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나고 싶었습니다”
우리 시대의 참선비를 찾아서
-최승범 시인
대담: 최철훈(본지발행인)
전숙(시인)
古河 최승범시인은 1931년 남원 사매면 서도리에서 태어나 전북을 떠나 살아본 적이 없는 토종시인이자 학자다. 1954년 전북대(국문과)를 졸업한 뒤 이 대학교 대학원에서 석사와 박사 학위를 받았다. 1957년 전북대에서 가람 이병기 선생이 맡았던 '시조론'과 '수필론'을 물려받아 전임강사를 시작으로 강단에 섰다. 1958년 김동리 선생의 추천으로 '현대문학'에 시 3편을 발표하면서 등단했다. 1968년 시집 『후조의 노래』를 낸 이후 2013년 시집 『대나무에게』를 상재하기까지 시집 15권과, 『한국 고시조선』 『시조에 깃든 우리 얼』 『시조로 본 풍류 24경』 등 시조 관련 저서 5권을 발간하는 등 통산 60권이 넘는 저서를 펴냈다. 또한 최승범시인은 현대시조의 개척자다. 우리의 옛 시조가 충·효 등의 관념적 사유에 치중했다면 고하는 일상의 삶에서 우러나오는 생활시조를 개척했다. 우리 고유의 멋과 맛, 예(禮)와 얼 등의 전통 정신을 계승하는 일에 천착하면서 많은 시와 수필을 썼다.
전숙: 선생님, 안녕하셨는지요? 먼발치에서 귀동냥으로만 고명을 듣다가 이렇게 뵙게 되어 개인적으로도 큰 기쁨이지만 ‘문장21’에도 광영입니다. 모자만 갓으로 바꾸어 쓰시면 듣던 대로 청풍유수의 고매한 선비님이십니다. 외람됩니다만 이럴 때 명불허전이라고 하는 것 맞지요? 선생님께 궁금한 것이 너무 많습니다. 질문요지를 작성하고자 선생님의 생의 오솔길을 걸어보면서 선비의 그윽한 향기에 매료되었습니다. 양비론과 양시론을 넘나들며 눈치로 일관하는 미봉책의 눈치꾼들이 넘쳐나는 시대에, 우리 시대가 잃어가고 있는 것들, 그래서 더욱 목마르게 아쉬운 것들, 청빈과 검약과 사군자의 순수와 잘못을 호되게 꾸짖어주실 어른의 인품을 고루 갖춘 분이 바로 선생님임을 알았습니다. 정말 오래오래 저희 곁에서 든든한 나침반이 되어주시길 바라는 마음입니다. 선생님, 참으로 건강해 보이시는데 건강을 위해 특별히 노력하시는지요?
최승범: 4년 전쯤에 심장에 문제가 있어서 뇌수술까지 받았지요. 그때 병원감염으로 폐렴까지 앓게 되어 죽을병에 걸렸다고 소문까지 났어요. 다행히 기사회생을 해서 지금은 건강에 각별히 주의하고 있어요.
집과 고하문학관(향교길)을 왔다 갔다 하면서 운동 삼아 동문 네거리까지 2000보쯤 걸은 뒤 ‘3-2’번 버스를 타고 인후동 집까지 가요.
오며 가며 30분 정도씩 산책삼아 걷는 것으로 건강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최철훈: 선생님께서 시라는 숲으로 들어서게 된 동기나 계기는 무엇인지요? 스승이신 가람 이병기선생님이나 장인이신 신석정선생님께 특별하게 받은 시적 영향이 있으신가요?
최승범: 두 분은 내게 부모님 같은 분들이지요. 내가 시조에 심취하게 된 데는 중학교 때 선석렬 선생을 만나고서였어요. 독립운동으로 감옥에도 다녀온 적이 있는 선석렬 선생이 가르치는 1945년 가을 국어시간, 「태산이 높다 하되」라는 3행의 노래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어요. 이것이 시조와의 첫 만남이었지요. 듣는 그 순간 짧고도 정제된 그 시에 매료되었고 그 후 3장구를 암송해보는 것에 또한 재미를 붙였지요. 매일 한 수를 읽고 거기에 얽힌 이야기 같은 것을 생각해보고, 그걸 그날 일기 끝에다가 적었지요. 그렇게 외운 것이 한 천 수 되지 않느냐 생각해요. 한 천 수라는 게 무작정이 아닌 것이, 중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하였으니 한 3년 동안 읽었다고 생각해 봐요. 지금도 초장만 생각하거나 또 어디는 도망가거나 했어도 그때 암송한 시조들이 떠오르지요. 옛시조 속에는 그 시대의 상황, 나라의 상황이 작품 속에 들어가 있어서 역사적인 사실을 시조를 통해 다시 생각할 수가 있지요. 즉 시조 한 수를 읽고 그 시조에 대한 역사적 사실이나 인물을 알 수 있는 것은 물론 감동과 교훈, 식견까지를 가질 수 있었지요,
대학에서 가람 선생의 수업 『시조와 창작론』 강의를 듣게 되면서 시조에 대한 애착이 더해졌지요. 스스로 재주가 있는지 없는지 보자 하는 마음으로 시조를 몇 수 써서 스승께 가져가 보여 드렸지요. 그 과정에서 나는 시조의 호흡이 내 숨결에 맞아 떨어지는 것 같음을 느꼈지요.
은사님인, 가람 선생께서 서울대학에 계시다 6.25 때문에 전북으로 오셨는데, 생각해보면 나라의 비극이었고 엄청난 상처였지만 이 분이 여기에 와 있었기 때문에 나로서는 큰 스승을 만난 것이었지요. 나라는 비극적 상황인데, 내가 서울대학교 가서 공부할 처지도 아니고 시조라는 것도 알게 되고 문학을 알게 되었으니 역으로 나 개인에게는 행운이었지요. 스승의 강의를 본격적으로 듣고 책이 없으니까, 시조 책이 없던 시절 스승의 강의안을 빌려다가, 철필로 본문을 다 써서 프린트를 하여, 학생들한테도 그냥 주었고 공부도 하였지요. 『시조와 창작론』바로 이 책입니다. 이 책을 만드느라 글씨체가 변했어요. 그리고 석정 선생한테는 시론을 공부했지요. 면전에서는 칭찬을 하지 않지만 무슨 일이 있으면 사위한테 가서 물어보라고 술자리에서 자주 얘기하셨다고 해요. 내가 문단에 등단한 것도 석정 선생 추천을 받은 게 아니에요. 김동리 선생 추천으로 1958년 현대문학에 글이 나오면서 등단했지요. 석정선생은 자신이 심사위원인데 사위를 추천해선 안 된다는 생각을 갖고 계셨지요. 요즘으로 치면 상피원칙이지요
전숙: 선생님, 정말 귀한 책을 보았습니다. 글 쓰는 일이 작가에게는 눈물겨운 일인데요. 그 시절 공부하는 일 또한 정말 눈물겨웠군요. 가슴이 아려옵니다. 그토록 힘들게 걸어오신 시쓰기는 선생님의 삶에서 무엇이었는지요?
최승범: 시는 시집의 출판으로만 좌우할 건 아니지요. “비록 호화판일망정, 즉 알맹이가 없이, 그 자체가 허무하다면 그는 개똥을 싼 비단 보자기에 불과할 것이다.”라고 은사님은 말씀하셨지요. 오늘날 시를 쓰고 책을 내면서도 항시 조심되는 것입니다. 내가 하는 것이 개똥을 비단 보자기에 싼 것은 아닐까, 이거 내가 시집 한 권 냈는데 책이 된 거냐……. 나를 반성하지요. 결국, 공부란, 문학이란, 평생 하는 것인데 그것이 어느 경지에 이르렀느냐는 말로 못하고 후세 사람들이 평가를 하는 거고 자기로서는 열심히, 계속 할 수밖에 없는 거지요.
전숙: 선생님께서는 어떻게 사모님과 인연이 되어 당시에 하늘같은 신석정선생님의 사위가 되셨는지요?
최승범: 당시 김준영 선생이라고 계셨는데 석정 선생의 부안 집에 놀러가자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함께 갔는데 석정 선생이 아이들을 불러 인사를 시켰어요. 정원에서 술 한 잔씩 하고 놀다 다음날 떠나면서 뒤돌아보니 큰 딸이 정원에 서 있었고 시선이 마주쳤지요. 마주치자마자 둘 다 시선을 돌렸지만 묘한 감정이 있었던 모양이에요. 그 뒤 김 선생이 사귀어 보라고 했고 가람 선생도 좋다고 하셔서 사귀었지요. 아버지께서는 바닷가 쪽(부안)이라 내키지 않아 하셨지만 시인 집안의 딸이니 괜찮겠다며 승락하셔서 결혼하게 되었지요."
최철훈: 그렇게 인연이 되신 거군요. 아무튼 지금도 부러운 로맨스입니다. 시기별 혹은 시집별 사유의 흐름이나 시적 경향은 어떻게 변천해왔는지요?
최승범: 대학(교수)시절부터 문학정신을 풍류에서 찾아야 한다고 주장했어요. 우리나라 사람들은 한(恨)을 갖고 많이 이야기하지만 잘못된 생각이지요. 찌들어지고 슬픈 한만 이야기해서 뭐해요. 풍류가 흐름이고 정신이에요.
전숙: 선생님, 고하문학관은 한국은 물론 세계 모든 문인들의 부러움의 대상입니다. 고하문학관에 대해서 들려주시지요? 그리고 그동안 선생님이 이끌어 오신 「전북문학」은 향후 어떻게 하실 생각이신지요?
최승범: 1996년 정년퇴임한 뒤 장서를 어떻게 처리할까 고민하던 중 신용금고를 경영하던 중학교 동창이 공간을 마련해 줘 1997년 문예관의 둥지를 틀었지요. 그 뒤 전주시가 성심여고 남쪽 향교길의 2층짜리 동사무소를 리모델링한 건물을 제공해 2010년 현재의 공간으로 이전하고 내 호를 따서 고하문학관으로 명명했지요. 3만여 권을 웃도는 장서가 있습니다. '고하문학관'이라는 한글 현판은 송하진 전주시장이 직접 썼지요. 내 집필실이기도 하고 문인들의 사랑방과 강의실, 자료실로 쓰이고 있습니다.
특히 1969년 7월에 창간한 「전북문학」은 내게는 그 의미가 각별하지요. 내가 회장으로 있는 전북 문학동인회가 주축이 되어 펴낸 이 부정기문학지는 현재263호까지 나왔어요. 그러니까 나는 당시‘小雜誌 운동’을 생각한 거예요. 1966년, 일본에 2개월간 체류할 때, 기다가와 후유시코가 [시간]이라는 20쪽짜리 동인지를 백몇십 호나 낸 걸 봤어요. 또 50쪽 남짓한 구사노 신페이의 [역정]이라는 동인지가 몇백 호나 나오는 걸 보고 아, 우리도 발표의 장을 스스로 마련해야겠다. ‘바다 없는 갈매기’가 될 수는 없다, 스스로 바다를 만들자는 생각이었지요. 그때 만해도 [현대문학], [자유문학] 뿐이었어요. [문학예술]도 나오다 말고… 당시 문인협회 전북지부장을 맡으며 처음으로 시도해보았지요. 처음에 25명이 시작했어요. 내가 사비를 털고, 또 천 원씩 모으고 나중엔 오천 원, 그러다가 만원… 다들 차값 아껴가면서 했지요. 당시 문단인구를 2000여명으로 헤아렸는데, 전국적으로 이런 식의 문학지가 거의 없던 시절에 나온 것이고 「샘터」보다 더 나이 많은 잡지니 유서도 퍽 깊다고 할 수 있지요
계간지에서 격월간지로 내던 「전북문학」은 지금 부정기 간행으로 바뀌었어요. 책 표지의 그림도 모두 소장하고 있어서 문학관에 기증될 것입니다.
최철훈: 1958년 「현대문학」으로 등단하셨다고 말씀하셨는데요. 그때로부터 꼽아보자면 올해로 꼭 시력 55년이 된 선생님의 시의 화로에서 노릇하게 구워진 시론은 무엇인지요? 선생님께서 주장하시는 선비정신에 대해서도 들려주시지요.
최승범: 허허, 노릇하게 구워진 알맹이가 없으니 안타까울 뿐입니다. 붓을 놓기 전까지 계속 쓰고 생각하고를 계속할 밖에요.......
옛날 선비 방에는 반드시 고비란 게 있었어요. 받은 편지도 접어 넣고 자신의 두루마리, 시도 쓰면 넣어 두는 것인데, ‘고비’란 순 우리말입니다. 우리 집에는 고비가 있는데, 이곳에서는 이 서가가, 이 파일들이, 편의상 나의 고비입니다. 지금 183번째의 고비를 엮어가고 있지요. (문학관 1층 선생의 집필실은 자료도 많지만 선생이 평생 동안 주고받은 육필편지파일이 꼼꼼하게 정리되어 숫자로 이름을 받고 서가에 꽂혀 있다. 등단하던 청년시절부터 선배문인인 박목월, 김동리, 안수길, 허영자 시인 등과 내왕한 편지들이 천통이 넘는다고 하신다. 집필실 서가에서 고비 한 권을 꺼내 떨리는 손으로 한 장의 노릇한 종이를 꺼내 보이시는데 구상 선생의 서한이다. 최승범시인이 ‘선비’라고 불리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선비는 오늘의 말로 바꾸면 지성인이라 할 수 있지요. 식자인… 1970년대, 우리가 국가적으로 아주 어려운 때 교보문고에서 詩歌에 나타난 선비정신에 대해 집필해 달라고 했어요. 그래서 나온 책이 [시조에 깃든 우리 얼]이고 [시조 에쎄이]죠. 시조에는 志操와 義가 있고(정몽주의 「단심가」), 나라를 걱정하는 憂患意識이 있고(송순의 「늙었다 물러가자」), 분수를 지키는 삶이 있고(윤선도, 「산수간 바위 아래」) 禮의 가르침(이황의 「도산십이곡」)이 있어요. 이게 바로 선비정신이지요. 내가 모자라니까, 조석으로 생각하며 자기성찰과 반성으로 선비정신을 챙겨보는 겁니다. 그러나 저리 산다는 게 어려운 일이지요. 매천 황현이, ‘등 아래 책을 덮고 옛일을 생각하니, 인간세상에 식자인 되기 어렵다(秋燈掩卷懷千古 難作人間識字人)’는 절명구를 남기고 한일합방 직후에 목숨을 끊었잖습니까? 한마디로 나라를 먼저 생각해야 하고 재물을 멀리 해야 해요. 또 예(禮)를 알아야 하고 마땅히 지켜야 할 도(道)를 지켜야 하는 게 선비정신이지요.
전숙: 선생님이 강조하시는 선비정신과 선생님이 그렇게 사랑하시는 ‘풍류’의 정신이 현대인의 조급증으로 사라져가는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우리 민족의 큰 덕목인 ‘풍류’는 오늘의 시단에서 어떻게 받아들이고 이어가야 할까요?
최승범: 風流는 단순한 옛것이 아니에요. 우리 선인들이 챙겨온 것이 풍류지요. 시조와 한시에도 풍류가 있어요. 우리가 어려움을 당해서, 아주 간고한 생활 속에도 ‘맑은 바람의 흐름 같은 것’이 있다는 거지요. 淸風流水와 같은 것. 泉石膏肓이라, 자연에 묻혀 살고 싶다는 거지요. 무슨 일이든지 이권이 개입되면 풍류가 아닙니다. 퇴계 이황은 72번이나 사표를 내고 관직에서 물러났어요. 마음을 비우고… 그럴 수 있을 때, 우리 인생도 맑아질 수 있는 거지요. 풍류도 겨레의 정신적인 면에서 어느 한 갈래 이어져 온 것이지 않습니까. 친구의 집에 술이 있다는 말을 바람결에 듣고 찾아간 송강 정철의 글도 있지만 저 역시 지인의 집에 설중매가 피었다는 소식을 듣고 두어 번 찾아간 적도 있습니다. 언젠가는 아침식사 도중 벙긋 벌어 웃고 있는 난 앞에서 그야말로 밥 한 숟갈 넣고 꽃을 바라보고 또 한 숟갈 넣고 꽃을 보느라 찬이 없음도 탓하지 않았던 그런 낭만이 이제는 사라졌지요. 어쨌든 나는 바람을 안 타고 우리의 가락, 풍류를 지키려고 애를 쓰고 있지요. 옛 노인들이 한 말 중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중앙에서 내려오는 관료보다 터 잡고 사는 지방수령이 세고 그보다 아전들 세력이 더하고 아전보다 그 아래 서리들이 더 높고 기생들이 서리보다 센데 그보다 높은 것은 음악이라 하더라. 하지만 음악보다 음식이니라, 그 네 가지 이야기가 내려오고 있습니다. 그만큼 가락은 삶으로 직결되어있지요.
최철훈: 요즘 젊은 시인들이 쓰는 시(시조)에서 표출되는 서정성을 어떻게 보시는지요? 젊은 시인과 문단의 후배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가 있으시면 말씀해주셔요.
최승범: 다 잘 허고들 있어요. 보면, 놀라워요. 감성적인 면도 그렇고 생각하는 것도 모두 지적이고…, 모두 잘 허고 있더라고요. 감성, 지성, 잘 취해가지고…….”"일본 작가 하야시 마리코(58)가 한 말이 있어요. '은근하고 점잖은 고답적인 문장에 짜증나는 전후세대의 반격이 시작되고 있다'고요. 모두 잘 하고 있는데 굼뜬 사람이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전숙: 선생님의 저서들을 보면 얼마나 열심히 선생님의 학문과 시의 논밭을 경작했는지 알게 됩니다. 비지땀을 흘리며 고추를 따고 콩밭을 메고 깨를 베어내는 우리네 부모님처럼 땀 닦을 때나 푸른 하늘 한 번 쳐다보셨을 종종종 바쁘게 살아오신 삶이 눈에 보이는 듯 합니다. 우리 전통의 소리나 빛깔이나 음식이나 풍류나 도공이나 진정 대물려야 할 민족의 자산을 가려운데 긁듯이 망라해서 섭렵하셨는데요. 부럽기도 하고 존경스럽기도 하고 머리가 절로 숙여집니다. 그 중에서도 특히 애착이 가는 것은 무엇이며 우리가 절대로 잊지말아야할 우리의 것들을 몇 가지 짚어주시지요?
최승범: 지금 사라져가는 옛날의 빛깔이나 소리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대밭에 댓잎 사운대는 소리, 널뛰는 소리, 베 짜는 소리… 또 빛깔은 어떻고. 새 볏짚을 인 초가지붕 빛깔, 초가지붕의 박덩이 같은 빛깔, 개울물빛은 또 얼마나 고왔습니까… 음식도 그래요. 국적이 없는 요즘 음식들을 보며 옛것에 대한 향수에서 [풍미산책을] 썼지요. 이런 일들을 이리저리 했는데, 그것이 모두 결과적으로는 나 자신의 줏대를 세우는 문제고, 오늘을 사는 우리들의 마음 자세를 가다듬는 일이지요. 옛것에서도 받아들일 것은 무엇이고 개선할 것은 무엇인가를 생각하는 거지요. 전라감사들을 추적하는 것도 그분들이 행정을 어떻게 했는가, 문과 급제한 훌륭한 문인들인데 그분들을 본받아 오늘날 챙길 것이 무어냐는 거지요. [전라풍류기]를 쓰는 것도, 나이 70이 넘고 했으니까, 이 고장을 살아오면서 무슨 일이 있었나, 오늘날 그리운 건 무엇이고 또 오늘을 살면서 반성할 것은 무엇인가를 암암리에 던져보는 거지요.
최철훈: 시와 시조를 나누어 정형과 비정형의 편가르기 하는 걸 염려하시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시와 시조가 어떤 합의점에 도달할 수 있을까요?
최승범: 시조를 쓰거나 자유시를 쓰거나 다 같은 시인이지요. <시분과>다 <시조분과>다 구분을 해놓고 마치 독립국가나 된 것처럼 난리들인데… 옛날에 동리, 미당, 목월, 지용, 만해… 시하고 시조를 구분했습니까? 지금도 이근배, 김상옥 같은 분들이 넘나들면서 좋은 작품을 쓰고 있잖아요. 편가르기를 해서는 안됩니다. 민족시다 겨레시다 하면서 괜한 자기과시에 빠져서는 안돼요. 어느 시형을 택하거나 그것은 시인이 택할 문제고, 시로서의 평가는 독자에게 맡겨야지요. 작품이 문제죠, 좋은 시가 되도록 써야지… 정의채 신부의 말처럼 자존심을 세운다는 건, ‘남이 자기를 존경할 만큼 해 놓았을 때 가능’한 거지요. 1940년에 조남령이 [문장]에 「현대시조론」을 썼습니다. 거기 다 나오지요. 언제부터 시조가 자수율이냐는 말입니다. 초장에서 詩興이 일고 중장에서 그 물결을 이어서 종장에서 생각을 정리해서 맺는 것이지, 언제 자수 맞추기를 했냐는 겁니다. 사람의 감정을 다식판으로 찍어내듯 3, 4로 할 수 있나… 시조를 이렇게 구속스럽게 할 것이 아니지요. 이런 구속은 다 뒷사람들이 만들어낸 거지요. 옛날부터 평시조, 엇시조, 사설시조가 다 있었는데… 우리 선인들은 시조를 아주 자유스럽게 알았어요. 지금 전하는 실물(고시조)들이 있는데… 시조는 형식을 간조롬히 하는 整型詩에요, 우리나라에만 있는 ‘정형시’지요. 연첩시조는 자유시처럼 절장이나 3장, 양장을 섞어서 각각 하나의 연으로 구성하자는 거지요. 다만 3장으로 하는 것이 갑갑하니까 실험을 한 거지요. 지금은 단수로 돌아오는 추세죠. 이호우 선생은 시조의 매력은 단수에 있다고, 후기로 가면서는 거의 단수만 썼어요. 절장시조다 홑시조다, 겹시조다, 연첩시조다 하는 것들이 다 시조의 현대화를 위한 1960년대의 실험이었지요. 장순하 시인은 사설시조와 탈 서정을 강조했고, 또 윤금초 시인은 옴니버스라는 혼합연형시조를 쓰잖아요. 이런 모든 것들이 시조의 활로를 찾기 위한 운동이지요.
전숙: 선생님, 요즘 제2의 전성기를 구가하시는 것처럼 원기가 환하십니다. 근황은 어떠신지요?
최승범: 퇴직 전이나 이후나 생활이 변하지 않았고, 전혀 아쉬울 게 없어 축복받은 기분입니다. 「상촌집」에 늙어 세 가지 즐거움으로 ‘문을 닫고 들어앉아 읽고 싶은 책을 읽는 재미, 문 열고 밖에 나가 아름다운 자연산천을 소요하는 맛, 문 열고 찾아온 손님을 맞아 담소하는 기쁨’을 들었지요. 앞에 두 가지야 혼자서 누릴 수 있지만, 세 번째는 그리 되지 않잖습니까. 그래서 사람들이 많이 찾아주었으면 합니다. 고하문학관에 좀더 책을 충실하게 갖추고, 내 머리에 담긴 것도 사람들에게 다 털어주는 게 앞으로 해야 할 일이겠지요. 다시 문학 강좌도 시작했는데 문학사의 현장이지요. 격 주간으로 화요일 2-7時 까지 주로 수필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어요. 모두들 한 두 해 쌓은 인연이 아니기에 나의 수필 ‘난연기’를 보는 듯한 인연들이지요. 문학 안에서 맺은 인연 또한 얼마나 소중합니까? 선생과 제자가 따로 없고 서로 가르치고 배우는 모습일 수밖에 없지요.
최철훈: 선생님, 수십 년만의 찜통더위라는 염천에 그것도 휴일에 이렇게 반갑게 맞아주시고 좋은 말씀 들려주셔서 고맙습니다. 후학들에게 가슴에 박히는 소중한 자료가 될 것입니다. 건강 잘 보살피셔서 백수연에 뵙기를 앙망하옵니다.
(정리: 전숙, 사진촬영: 최철훈)
홍시
늙은 감나무 쳐다보며
지어미가 이르는 말
- 야속도 하지
단 두 개 홍시라니.
뒷짐 진
지아빈 하늘 바라다
- 나무 위해 뭘 했는데.
대나무에게
설청의 눈부신 아침
너를 바라본다
너를 바라본다
따로 날이 있으랴
사철을
바라보아도
너로 설 수
없는 것을
설청의 이 아침에
너를 다시 바라본다
개운히 스미는 빛이여
성글어 맑은 소리여
빼어난
밋밋한 마디여
부추겨다오
나를 나를
雪晴
눈오다 활짝 든 休日을
자리에 든 채
唐.宋.古調
눈에 드는
象
.
形
.
文
.
字.
이윽히
깊어 가는 밤
벽시곈
열 번도 더 운다.
책 놓고
눈 옮기자
文珠蘭 싱그런 이파리
조용히 밀려드는
저 푸른 숨소리
장지문
餘韻 머금은
한 폭 그림
白.樂.天.
개나리꽃
1
햇살 올올이 엮어 낸 노란색 음표들이
담 너머로 띄우는 출렁이는 월츠곡
산 둘레 이내로 베일을 쓴 채 아, 푸르른 새 율궁
2
어린 봄 눈 비비며 기지갤 켜는 언덕
찬찬한 마음씨로 바지런한 손끝이 피운
노오란 꽃 줄기마다가 길어내는 맑은 노래...
반려伴侶
밤새의 눈이 멎고
장지 환한 아침나절
손깍지 벼개 삼아
천정을 바라다가
떠오른
- 반려
낱말을 새삼스레
짚어보네
짝 반 짝 려 짝을 이뤄
반려랬는데
한생 얼마동안
둥글고 구순한 반려일까
해질녘
깊은 산 외로움을
읊조린 이
누구 누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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