이 박히고 그 돌이 사리가 되어 눈밭을 건너서 라싸를 향한다. 몸이 얼어붙어도 마음은 뜨겁게 타오른다. 거기에 가면 된다. 지금 생각할 수 있는 것은 그 뿐이다. 내가 느끼는 고통만큼 세상의 죄가 정화된다. 라싸의 조캉사원에 있는 당나라 문성공주가 가져왔다는 석가모니불을 봄으로써 순례는 끝이 난다. 그러나 그 끝은 깨달음이라는 눈에 보이지 않는 새로운 목표에로의 시작일 뿐이다. 언제나 끝은 새로운 시작을 의미하므로.

비가 그쳤다. 꽃밭에 꽃들이 빛난다. 빗방울들은 꽃의 몸을 꼬옥 껴안았다. 빗방울과 한몸을 이룬 꽃의 몸이 눈부시다. 꽃만이 아니라 잎도 줄기도 그리고 보이지 않는 뿌리까지도 보석이 되어 빛나고 있다. 이제 왕도 몸종도 없는 오체가 하나의 등신불이 되어 타오르고 있다. 생은 그런 것이다. 꽃밭에 꽃만 있는 것이 아니듯 생의 빛나는 한 순간을 위해 때로는 뿌리의 세월도 때로는 잎과 줄기의 세월도 살아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눈물로 범벅 진 그 세월들은 눈물을 노래하는 시인의 가슴에서 비로소 시로 탄생하는 것이다. 꽃이 아닌 눈물이 시가 된다는 것! 이 또한 얼마나 경이로운 삶의 비밀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