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성의 회복 = 언어의 자궁의 복원
-범대순 시집 『무등산』을 중심으로
전숙ss8297hanmail.net
말과 사물이 한 몸이던 언어의 자궁을 찾아서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창세기 1장 1절 말씀이다. ‘시가 본래의 언어’라고 하이데거가 설파하였듯이 불경죄를 각오하고 “태초에 시인이 언어를 창조하였다.”로 바꾸어본다. 야훼는 아담에게 에덴의 모든 물상에 이름을 붙이도록 하였다. 그런 의미에서 아담은 최초의 시인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아담이 언어를 창조했을 당시에는 말과 그 말이 지칭한 사물이 일치하였다. 세월이 지나면서 언어는 본래의 의미에서 멀어지고 말과 뜻이 따로 놀았다. 이른바 최초의 순수한 언어는 그 처녀성을 잃고 타락하고 만 것이다. 이에 양식 있는 철학자들은, 플라톤과 하이데거, 비트겐슈타인에 이르기까지 사물과 일치하는 창조 당시의 언어 본래의, 그 순수성의 회복을 꿈꾸게 되었다. “시의 언어는 언어가 망각한 본래의 모습과 힘을 언어에게 되돌려주려는 열망의 소산이다.”라고 하이데거는 지적한다.
무등산이 불이었을 때
이제 우리 시대에 언어의 본래의 의미를 복원하려는 한 시인을 만난다. 아담이 삼라만상에 이름을 붙여주던 천지창조 당시의 언어의 자궁을 복원하려는 한 시인의 의지는 무등을 천 번 이상 오르내렸다. 한 편의 시가 시인의 영혼을 통해서 몸내림을 받으려면 어떤 사물이나 사건이 수십, 수백, 수천의 시인과의 눈맞춤과 마음맞춤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범대순 시인은 말한다. “무등산 산행 1,100여회니 서석대 등정 160회니 하는 숫자는 어설픈 기록이지만 나에게 그것은 숫자가 아니라 스토리다.”라고.
그래서 시인에게 무등에로의 산행은 시인 스스로를 탐구하고 사물의 본질을 발견하고, 우주의 비밀에 놀라고, 시인으로서 숙성되어가는 과정이다. 그가 고집스럽게 무등 만을 오르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가장 민족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이다.”라는 괴테의 독법을 따르자면, 시인의 시구처럼 시인은 지금 독도를 가고 있는 중이고, 에베레스트를 오르고 있는 중이고, 알프스 최고봉 몽블랑 등정 중이다. 시집 첫머리에 밝힌 “시인의 말”의 제목 “잃어버린 무등산의 원시를 찾아서”를 “잃어버린 언어의 자궁을 찾아서”로 바꿔 잠시 임의 동행하면서 시집 속으로 여행을 떠나보고자 한다.
무등산이 불이었을 때
무등산은 시인이었다
너덜겅이 불로
살아있을 때
절벽과 돌기둥과
봉우리는 시인이었다
숨결이 하늘에 닿았을 때
먼 바다에 대륙을 일으키고
무등산이 화산이었을 때
그때 무등산은 시인이었다
큰 틀의 침묵이듯 지금은
다만 푸르게 오월이지만
가슴 깊은 곳에 숨은 불같이
어느 날 다시 불나기 시작하면
그때 다시 너덜겅이 불로 돌아가면
분노한 화산이여 다시 불로 일어서라
광기의 무등산이여 다만 시로 있어라
-「무등산이 불이었을 때」 전문-
‘시가 언어를 원래의 상태로 회복시킨다.’고 옥타비오 파스는 말한다. 무등산이 불이었을 때는 언어 본래의 의미를 가진 즉 사물과 언어가 일치하던 시기였다. 그 시기에는 모든 물상들이 다 시였다. 세월의 때가 끼어 언어의 타락이 시작되자 세상과 시인은 분노와 광기로 덮이기 시작한다. 시인의 바람은 간절해진다. 다시 불로 일어서서 언어의 자궁인 시로 돌아가기를 무등산에게, 시인 자신에게 命하고 있는 것이다. 그 명령을 수행하면서 시인의 영혼의 숲은 광인이 되어 까맣게 타서 야성의 숯이 되어 가고 있다. 그 속에 얼마나 뜨거운 불이 들어 있는지 한 시인이 또 한 시인을 노래한 것을 들어본다.
범대순 시인께 시 한 구절을 배우려고/신 새벽이 길고 긴 터널을 뒤척인다/
개밥바라기별을 지우며 환하게 동터오는 시의 햇귀/그처럼 이십년이 갔다/
시인의 해먹 위에서 산이 /보석 같은 시구가 인드라망처럼 반짝인다/별빛 스러지는 카오스를 낭떠러지 삼아/무등산에 오르는 엄청난 가난을 본다/홑적삼에 길 떠나는 나그네의 눈보라를 본다//석간수처럼 시인은 대낮에도 밤중에도 차갑게 깨어있다/영산강의 野生을 푸른 세간처럼 챙겨서 미친 달을 밝힌다/광기로 발원한 세월이 훠이훠이 걸어간다/무성한 시의 숲에서 샘물 한 줄기 같은 노래를 멈추지 못하는/목마른 자여, 저 시퍼런 강물의 몸을 뗏목처럼 밀고 가라/광인의 봄날이 와서 사람의 한 바퀴가 움틀 참인지/구름의 그 느린 꼬리를 잡으려고/백지 위에 집을 짓고 산을 업는다.
(김종, 「시인의 시간」 전문)
두 시인의 공통집합이 있다. 색으로는 하얀색의 색채요. 논리로는 가장 본질적이면서 가장 원초적인 자궁을 그리워한다는 점이다. 하얀색은 태초의 암흑을 깨우친 최초의 색이요, 야성의 색이다. 그것은 바로 「백지」 시로써 언어의 본성의 회복을 추구하고 ‘백치의 머리’를 화두로 한 미감의 본성을 찾아내려는 두 걸출한 천재들의 투시력이다.
아름답고 무서운 자색을 구하는 일
내가 무등산에 가는 것은
이미 캔버스를 벗어난 화가같이
저주 같은 광기로
태초의 야성을 행하는 일
환상과 현실이 어지럽게
피를 흘리며 공존하고 있음을 만나고
때로 맨발과 적막과 침묵이
원시 그대로의 동작에 취하고
어디서 왔는가 어디로 가는가
오늘 여기 나는 무엇인가
조숙한 소년의 화두철학같이
산이 싫어하는 질문을 던지면서
자연의 깊은 곳을 파헤치고 들어가
아름답고 무서운 자색을 구하는 일
-「혼자 가는 산」 전문-
자색은 시인의 시편들에서 자주 등장하는 색이다. 자색은 빨강과 파랑이 섞인 혼합색이다. 그러나 시인에게 자색은 아무래도 빨강 쪽이다. 하루를 아름답게 마감하는 황혼의 색이고, 원시의 불씨에서 일어난 활활 타는 뜨거운 불의 색이다. 그래서 자색은 태초의 야성이고 광인의 색이다.
시인이 “무등산에 가는 것”은 “캔버스를 벗어난 화가같이” 평범한 일상의 길을 벗어나 “저주 같은 광기로 태초의 야성을 향”하는 길을 걷는 것이다. 시인에게 광기와 야성은 동의어다. 광기는 매너리즘에 갇혀있는 세상을 깨우는 미친 기운이고 깨친 세상이 돌아가야 할 곳은 야성 즉 원시의 생명성이다. 그것은 태초의 야성인 언어의 자궁을 복원하고, 태초의 언어에게로 복귀하려는 화두의 궁구인 “아름답고 무서운 자색”인 ‘시’를 구하는 일인 것이다.
새인봉 오르는 길에 진달래꽃을 만나
새인봉에 물소리가 나는가 물었더니
이 가뭄에 바위산에 웬 물소리
꽃은 자기만 아는 목소리로
비가 올라나 하면서 하늘을 쳐다보았다
진달래꽃을 따라 산 너머 하늘을 쳐다보다가
갑자기 나도 꿩처럼 소리치고 싶어졌다
그리하여 산이 울리는 큰 소리로
그렇다 이년아 왜 아니냐
나는 새인봉에 미친놈이다
-「새인봉 광사狂士」전문-
미치광이풀이 있다. 시인이 좋아하는 자색꽃을 피우는 다년생 풀인데 뿌리에 독성이 있어 잘못 먹으면 미치광이가 된다 해서 그런 이름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이 텍스트를 읽으며 갑자기 미치광이풀을 생각했다. 산을 좋아하는 시인은 깊은 산골짜기 그늘에만 있다는 미치광이풀을 만나 그의 광기에 전염되었을까?
바벨탑이 세워지기 전의 일이다. 삼라만상이 소통되던 때의 이야기다. 모두가 미치면 정상이 미친 것이고 미친 것이 정상이 된다. 시인은 어쩌면 바벨탑이 세워지기 이전에서 시간이동을 해온 것일까? 모두가 미친 세상에 왔으니 정상인 시인이 미친 것이라고 착각하는 것이리라.
파스칼 키냐르는 『은밀한 생』에서 ‘예술이 되살리려고 하는 것은 언어 이전의 언어, 영혼이며 유일무이한 영혼이다.’라고 한다. 이제 시인은 영혼의 광기를 통해서 타락한 언어를 언어 이전의 언어, 본래의 언어로 복원시키려는 것이다.
파안대소
14개의 얼굴근육을 움직여야 파안대소가 된다. 그러나 진정한 파안대소는 얼굴만 웃는 웃음이 아니다. 650개의 우리 몸의 근육 중 251개의 근육이 웃을 때 움직인다. 이 251개의 근육이 한꺼번에 움직여야 우주가 웃는 파안대소가 된다. 시인은 연단에 설 때면 트레이드마크인 모자를 벗고 인사를 한다. 그리고 조크 한 마디를 한다. “내 머리를 보면 내가 왜 모자를 쓰는지 아시겠지요?”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시인의 조크에 간간이 웃음소리가 들렸었다. 언제부턴가 웃음소리가 사라졌다. 이제 무등을 닮아버린 ‘큰바위얼굴’이 된 시인의 민머리를 보고 누구도 함부로 웃을 수 없는 것이리라.
오 내일이 내일이고 내일이면서 내일이고 하늘이고 사상인 당신
당신들 속에서 같이 내가 자식 낳고 비비고 살면서 떠나지 않고
여기 이렇게 있다가 이제 가을날 같이 갈 날을 가고 있는 생애여
걸어 보지 못한 길 파안대소로 이제 그 야생을 마감하고자 한다
-「파안대소의 여진」부분-
‘단말마’라는 단어를 알 것이다. 말 그대로 숨이 끊어질 때의 마지막 고통이다. 우리는 죽음을 생각할 때 단말마를 생각한다. 그래서 모두 ‘죽을 일이 걱정’이라고 한다. 이 시어처럼 “파안대소”로 생을 마감한다면 누가 죽음을 두려워하랴. 그렇다. 언어 본래의 의미, 죽음을 표현하는 본래의 언어는 ‘파안대소’였으리라. 파안대소에 세월의 때가 누렇게 내려앉아 어느새 ‘단말마’로 타락해 버린 것이다. 시인의 말처럼 “나의 산행은 잃어버린 무등산의 원시를 찾아가는 고산고수苦山苦水의 길이고 자기의 영혼과 육체를 짊고 산을 오르는 짐꾼이고 세르파의 기록이기도하다. ...그리고 산행이 고행이고 중독이고 광기이기 때문에 그래서 산행인 것이라고 나는 믿고 있다.”
불타는 무등산을 맨발로 건너며 발바닥이 타는 고행을 견디고, 달빛자락도 까맣게 숨어버린 어린아이 걸음마 같은 야간산행에 비틀거리고, 무등산의 비와, 하늘과, 물과, 바람과, 나무와, 바위와, 구름과, 산과 함께 혼연일체가 되어 왕성하게 미쳐 돌아가고, 태초의 야성을 꿈꾸고, 헛소리의 명약을 구하고서야 시인은 비로소 언어에 쌓인 세월의 앙금을 씻어내고 본래의 순수한 언어인 파안대소를 찾아냈으리라.
졸시 한 편으로 서평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유년의 연둣빛시간으로부터 넌출넌출
줄기를 뻗어 시인의 눈길이 닿은 곳은 ‘너머’였으니
장미꽃을 너머 풀꽃에게로
화려함을 너머 가난에게로
유채색을 너머 백지에게로
사랑채를 너머 무등산에게로
중심을 너머 변죽에게로
고뇌를 너머 광인에게로
길을 너머 원시에게로
바람을 너머 고독에게로
안주를 너머 저항에게로
가면을 너머 야성에게로
멋을 너머 고통에게로
죽음을 너머 생명에게로
두 발은 땅에 머물렀으나
시인의 눈빛은 초인의 것이었으므로
이제 ‘큰바위얼굴’에 푸르디푸른 노을이 청청청청 이글거려
해오름에서 해넘이까지 거침없이 타오르는
백지의 햇살에 쌀바늘처럼 따끔따끔 찔리리라
세상의 후각세포를 미치도록 흔드는 미치광이풀의
미친 향기에 헛소리처럼 활활활활 미치리라
무등을 너머 무등을 울리는 파안대소로
시의 텃밭을 탯줄까지 갈아엎는 원시적 야성을
첫사랑처럼 이랑이랑 앓으리라.
(전숙 「초인의 눈빛으로-범대순시인을 노래함」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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