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스크팩
전숙
식당종업원이 홈쇼핑광고처럼 업그레이드된
스프레이화장품을 식탁에 분사한다
킬힐을 뽐내던 새내기 식탁은
고급피부관리실의 우수고객처럼 은근 즐기는 눈치다
선임 비닐식탁보가 마스크팩을 덮듯이 식탁의 얼굴을 판판이 두드린다
식탁의 피부가 양귀비처럼 투명해지길 기다리는데
이런 콧구멍이 없다
영화 속의 억울한 궁녀처럼 자지러지는 식탁,
단말마의 거친 호흡이 식탁에 한 폭 산수화를 그려놓는다
늦가을 퇴직자 같은 낙엽이 흩날리는 듯
공기주머니처럼 가벼운 밥주머니를 뜨겁게 품은
기간제 철새들이 필생의 군무를 추는 듯
서러워 아름다운 절경을
콩나물접시와 물병이 젓가락장단처럼 흐트러트린다
철새 한 마리의 ‘컴백홈’을 축하하는 친절한 송별회자리
정규직마스크팩들의 술잔 부딪히는 소리가
한겨울 시베리아기단처럼 차다
날숨 그대로 얼어붙은 철새는
등 두려주는 웃음의 칼날에 쩌엉쩡 실금이 간다
기간제 근로자들의 마스크팩발령장엔 숨구멍을 틔우지 않는다
저장된 공기는 명부에 기록된 계약일 만큼의 분량뿐이다.
황소개구리
전숙
황소개구리 가격이 폭락하던 날 엄마는 팔푼이언니를 낳았다
그날 밤 양식장에서 탈출한 황소개구리 한 마리가 엄마 심장으로 뛰어들었다. 팔푼이언니가 조각구름들에게 놀림 받은 날은 엄마심장에 들어앉은 황소개구리의 울음주머니가 소낙비를 부르듯이 부풀어 올랐다. 감기 걸린 우물처럼 쿨럭쿨럭 범람하는 울음을 엄마는 보릿대처럼 메마른 손바닥으로 삼켰다. 마른 보릿대를 적시는 울음소리를 우리는 밤새 엿들었다. 언니가 앞개울에서빨래방망이질을 할 때쯤, 엄마는 언니를 먼 친척 집에 식모살이 보냈다.
언니가 떠난 후 흐린 날이면
황소개구리 뒷다리 같은 근육질의 먹구름이
엄마의 여윈 몸을 휘감았다
그런 날은 전구마다 불을 켜도 온 집안이 캄캄하였다
팔푼이언니는 소박맞은 새댁처럼 세 번 쫓겨 왔다
세 번째 쫓겨 오던 날 언니는 엄마에게 악다구니를 썼다
“엄마는 식모살이 보내려고 나를 낳는가?”
그 찰나에
아, 정말 찰나였다
엄마의 심장을 야금야금 파먹던 황소개구리가
싸움에 꺾인 뿌사리처럼 슬금슬금 뒷걸음질치더니 홀연 사라졌다
엄마는 언니를 꼭 껴안고
“오냐, 내 새끼.” 한 마디만 했다
팔푼이언니는 공장에 다니면서
엄마에게 세탁기랑 김치냉장고를 24개월 할부로 사드렸다
엄마의 황소개구리는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문학청춘' 2013 봄호-
홍어의 시간
전숙
시간이 출렁일 때마다 아버지의 거세된 날개가 펄떡거린다
항아리에 따개비처럼 붙박여서
암각화로 기억된 시간이 아버지를 들려준다
아무도 길을 가리키지 않을 때
바다의 기관지였던 아버지의 날개는
포크레인처럼 바다의 고샅길, 에움길을 열었다
그물에 꿰인 아버지의 시간
급브레이크가 걸리고
아스콘 같던 길의 날개에는 스크래치의 상처가 선명하였다
상처는 심장이 짓무르도록 댓돌 위에 발 한 번 올려놓지 못했다
두엄 같은 마당쇠의 시간이
더 이상 썩지 않는 영원으로 바뀌기까지
그 모진 치욕에도
아버지는 자존심의 뼈대를 무너뜨리지 않았다
하늬바람처럼 자유로웠던 아버지는
삭아가는 돛으로 바다를 지탱하고
토굴에서 업보를 씻는 선승 같은
시간을 삭혀 백년 된 대나무밭처럼 필생의 꽃을 피웠다
이어달리기처럼
아버지의 날개가 내 갈비뼈에서 펄떡거린다
갈바람이 분다
저 서풍에 홍어연을 펄떡펄떡 날려야겠다.
-시산맥 2013 여름호-
냄새의 역사歷史
전숙
용산역에서 마지막 열차를 기다린다
눈동자는 텔레비전 화면에 빠져있는데
눈치 없는 후각세포가 어느 냄새의 역사를 파헤친다
대합실 세면장에서 고양이세수로 시치미 뗀 냄새가
양파껍질처럼 한 겹씩 벗겨진다
아마 세 번쯤의 겨울을 이 대합실에서 보냈을,
몇 번쯤 쫓겨났다가
생나무 연기처럼 꾸역꾸역 스며들었을
냄새의 역사들이 의자에 박혀있다
유유상종처럼 냄새도 닮은 무늬끼리 좋아하는지
교환하는 눈빛에 싸구려로션 같은 끈적함이 배어있다
아침샤워로 냄새를 감쪽같이 지우고 나온
냄새초년병들은 오래된 냄새를 피해 자리를 옮긴다
백화점에서는 ‘이제는 헤어져야 할 시간’ 이라고
하루치 냄새와의 이별을 재촉한다
백화점이 소등되고 한참 뜸을 들인 후
정처 없는 냄새들은 떠나라며
경고도 없이 모든 채널의 텔레비전이 죽어버린다
해진 등산복차림의 나이깨나 먹은 냄새들은
멸시로 쌓은 산봉우리 몇 개쯤은 가볍게 넘어왔다는 듯
한쪽 어깨가 기울어진 줄도 모르고
삼년치의 냄새를 메고 간다
집 밖의 시간에서는 단내가 난다
오래된 냄새일수록 땔감으로 쓰일 만큼 뜨거운 불이 들어있다.
눈꽃
전숙
차마고도의 나뭇가지마다 눈꽃송이 서럽다
말의 거친 호흡이 아랫가지에 얼어붙고
마방의 입김이 윗가지에 몸을 부려
말과 사람의 눈물꽃이 피어나고 있다
종이 된 눈물끼리 부딪히며 천상의 음악을 연주한다
손바닥에 운명을 쥐고 태어난다는 말이 있다
두루마리처럼 펼쳐진 이랑산 협곡의 손바닥에도 손금이 있다
하늘 아래 처음으로 새겨진 저 손금,
쥐고 태어난 숙명을 거스르는 칼날이 길을 그려 넣고 있다
내리꽂히는 협곡을 노래하듯 감아 오르고 있다
걸음걸음 생의 바닥이 쩍쩍 얼어붙어도
멈추지만 않으면 눈물은 꽃으로 피어난다
바라보는 가슴마다 탄성을 지르지만
저 눈꽃,
마방의 등짐이 뜨거운 눈물에 융해되고 있는 중이다
말의 멍에가 꽃으로 환생하고 있는 중이다
천상의 곡조로 윤회의 바퀴를 돌리고 있다.
-2013 '시에' 가을호-
건조증
전숙
보습이 대세입니다
현대판 김선달이 물에 돈을 먹이기 시작했습니다
물이 많이 들어간 화장품일수록 비싸답니다
꽃도 물기를 머금어야 아름답습니다
웃고 있는 것들은 모두 촉촉한 것들입니다
오랜 가뭄에 가슴이 바짝 타들어간 논바닥처럼
새하얀 분가루가 묻어날 것 같은
깡마른 돌멩이가 되어버린 고사목 앞에서
보습 빵빵한 살빛 고운 초록은
뒷걸음친 부끄러움으로 달빛 뒤로 숨습니다
누군가를 위해 흘린 땀방울과 눈물이
기름진 진기를 다 빨아먹어
강물 출렁이던 몸은 어느덧 사막이 되었습니다
아버지의 혈관에 천둥처럼 울리던 푸른 리듬은
아버지를 떠나고
아버지는 고사목처럼 고실라졌습니다
어떤 강물도 감히 건널 수 없는
저 경건한 건조증에
푸르게 출렁이는 어린 강들이 무릎을 꿇습니다.
고담주머니
전숙
사람은 죽으면 이야기꽃이 된단다
무덤이 봉그랑한* 이유는
달빛 같은 사연들로
고담주머니의 뱃구레가 불룩하기 때문이란다
울퉁불퉁한 생의 돌팍길에 폭삭 넘어져
길동이를 낳은 좀녀*는 이어도처럼 손짓하는
전복 한 마리에 마지막 숨을 놓았단다
등 한 번 두드려주지 않고 길을 삼키는 하니보름
벌떡벌떡 일어선 길의 수만큼 구멍이 뚫린
저 구멍쟁이 주머니들
돌미용한* 별을 향해 벼랑을 기어오르고
설운 달빛의 머리끄덩이를 잡아 흔들었단다
골갱이*로 도로갱이*의 가슴을 후비며
돌맹이 한 개씩 돌담에 얹을 때마다
고마독새*처럼 끊임없이 지저귀는
한숨과 땀과 눈물을 석장시켰단다
진흙탕에서 꽃대를 쏘아올린 연꽃처럼
그렇게 고담주머니들은
진흙탕의 설움을 말깡하게* 지우고
봉그랑한* 이야기꽃을 피우기 위해
자미성이 반짝이는 한여름 밤이면
매듭의 고를 은근슬쩍 풀어놓는단다.
*제주방언들
-'시와 산문' 2013 여름-
가방끈엄마
전숙
아빠별똥별이 까무룩 사라진 후
가방끈 짧은 우리 엄마는 화장품외판원이 되었다
사십 년 동안 발을 동동 구르던 엄마의 동동구루무는
가방끈 짧은 우리 엄마 혓바닥까지 둥글게 말아먹은
멋진 꼬부랑 이름의 링클크림이 되고
금의환향한 한자말 이름을 붙여
주름도 없애고 피부까지 바꾼다는 기능성으로 진화하는 동안
똘망거리던 별빛들도
화장품외판원 엄마가 부끄러운 사춘기 반항아별이 되었다가
꼬맹이별이 또 두 개의 꼬맹이별의 엄마가 되었다
‘동안’이라는 시간은 엄마에게도 똑같은 ‘동안’이어서
엄마의 어깨에는 새가 둥지를 틀듯이 가방끈이 집을 지었다
화장품 무게를 수십 년 지탱한
가방끈을 견딘 엄마의 어깨뼈는 가방끈의 넓이만큼 주저앉았다
안락하게 누울 수 있도록 홈이 파인
가방끈의 집 때문에 죽을 만큼의 무게에도 삶이 밀려나지 않았다는 엄마
야금야금 뼈를 갉아먹는 가난한 파도를
엄마는 손바닥만한 삼각형의 방패로 감당했다
가방끈이 짧아 스스로 가방끈이 된 엄마의 가슴엔
자식이라는 가방의 무게 때문에
해지고 늘어진 기나긴 동굴이 파였다
엄마의 동굴에 꼬맹이별이 들락거리면
별빛에 반짝이는 종유석 같은 아름다운 가방끈이 보였다.
즐거운 제물
전숙
고비의 유목민에게 제물을 바치는 일은
제물을 산 채로 놓아주는 일이다
사는 일이 천국 같은 에덴에서는
죄를 대속하기 위해 제물을 죽이고
사는 일이 지옥 같은 고비에서는
죄를 대속하기 위해 제물을 살린다
제물이 되어
자유롭게
고비로 돌아가는 흰 낙타 한마리
주인은 낙타에게
지금부터 너는 달빛처럼 별빛처럼 자유롭다며
마지막 인사를 하고
낙타는 쌍봉을 흔들며 고향 고비로 즐겁게 돌아간다
가을배추처럼 꽉꽉 채워가던 무거운 시간도
차가운 설원을 맨발로 걷다보면
얼다가 녹다가 그렇게 가벼워져서
향기만 남겨진 봄동의 계절이 올 것이다
봄이 오면
죽인 제물도
산 채로 놓아준 제물도
꽃으로 돌아오리라
어느 꽃이 나의 죄를 대속했을까?
-'시와 정신' 2013 가을호-
마늘을 위로하다
전숙
심산유곡에서 유기농으로 길렀다는 마늘을 택배로 받았다. 상자를 여니 씨알은 작아도 잘 여물었다. 온 하루를 물에 불렸다가 마늘을 까는데 심산에서 봉인된 두견이의 울음이 내 눈물샘에서 풀려나는지 샘 주변이 씰룩거리다가 눈물콧물이 하염없이 솟는다.
불현듯 삼대할머니의 전설이 내 등뼈의 고랑에서 콸콸 흘러내린다. 머슴과 붙어먹었다는 누명을 쓰고 시어머니에게 쫓겨났다는 삼대할머니는 과거에 급제한 삼대할아버지의 유가행렬을 보고 친정 마늘밭에서 손잡이 빠진 호미를 든 채 돌아가셨다.
흐린 날이면 우리 종갓집에는 두견이가 추녀에 날아들어 “아-니-에-요-” “억-울-해-요-” 네 음절로 섧게섧게 울었다는데 두견이의 울음소리를 듣고서야 삼대할아버지는 조강지처의 억울함을 알았다.
우리 삼대할머니두견이의 후손이 그 심산에 사는지, 두견이의 울음은 싱크대에도, 수도꼭지에도, 냉장고손잡이에도 여문 손끝처럼 야무지게 달라붙어 스치기만 해도 매운 설움이 내 눈물샘을 쥐어짰다. 삼대를 건너온 설움의 뿌리가 얼마나 매운지 나는 기어이 “할-머-니-이-, 할-머-니-이-” 네 음절로 두견이처럼 하늘을 향해 섧게섧게 울었다.
‘푸드득’ 두견이가 내 매운 뿌리를 물고 사라졌다.
‘모가지론’
전숙
‘모가지론’ 신청하러 왔는데요.
은행원의 얼굴에 햇살론 같은 햇살이 ‘쨍’하고 부신다
은행이 봄날처럼 환해진다
네, 고객님 ‘모기지론’ 말씀이십니까?
나는 괜스레 우쭐해져서
예. ‘모가지론’이요.
고객님, ‘모기지론’이랍니다.
허공에 물음표가 잔뜩 깔리자
은행원은 친절하게도 메모지에 ‘모기지론’이라고 쓴다
내 ‘날파리증’의 흑점이 하필이면
모기지론이라고 쓰인 메모지의 ‘기’자의 'ㅣ'에 가서 달라붙는다
나는 다시
예, ‘모가지론’이요. 하고 읽는다
은행원은 화려하게 포장된 ‘모가지론’ 전단지를 내민다
읽어보시고 고객님께 맞는 조건을 선택하시겠어요?
읽어 내려가는데 10년, 20년 분할상환, 이자후납 어쩌고 하는 게 꼭 소돔과 고모라의 화려한 성채 같다. 그 뒷골목 잘못 휘어 돌면 나이든 창녀의 가면 같은 웃음에 까무룩 녹아내릴 것만 같아서 나는 머리를 휘휘 흔들고, 심호흡을 한다. 목줄에 묶인 누렁이처럼 포박당한 혓바닥이 숨구멍을 덮는다. 나는 모가지를 부여잡고 헐떡거린다.
갑자기 은행 안에 시베리아 기단이 내려앉는다
에취, 줄재채기를 한바탕 쏟아놓고,
나는 은행원을 빤히 들여다보며
‘모가지론’ 맞구만요.
네, 고객님과 조건이 맞지 않으시군요.
봄햇살 같던 입술이 대문처럼 닫히는데
입춘대길이라고 씌어진 입춘첩이 ‘쩡’하고 얼어붙는다
환절기 독감바이러스가 은행을 오슬오슬 접수한다.
-'시와 사람' 2013가을호-
흡혈귀를 흉내 내다
전숙
피를 빨아먹는 일은 귀신들의 생업인 줄 알았다
불안정한 영혼들이
인간의 피가 그리워 흡혈귀가 된다는데
세 끼 밥에 새참까지 챙겨먹고 똥배까지 불룩한 나는
무엇이 불안하여 피를 그리워하는가
고로쇠나무의 혈액인 고로쇠물 한 컵을 달게 마시는 저녁
나는 박쥐가 되어
어느 이름 없는 들녘을 분탕질하는 꿈을 꾼다
저임금으로 혹사당하는 나무의
경동맥에 날카로운 송곳니를 박고
동상 걸린 손발로 겨우내 농사지은 선혈을 쭉쭉 빨아먹는다
생쥐처럼 나무의 노동을 야금야금 갉아먹으며
나는 새디즘의 희열을 느낀다
아무도 반성하지 않는 밤이 오면
어미를 잡아먹는 살모사의 세상이 된다
미처 닦지 못한 입시울의 핏방울에서
송곳니가 자라고 있다
내가 내 피를 빨아먹는 밤이 오고 있다.
-----'한국작가'2013---
아름다운 것만을 노래하랴
전숙
자본이 피운 꽃은 탐스럽게 아름답다
자본의 꽃을 탐욕스럽게 피우려고
생각이 있는 가지들을 가지치기한다
생각을 하면 풀꽃들을 돌아보느라
앞으로 달려 나갈 수 없기 때문이다
강철로 만든 전지가위로 생각의 싹을 솎아내는
정규직도 들여다보면 마지노선에서 줄타기하고 있다
자본주의 농장은 모든 것이 경제적이다
그곳에서는 높이가 중요하다
웃자라는데 거치적거리는 아래가지는
햇빛이 멀다고 감히 비명을 질러서는 안 된다
‘차별’이라는 단어의 의미를 뇌세포에서 지워야한다
시급 4,000원에도 눈물겨운데
오염된 강물의 붕어처럼
어느 날 갑자기 하얗게 배가 뒤집혀있다
억울한 날개라도 파닥거렸다가는 불이 꺼지고 출구는 봉쇄된다
절망하는 가지들에게 다시는
몹쓸 움이 올라오지 못하도록 최루탄이 쏟아진다
최루탄 파편에 스티로폼이 녹아내리고
노숙자의 뒤축 무너진 신발처럼 희망의 축들이 무너져내린다
낮은 가지마다 생목숨이 잘려나가자
까치발로 버티던 나무도 저승반점이 새까맣다
어찌 아름다운 것만을 노래하랴
희망이 뭉개진 상처들이
벌떼에 쏘인 것처럼 아프게 부어오르는데.
김치
전숙
나, 미운 엄마에게로 돌아간다
무지랭이 엄마
욕쟁이엄마 꼬짐보엄마
화장이라곤 오일장 보러갈 때
입술에 빨강립스틱 두 줄 긋는 것이 전부인 엄마
다가가면 오랜 땀에 어룽진 시큼한 냄새
도시락을 열다가 익숙한 냄새에 후다닥 덮어버린 엄마
아니다 아니다
이 맛이 아니다
아니다 아니다
이 냄새가 아니다
너무 만만해서 만만하지 않은 그 맛
너무 못나서 못나지 않은 그 냄새
엄마의 손맛
엄마의 냄새
모천으로 돌아가는 연어처럼 코를 벌름거리면
떠오르는 김치항아리에 그윽한 입맛이 고인다
속을 뒤집어보면 강물처럼 깊어지는 도톰한 사랑
비로소 철난 탕아처럼 나를 키운 모천의 그리움을 찾아
유혹하는 세상의 달콤한 맛을 거스르고
쏟아져 내리는 온갖 향기의 폭포를 뛰어 오른다
지화자, 바로 이 맛이야
얼쑤, 바로 이 냄새야
나는 추억의 알집을 주룩주룩 쏟는다.
-'전남시협'2013-
가을로 가는 승천보
전숙
승천보에 가면 만날 수 있으리라
푸른 마음엔 뭉게구름 하얗게 부풀어 오르는데
어서오라는 듯 갈바람이 가을의 초입을 정갈하게 쓸어두었다
연분홍 자주 하양으로 염색된
코스모스 손수건이 기다림처럼 나부낀다
다시는 젖지 않겠다고
달라붙는 물기를 툴툴 털고 뭍으로 올라선
억새들이 눈물꽃를 피우고 있다
지긋지긋한 상처가 꽃으로 피어나고 있다
떠나지 못하는 이유가 고봉밥 같은 저 다리 때문이라고
마음 둘 데 없는 저 구름 때문이라고
하롱하롱 물든 저 노을빛 때문이라고
개망초꽃 망설이며 고실라지는데
이제 막 심지를 돋운 초승달이 하늘 창에 내걸린다
어디쯤 오고 있니
기다리는 마음은 벌써 다리를 건너
코스모스군락을 헤치고 억새밭에 뒹군다
잡을 수도 놓칠 수도 없는
아픈 계절이 영산강처럼 흘러가고 있다
만난 것 같기도 하고 작별한 것 같기도 한
경계에서
자전거길이 시간의 바퀴를 굴리고 있다
나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돌이켜보면 나의 길은
너에게로 돌아가거나 너를 기다리는 도중이었다.
-'문장21' 2013겨울호--
'☆˚ 맑음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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