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대순 시인의 대표작 읽기
1. 들어가며
거의 평생 동안 시를 쓰고, 시와 시론을 가르쳐온 ‘범대순(1930 ~ )’ 원로시인의 작품세계를 살펴보는 것은 매우 유익한 일이다. 그는 현재까지 12종의 시집을 펴냈고, 그 외에 연구서, 문학평론집, 수필집 등 다양한 글쓰기를 해온 영문학자이면서 문학평론가이며, 수필가이기도 하다. 그가 집필한 운문과 산문의 양이 워낙 많기 때문에 그의 시세계를 연구 분석하여 이해하는 것조차 쉽지만은 않다. 물론, 한 시인의 작품세계를 온전히 이해하려면, 그의 시 작품으로부터 시론 등 가능한 한 모든 관련 자료를 수집 분석 종합하는 과정을 거쳐서 소위 ‘작가론’을 써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일정한 주기로 책을 펴내야 하는 정기간행물에서 그에 대한 작가론을 소개하는 것은 지면의 제한이나 시간적인 제약 등으로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부득이 시인 스스로가 선정한 대표작 시 20편을 요망했었고, 우리는 그것을 통해서나마 시인의 시세계 단면을 엿보고자 하는 것이다. 사실, 시인 스스로가 선정한 작품 20편이란, 마치 무의 가운데 토막과도 같은 것으로서 그 무의 모든 것을 판단케 하는 척도가 될 수 있다. 굳이, 그 무의 성장과정의 제반 환경조건과 그 결과인 무의 전체를 일일이 다 확인하지 않아도 그것으로써 어느 정도는 감별해 낼 수 있다는 생각에서다.
그 무의 가운데 토막을 제대로 감별하기 위해서 그에 대해 이미 발표된 연구서나 평가서 등을 참고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오히려 그것들을 도외시하는 것이, 어떤 면에서는 바람직하다는 생각도 든다. 내가 직접 먹어 맛보기도 전에 먼저 맛을 본 남의 평을 귀담아 들으면 나 자신도 모르게 그의 영향을 직간접으로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소위, 어떤 편견이나 고정관념에 사로잡혀서 마땅히 볼 것을 제대로 보지 못함을 경계하는 것이 옳다는 뜻이다. 특히, 범대순 원로시인의 경우, 김규성・성찬경・김우창・이승하・황현산・임환모・윤삼하・김준태・최하림・임 보 등 대학 강단에서 문학을 가르쳤던 여러 학자들의 평문을 이미 받았기 때문에 시인 자선 대표작 시 20편만을 있는 그대로 감상해 보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라 여겨진다.
2. 혼란스러움의 정체
범대순 원로시인의 자선 대표작 20편을 여러 차례 읽었어도 쉬이 이해되지 않는 작품들이 있다. 시에 대한 나의 고정관념 탓일까? 아니면, 시 문장 해독상의 기술 부족일까? 나는 글쓰기를 멈춘 채 다시금 천천히 읽어보았다. 그러나 여전히 해독되지 않는, 아니, 해독되지 않는다기보다 혼란스러움이 가중된다. 내가 느끼는 이 혼란스러움의 정체는 과연 무엇일까?
첫째, 현행 한글맞춤법에 맞지 않는 어휘와 방언이 적지 않게 사용되고 있다는 점이다. 이에 대한 판단의 증거는 각 시편마다 그 밑으로 달아 놓은 주석들이 말해주지만 굳이 예를 들자면, 불도오자 ․ 다이나마이트 ․ 아까시아 ․ 바위돌 ․ 크다란 ․ 아슬히 ․ 가직히 ․ 수구린 ․ 돋고하는(?) 등의 시어(詩語)들이다.
둘째, 우리의 어법(語法)이 아닌, 영어문장이 직역된 듯한 그것이 적지 않아 생경하게 느껴진다는 점이다. 혹자에게는 이점이 오히려 새롭고 신선하다고 여길 수 있는 요소가 되겠지만, 분명한 사실은 우리에게 익숙해져 있는 우리 어법이 아니라는 사실이고, 어순(語順)이 다른 외국어를 오래 사용하고 번역하는 사람들에게서 자연스레 익숙해진, ‘옮아온’ 어법이라는 사실이다. 굳이, 그 적절한 예를 들자면, “다이나마이트 폭발의 5월 아침은 快晴/아까시아 꽃 香氣 그 微風의 언덕 아래(작품「불도오자」1,2행)”이다.
셋째, ‘시’라고 하는 그릇의 모양새가 균일하지 않고 다양(?)하다는 사실이다. 그 그릇에 담기는 내용물이야 당연히 모두 다를 수 있지만 그릇의 모양새가 다름은 시에 대한 시인의 생각 변화에 따른 창조적인 작업의 결과이기 때문에, 다시 말해, 시라는 상품을 찍어내는 틀, 곧 주형(鑄型)이 바뀌는 것이나 다를 바 없기 때문에 그리 간단한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주형이라고 하는 것은 시인들에게 공유되어지는 성격이 강한데 이는 새로운 그것을 만들어내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범대순 원로시인의 작품 속에는 공유되어지는 주형의 변종(變種)들이 즐겨 사용되고 있다. 곧, 행(行)과 연(聯) 가름은 되어 있으나 자연스레 읽어나가는 과정에서 그 호흡의 길이가 보통의 격을 크게 깨드리고 있다. 그래서 ‘멈추고, 쉬어가는’ 자리가 부자연스러울 때가 많다. 작품 「불도오자」나 「촛불」이나 「사회주의」등이 그 적절한 예이다. 그런가하면, 작품 「새」,「夕陽」,「장작불」등이나 일련번호가 매겨진 작품들처럼 한 개의 명사(名詞) 내지는 한 개의 음보(音步)가 한 행이 되되 두 행이 한 연(聯)이 되는 틀도 있다. 물론, 이런 틀을 만들어 사용할 때에는 나름의 이유와 목적이 있게 마련이지만 문제는 그것의 ‘실효’와 ‘공감’에 있다. 그런데 우리는 대체로 그 실효와 공감의 정도를 객관적으로 따지려는 쪽보다는 시인의 의해서 일방적으로 설명되는 그것의 의미에 대해서만 이야기 하는 경향이 없지 않다.
넷째, 불과 20편 밖에 안 되지만 어디선가 읽어본 적이 있는 시 같다는 생각이 드는 사실이다. 물론, 얼마든지 그럴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시작(詩作)에서 모방은 그 첫 걸음이자 과정임에 틀림없기 때문이다. 수많은 시인들은 미당의 작품 「국화 옆에서」를 직간접으로, 혹은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흉내 내어 유사한 작품들을 양산해 놓는데, 그것들은 다 미당 시 밑으로 붙는 아류에 지나지 않는다. 엄밀한 의미에서, 세상에 나온 일이 없는, 아주 새로운 문장을 짓고, 새로운 내용의, 새로운 형식의 작품을 창작하는 것이 진정한 문학인이라고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동방문학 2009년 12월호(통권 제47호)에 소개된 범대순 원로시인의 작품 「국화꽃이 피는데」와 「가을이 가을인 것은」이라는 작품이 미당의 「국화 옆에서」와 오규원 혹은 천상병 시인의 어떤 작품을 떠올리게 한다. 물론, 전자는 내용상 유사성이 있고, 후자는 어법상의 유사성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작품「고향에 가서 엿판이나 질거나」나 「夕陽」등도 다른 시인들의 작품을 연상시키고 있다. 물론, 누가 영향을 주고받았는지에 대해서는 창작과 발표 시기를 따져 보아야만 할 것이다.
다섯째, 사람은 분명 한국 사람이나 그의 정서(情緖)는 한국 사람의 것이 아닌, 이질성(異質性)이 다분하다는 사실이다. 이는 시인이 영문학을 전공하고 대학에서 그것을 가르쳐 왔기 때문에 자연스레 생긴 것으로 보인다. 공사장에서 움직이는 불도저가 투우장으로 입장하는 황소로 빗대어지는(작품「불도오자」) 것도, 자신의 정체성이 “나는 디오니소스의 거시기다(작품「나는 디오니소스의 거시기다」.)”라고 되풀이하여 강조되는 것도, ‘새해 아침의 지구가 스카레트나 황금마차의 미소년 등으로 빗대어지는 것들이 그 적절한 예라 할 수 있다.
3. 대표작을 통해서 읽을 수 있는 시세계의 특징들
1) 중심소재 영역 확대와 표현의 작위성
‘삽’나 ‘소’ 대신에 ‘불도저’가, ‘대지’나 ‘바다’ 대신에 ‘지구’가 시 작품의 중심소재로 선택되어 묘사되고 노래로 불러지는 것은 분명 인지(人知) 발달과 환경변화로 인한 시적 관심의 변화를 의미한다. 동시에 시계(視界)의 변화이자 언어감각의 변화이기도 하다. 이런 변화를 두고 한 때 우리는 당혹스러워하면서 ‘모더니즘’이라고 그 의미를 부여해 오기도 했었다. 그 의미를 어떻게 부여하든 중요한 것은, 사람 자체가 변하면 관심이나 욕구, 사고방식이나 행동양식 등 가치관 등이 변화하기 때문에 시적 표현의 대상이 바뀌고 그 표현법이, 다시 말해 언어감각이 바뀌게 마련이라는 사실이다. 게다가, 인간의 욕구충족 활동은 삶의 현장인 환경을 바꾸어 놓기도 하는데, 그 변화된 환경 자체가 인간변화를 부추긴다는 사실이다.
그 인지발달과 환경변화의 상호작용이라는 자연스런 흐름 속에서 시의 중심소재가 바뀌고, 그 표현법이 바뀌는 것은 거부할 수 없는 현상이다. 논쟁이 된다면 그 자연스런 흐름을 먼저 제대로 읽는 일이고, 그 다음이 작품을 놓고서 ‘과연, 자연스런 흐름의 산물이냐, 아니냐?’를 판단하는 일일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대개 ‘흉내 내기’에 급급했다면 나의 그릇된, 성급한 판단일까. 물론, 흉내 내는 일조차 앞서가는[앞서 변화한] 사람들의 작품을 읽어야 가능하지만, 어쨌든, 나의 개인적 판단으로는 변화된 환경 속에서 살아가는 변화된 인간에게서 자연스레 선택된 소재도 아니고, 자연스레 표출된 표현법도 아니라는 판단이 드는 게 사실이다. 간단히 말하여, ‘불도저’나 ‘공장의 굴뚝’이나 ‘컴퓨터’나 ‘고층빌딩’을 노래할 수 없는 것은 분명 아니다. 그것들이 우리 삶의 현장 속에 가깝게 있기 때문에 노래 불러지는 것은 오히려 당연한 일이다. 문제는 ‘어떻게 묘사되고 표현되느냐?’일 것이다.
다이나마이트 폭발의 숲으로 하여 하늘은 환희가 자욱한데/내 오래도록 너를 사랑하여 이렇게 서서 있음은,/ 어느 화사한 마을 너와 더불어 찬란한 화원/찔려서 또 기쁜 薔薇의 茂盛을 꿈꾸고 있음이여. -작품 「불도오자」의 끝 연
작품 「불도오자」의 끝 연이다. 이 4행의 의미인 즉 ①하늘은 환희가 자욱하다 ②내가 너를 사랑하여 오래토록 서 있다 ③너와 더불어 찬란한 화원의 장미의 무성함을 꿈꾸고 있다 등의 판단을 포함한다. 여기서 ‘너’란 아마도 작품의 중심소재인 ‘불도저’가 아니라 ‘오월’인 것 같다. 그리고 하늘에 환희가 자욱한 것은 다이너마이트가 폭발하는 숲이 있기 때문이고, 장미의 무성함을 꿈꾸는 것은 장미가시에 찔려서 기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어느 것 하나도 쉬이 동감해 주기 어려운 정서다. 한 마디로 말해서, 작위적(作爲的)인 표현이 많기 때문이다. ‘환희가 자욱하다’는 표현의 어색함도 작위적이고, ‘너를 사랑하여’와 ‘너와 더불어’에서 ‘너’가 무엇[누구]인지 모호하다는 것도 작위적인 표현이다. 게다가, ‘찔려서 또 기쁜’이라는 역설도 작위적인 표현으로 느껴진다. 이것들이 다 표현자의 진실한 심성에서 나온 것일까? 아니면 그것과 무관하게 표현을 위한 표현을 한 탓일까? 범대순 원로시인의 표현의 작위성은, ‘불도오자’ 같은 생경한 물질적 기구나 기계를 노래할 때에만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촛불’이라는 중심소재를 노래한 작품「촛불」에서도 동일하다. (그에 대한 분석은 생략한다.)
그러나 시사(詩史)적으로 볼 때에 작품의 소재 영역을 분명히 확대시켰고, 그것들을 바라보는 시각과 시선에서 나오는 언어표현의 주관성이 중시되어, 결과적으로 현대시의 다양성과 난해성에 일조했다는 생각이 든다.
2) 자기 삶 자기 인생에 대한 통찰
시인이 어떤 대상을 작품의 중심소재로 선택하여 시로 쓰든 그것에 의미를 부여하게 마련인데, 그 대상에 대한 객관적 의미를 구하기 위해서 시를 쓰지는 않는다. 그것은 과학에서나 할 일이고, 시에서는 그것을 통한 시인 자신의 감정 생각 의식 등을 투사시켜 최소한의 객관성에 최대한의 주관성을 표현한다. 따라서 시인이 무엇을 노래하든 그것은 결국 시인 자신을 노출시키는 일이요, 드러내는 일이다. 다만, 그 정도와 방법이 조금씩 다를 뿐이다.
시작(詩作)의 이런 본질적인 이유 때문일까, 아무리 변화되어 버린 환경을 노래하고 싶고, 새로운 그 무엇을 노래한다 하여도 결국은 시인 자신에게로 시선을 돌릴 수밖에 없다. 작품 속 모든 소재들은 한낱 시인 자신의 관심과 감정과 생각을 드러내는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 범대순 원로시인의 대표작 안에서도, 시의 틀 곧 형식은 다양하지만, 궁극적으로 추구함 곧 작품의 주제는 인생이요 그것을 이루는 요소들이다. 예컨대, 사상적 이념으로서 사회주의 추구냐 여자를 선택하여 함께 사는 일이냐를 갈등 속에서 내려야 하는 결단이나(작품「사회주의」), 촛불의 타들어감과 꺼짐을 통해서 인간의 생사(生死)를 연관시키는 것이나(작품「촛불」), 사랑하는 이에게서 아이를 낳아 얻게 되었지만 그 아이는 땅이 양육하고 땅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을 하는 것(작품「나의 秘敎」)이나, 옛 고향으로 돌아가서 순박하게 살고 싶다는 추억이나 그리움을 노래하는 것(작품 「고향에 가서 엿판이나 질거나」, 「남향」) 등이 다 그런 류의 작품들이다.
3) 실험정신
시작(詩作)에서 실험이란 형식과 내용 두 측면에서 감행될 수 있다. 범대순 원로시인의 경우는, 양쪽에 다 있는데, 형식적인 면에서 실험은「새」「夕陽」「장작불」「시24」「시111」「破顔大笑」등 일련의 작품들에서 확인할 수 있고, 내용적인 측면에서 그것은「나는 디오니소스의 거시기氣다」「나이아가라 폭포」등의 작품에서 각각 확인할 수 있다.
형식의 실험이란, 시인이 말하고 싶은 내용을 풀어내지 아니하고 자연적 현상이나 그 구성물들 간의 관계를 지어보임으로써 대신하는 방식이다. 예컨대, 새가 우는 것과 해가 돋는 것과를 관련시켜 “새가 울자 해가 떴다”라든가, “새도 해도 바쁜 하루”라고 함으로써 자신의 판단[인식세계]를 드러내 놓고 있는 경우이다. 그리고 석양을 드러내 놓기 위해서 유관한 명사 곧, 석양을 직간접으로 떠올리게 하는 ’빨간 모자‘나 ’紫色‘ 등의 낱말을 ’배열‘해 놓는 방식을 취하기도 한다. 물론, 이런 형식 실험의 성패 여부는, 결국 새롭게 짓는 대상들 간의 ’관계‘와 그 ’배열‘이 독자들에게 전해주어야 하는 공감(共感)의 정도에 달려 있다.
생각건대, 하늘과 땅, 그리고 그 사이에서 일어나는 온갖 자연현상들을 보아왔지만 보지 못하고, 느끼지 못하고, 생각지 못한 것들에 대한 일종의 눈뜸이며, 그것들에 대한 각별한 의미부여 방식으로 이런 간결한 표현형식이 실험되지 않았나 싶다. 물론, 여기에는 ‘순간순간 일어나는’ 감정보다 ‘내려다보는’ 인생을 노래하는 여유가 생기고, 눈앞에 펼쳐져 있는 생소한 것들보다 나의 삶에 근원적으로 영향을 주는 대자연의 현상에 눈과 귀를 기울일 수 있는 계기의 도래에 그 배경이 있지 않을까 싶다. 마치, 젊었을 때야 늘 자신의 감정이나 생각을 앞세우는 경향이 다분하여 한 편의 시에서도 말을 많이 하게 되지만 나이를 먹으면서 그 장황한 말들이 다 불필요하다는 생각이 들게 마련이고, 그럼으로써 자연히 말수가 적어지고, 그 대신에 자신의 말[시인이 깨달은 진리 내지는 지혜 등]을 담고 있는 특정의 상황이나 현상을 그려냄으로써 간접적으로 그것을 표현하는 경향을 띠게 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사실, 이 같은 현상은 ‘실험’이라기보다는 시작(詩作)의 개인사적인 자연스런 변화라고 말하는 편이 더 옳을 지도 모른다. 흔히, 원로시인들에게서 곧잘 나타나는 현상으로 4행시, 2행시, 1행시 등의 의미를 주장하면서 아포리즘 같은 짧은 문장으로 시를 쓰는 경향이 말해준다고 본다.
내용상의 실험이란, 작품 「나는 디오니소스의 거시기氣다」「나이아가라 폭포」등에서 보는 것처럼, 우리들이 통상적으로 갖는 관념을 크게 깨어버리거나, 살면서 굳어진, 익숙해진 어떤 정형(定型)들을 거부하고 싶고, 깨뜨려 버리고 싶은 욕구의 발산적 표현으로써 심리적 충격을 가하는, 일체의 사유 편린(片鱗)들에서 확인이 가능하다. 전자의 경우로는, 나이아가라 폭포의 웅장함을 아주 왜소하게 표현하고, 그 폭포가 주는 일반적 이미지를 정반대로 드러내면서 약간의 장난기를 드러내놓는 태도를 들 수 있다. 그리고 후자의 경우로는, “털이 늘 파안대소로 일어서는“, “부글부글 용소같이 속이 미친“, ”물구나무로 히말라야를 올라가는“, ”절대를 위하여 절대로 존재하는 절대의 거시기“ 등 일련의 표현들이 그 단적인 예라 할 수 있다.
형식과 내용 면에서 실험정신이 반영된 시작(詩作)이 나름대로의 이론적인 이유와 목적이 전제되었겠지만 그 자체가 앞에서 말한 ‘작위성’과 맥을 같이하는 것 같다.
4) 결국 고향으로 돌아가는 시인
누구든지 시에 대하여 여러 가지 의미를 부여할 수는 있다. 부여하는 그 의미에 따라서 시의 모양새가 바뀌고 시의 색깔이 바뀌게 마련이다. 그것의 변천사가 곧 시사(詩史)라고도 할 수 있다.
범대순 원로시인의 경우, 현재에서 과거로, 부분에서 전체로 시선이 옮겨지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곧, 인지발달과 환경변화로 인해서 생활주변에서 쉽게 볼 수 있는 각종 기계나 물질문명의 이기들에 관심을 갖다가 자연현상이나 고향으로 그것의 중심축이 옮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순간순간의 감정이나 사고보다도 나의 인생 나의 삶을 내려다보는 위치에 서서 그것들을 바라보고 있다. 온갖 수식어들이 배제되고 명사들이 중심이 되어 있는 그대로의 세계를 드러내되 그것에 덧칠을 피하고 있다. 이런 변화는 시에 부여하는 의미의 변화로 받아들여도 좋을 성싶다. 시는 진실 그 자체이고, 시는 내 인생이라는 본래의 고향으로 돌아감인 셈이다.
시 인의 작품 전체를 살펴보아야 개인의 시적 변천사를 정확히 말할 수 있는 것이지만, 자선 대표작을 통해서 보면, 비교적 다양한 변화를 시도했지만 결국은 아주 단순한 시의 고향으로 돌아가고 있다. 시는 표현을 위한 표현이 아니라 내 삶 내 인생이 녹아드는, 내가 안주할 수 있는 곳으로 말이다. 그렇기에 시인은 ‘대자연’이라는 품안으로 들어가 자신의 눈과 귀를 기울이며 인생의 ‘기승전결’과 대자연의 그것을 응시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문제는 ‘시인의 그것이 세상 사람들과 얼마나 공유되어지느냐?’ 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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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대순 시인님의 자선 대표작 20편]
불도오자
다이나마이트 폭발의 5월 아침은 快晴
아까시아 꽃 香氣 그 微風의 언덕 아래
황소 한 마리 入場式이 鬪牛士보다 오만하다.
처음에는 女王처럼 조심스레 주위를 살피다가
스스로 울린 청명한 나팔에 氣球는 비둘기
꼬리 쳐들고 뿔을 세우면 洪水처럼 신음이 밀려 이윽고 바위돌 뚝이 무너지고
그것은 희열
사뭇 미친 瀑布 같은 것
짐승 소리 지르며 목이고 가슴이고 물려 뜯긴 新婦의 남쪽 그 뜨거운 나라 사내의 이빨 같은 것.
그리하여 슬그머니 두어 발 물러서며
뿔을 고쳐 세움은
또 적이 스스로 무너짐을 기다리는 知慧의 자세이라.
波濤 같은 것이여
바다 아득한 바위 산 휩쓸고 부서지고 또 부서지며 봄 가을 여름 내내 波濤 같은 것이여.
BULLDOZER.
正午되어사 한판 호탕이 웃으며 멈춰선 휴식 속에
진정 검은 대륙의 그 발목은 화롯불처럼 더우리라.
다이나마이트 폭발의 숲으로 하여 하늘은 환희가 자욱한데
내 오래도록 너를 사랑하여 이렇게 서서 있음은,
어느 화사한 마을 너와 더불어 찬란한 화원
찔려서 또 기쁜 薔薇의 茂盛을 꿈꾸고 있음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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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도오자 : 불도저’의 誤記 (현행 한글맞춤법 기준. 이하 동일)
*다아나마이트 : ‘다이너마이트’의 誤記
*아까시아 : ‘아카시아’의 誤記
*바위돌 : ‘바윗돌’의 誤記
촛불
새벽에 기대어 홀로 촛불을 지키며 앉아 있는 것은
누군가 지금 멀리 발갛게 타올라 빛을 내며 그늘을 짓고
그리하여 크다란 돌의 체온을 생각하는 것인가.
열두 폭 메아리로 먼 山寺의 鐘
풀벌레 나직이 울며 부엉이 아슬히 허나 가직히 나의 마음에 波紋이 일고,
어느 고요한 湖水 白鷺처럼 여기 수구린 긴 모가지
촛불에 다가서며 그 높이를 고쳐보고 또 돋고하는 마음이란,
꽃이 지고 별이 지는 슬픈 가을 한 바다위로
멀리 제비 떼를 보내는 손의 하얀 날개여.
아아 촛불
피우지 못한 젊음의 서러운 가슴에 사는 것이여.
한 번도 쥐질 못했던 횃불로 서서 한 번은 落葉처럼 사룰 수 있을 生을.
저 불빛을 위하여
내 聖火의 騎手처럼 새도록 옮기고 고치고 하다가
마침내 스러지는 때를 기다려 나도 조용히 자리하고 눈을 감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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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다란 : ‘커다란’의 誤記 (방언)
*아슬히 : ‘아슬하다’에서 파생한 부사
*가직히 : ‘가까이’라는 뜻의 방언
*수구린 : ‘수그린’의 誤記
*돋고하는 : ‘돋우다’의 뜻을 지닌 동사에‘ ~하는’ 이라는 어미가 붙은 형태인 듯함.
사회주의
아내는 지금도 옛날의 빛깔을 두려워하고 있다.
아내보다 먼저 만났던 것이었는데
나는 결국 여자를 택하고 말았었다.
생활이란 대고 사느니보다 더한 관계가 아닌지
하나 사월이 오면 아내의 마음도 나의 마음도 옛날의 그 빛일에 가득하여
아내는 혹 어떤 재회가 없는가고 나의 가슴속 방을 뒤지곤 하지만,
X광선은 옛날의 희미한 흔적을 드러내 보일 뿐
항상 만족스런 대답을 주곤 한다.
이제 아내 間 자식도 생기고 애정도 생기고
설혹 이 사월에 그 불을 만난다 하더라도
가슴을 벌리고 피를 덥힐 용기는 없다.
당신 지금도 그 불놀이 생각하지요 하면서
사월이 오면 꼭 나의 가슴에 진한 광선을 들이대며, 나의 애정의 선사를 지우려 하는 아내에게
나의 역사는 당신 것이요 당신 것이요 하고
행사처럼 다시 고백하며
이 사월의 가려움을 가만히 달래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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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는 혹 어떤 재회가 없는가고 : “아내는 ‘혹 어떤 재회가 없는가’ 하고”의 오기
頭蓋骨
사랑을 다시 찾아갔던 사람의 뜻을
그대로 書架 한 칸에 달래어 앉히다.
계절이 유리문 안에
어이없이 장미의 줄기를 물고 섰는.
나의 앞서 또 누구였던가
우스운 세월을 사색한 빈 그릇.
그 아가리에 아침저녁 물을 갈면
장미는 어느 꽃항아리 위에서보다 더욱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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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가리 : ‘입’의 저속어이며, 통상 어떤 물건을 넣고 내는, 병·그릇·자루 등의 입 부분.
新地球論
새해 아침의
지구는 스카레트
푸른 원광이 받치는 투명한 수구.
달에서 보면
새벽에 홰를 치는 수탉
꽃벼슬이 나팔처럼 낭랑하다.
지구는 스카레트
황금마차의 미소년
별에서 보면
두 개의 눈동자
윙크하는 금속성 긴 목소리.
지구는 스카레트
중심하여 성좌의 무도회
태양에서 보면
또 하나의 태양
은하의 이 저편 젊은이의 줄다리기.
새해가 오면
지구는 고추잠자리
저마다 없는 부끄러움
벌거벗은 우리들 상하의 해안선.
지구가 웃을 때는
그렇지 지구가 웃을 때는
맑은 물 은어들의 불놀이
스산히 이륙하는 불꽃들
오 나의 청춘은 통화중
good morning
어느 별에선가 사랑의 목소리
가벼운 약속 새 출발의 깃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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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산히 : ‘몹시 어수선하고 쓸쓸하다.’, ‘날씨가 흐리고 으스스하다.’, ‘마음이 가라앉지 아니하고 뒤숭숭하다.’ 등의 뜻으로 쓰이는 형용사 ‘스산하다’의 부사형 造語.
*스카레트 : 영어 scarlet[skɑ́ːrlit]이 아닌가 싶다. 그렇다면‘스칼릿’으로 표기해야 옳을 듯함.
남향
南向 東門
三間
草家집 시락이
있는 듯 없는 듯.
누구의 故鄕인가
南道
어느
다수운 안마당.
어머니 같은
암탉과
암탉 같은
어머니가
오순도순
주고받는 안살림들
들릴 듯
안 드릴 듯
汽笛이
지나가는
건너편
산마루에.
아지랑이와
솔개가
이 두 女人하고는
또 다른
봄을
즐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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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락 : 초가집의 처마 끝을 일컫는 '기스락'이란 말인지, 아니면 흔히 처마 밑에 내걸어
놓는 '시래기'의 誤記인지 알 수 없음.
*다수운 : ‘알맞게 따뜻하다’의 뜻을 지닌 ‘다습다’의 변형
나의 秘敎
사랑하는 사람에게서
애기 하나를 얻어
흙 위에 풀어 놓는다.
울과 거리를 벗어나
도시와 먼 넓은 땅을 택하여
벌거숭이로 흙 위에 던지면서
하늘이여,
사랑하는 생명을
흙과 닿게 하였습니다.
흙과 만남으로 하여
이 애가 흙과 더불어
살며 깨어나리라 믿습니다.
이 애기에게도 어려움을 주십시오.
개똥밭에서 자라게 하여
검게 일어나게 하십시오.
흙을 버리지 않게 하십시오.
비록 괴로움이라 하드래도
비록 외로움이라 하드래도.
내가 한 줌의 흙이듯이
진실로 나의 생명인 애기가 또
검고 아름다운 흙이게 하십시오.
의식이 진행되는 동안에
秘敎의 가르침을 받으면서
애기는 크게 울었다.
놀라움과 큰 울음을 통하여
흙과 하늘 사이에 비로소
애기가 서서 우리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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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드래도 : ‘하더라도’의 방언
나이아가라 폭포
저는 욕심이 적은 사람으로
미국에 와서 별로 탐나는 것도 없고
또 원래 겸손한 사람으로
당신에게 불경한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오늘은 한 가지
당신이 저지른 실수에 대해서
목숨을 걸고 말씀 드리고자 합니다.
나이아가라 폭포 말입니다.
저걸 왜 저기에다 만들었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 점이 저는 당신을 이해 못하는 점이고
제가 생각하기에 당신의 실수인 것입니다.
말이 나온 김에 다 말씀드리겠습니다마는
당신의 나이아가라 폭포는 타작입니다.
왜 저것을 위에서 밑으로 떨어지게 했느냐는 것입니다.
저 같으면 저걸 물구나무 서게 했을 것입니다.
당신이 만든 나이아가라 폭포가 타작인 것이
왜 저걸 소리가 나게 했느냐는 것입니다.
당신은 저게 웅장하다고 생각하시겠지만
저 같으면 아예 소리를 죽였을 것입니다.
이 작품이 타작인 까닭은 또 있습니다.
폭포가 너무 규모가 작다는 것입니다.
저 같으면 북미 대륙을 온통 폭포로 만들었을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하나 더 말씀 드릴 것은
당신은 오늘도 또 실수인 것이
저걸 왜 나에게 보여 주느냐 하는 것입니다.
하루아침에 갑자기
나이아가라 폭포가 없어졌다고
이런 변이 있느냐고
세계가 온통 소란을 피우드래도
내가 미리 당신에게 말씀드리지마는
당신만은 그 까락을 짐작하고 계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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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우드래도 : ‘피우더라도’의 방언
고향에 가서 엿판이나 질거나
고향에 가서 나도 엿판이나 질거나
쩡쩡 가셋소리가 동네를 흔들면
나는 손가락을 빨며 따라가고
머리카락 빠진 것 헝겊 쪼각 떨어진 것 호마니 낫이나 칼 끝트리 부러진 것
아 나는 얼마나 엿 장사가 되고 싶었던가
민요보다 즐거운 가락
올기 쫄기 찹쌀 엿
어디 가면 그저 줄까
이왕이면 내 엿 먹어
엿판 위에 물건도 많았었다
옷핀 머리핀 손거울 챈빗 큰 수건 세수비누 할 것 없이 춘향전 심청전 장화홍련전 홍길동 전
오원이며 뭣이나 산다는데
나는 일원이 없어
점심을 굶고 따라다녀도
맛뵈기 하나 안 주던 그 사람이 될거나
작은 대밭 모퉁이를 돌면 살구나무 앞으로 밀면 넘어지는 울타리
그 울타리 안으로 늘 숨던 그 가시내가
고향에 가면 지금도 그 나이로 살고 있을 거나
내가 커서 엿장사가 된다면
그엔 저도 이고 따라다닌다고 말하던
고향에 가서 나도 그 엿판이 질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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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셋소리 : ‘가위소리’의 방언
*쪼각 : ‘조각’의 오기
*호마니 : ‘호미나’의 오기인 듯함.
*끝트리 : ‘끝’이란 뜻의 방언인 ‘끄트리’의 오기.
*챈빗 : ‘참빗’의 방언
*맛뵈기 : ‘맛보기’의 방언
*엿장사 : ‘엿장수’의 방언
*세수비누 : ‘세숫비누’의 오기
*올기 쫄기 : ‘씹히는 맛이 매우 차지고 질긴 듯한 느낌’을 이르는 말인 ‘졸깃졸깃’의 오기.
四 獅子址
지리산 화엄사 사 사자지
종소리 한 가닥은 노고단에 오르고
바른 가락은 골에 따라 섬진강에 든다.
범종 소리 앞서 해도 서로 가고 있다.
소리는 지면서 다시 돌아와 일고
소리는 일면서 다시 돌아 멀리 갔다.
산 석양 일고 자는 종소리 속에
시작이면서 맺는 끝을 같이 본다.
어디로 갈거나
어디로 가야 나의 끝머리에 닿느냐
끝머리이면서 다시 이는 종같이
겨울 가다 다시 이는 소리로 살 수 있으랴.
석양 화엄사 사 사자지에 서서
산과 같이 일고 자는 범종 멀리
어디선가 동이 트는 새벽을 본다.
아, 당신의 기승전결을 본다.
起承轉結
나무랄 수 없이 완벽한 하늘을
평생에 한 번만이라도 그려봤으면,
우러러보는 것만으로도 어림없고
고개를 떨어뜨리고 생각한다.
아버지가 장군을 지고 나간 뒤에
통시깐에 짚다발이 그대로 널린 것을
어머니는 맨손으로 서슴없이 쥐었다
한줌씩 조심조심 두엄자리에 버렸다.
옆에 놀다가 나는 코를 싸고 달아났다.
또랑에서 손발을 대강대강 씻고
저고리 치맛자락에 묻은 것도 닦고
어머니는 부리나케 부엌으로 들었다.
생각지도 않은 일인데 글을 쓰다가
늦은 가을 온 들이 푸른 하늘에 닿는
아버지가 장군을 지고 가는 모습과
뒤를 치우고 부엌에 드는 어머니를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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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군 : 물, 술, 간장, 똥오줌 등을 담아서 옮길 때에 쓰는 그릇. 오지로 만들기도 하고 나뭇조각으로 통 메듯이 짜서 만들기도 하는데, 중두리를 뉘어 놓은 모양으로 한쪽 마구리는 편평하고 다른 한쪽 마구리는 반구형(半球形)이며 작은 아가리는 위쪽에 있다.
*통시깐 : 변소, 화장실의 뜻을 지닌 방언.
*짚다발 : 짚 + 다발 = 합성어
*또랑 : ‘도랑’의 방언.
새
새가
울자
해가
떴다.
새도
해도
바쁜
하루
물
놀이로
흙
놀이로
해가
지고
새가
운다.
다시 起承轉結
당신이 세상을 떠나면서
더딘 세월을 위하여 헤매었던
괴로움이요 기쁨 끊임없는 것
그리면서 빈 주먹을 남기었다.
당신이 없이 뒤로 쉰 해 가깝게
더욱 어려울 때 엎드려 생각하고
그저 쥐어 있었을 뿐인 주먹
그 풀리지 않는 의문과 같이 있었다.
이방에 와 또 혼지 살면서
어언 예순이 되는 날 아침
유난하게 새 한 마리가 창 안에
넘치는 소리를 들으면서 생각한다.
아 그렇다. 바로 저 소리였었다.
아버지의 빈 주먹 그 안을 본 것이다.
당신의 시작과 끝맺음 사이
당신의 인생은 다만 가승전결이었다.
夕陽
山
紫色
夕陽
햇빛
山새
山토끼
빨간
帽子.
장작불
無等山
스님
장작불
앞에
冬至달
눈보라
春三月
꽃보라.
시 24
잠자리의
눈
푸른
하늘빛
안으로
멀리
흐르는
구름.
시 111
남쪽
나라 먼
불타는
땅 끝
저무는
全集
아
起承轉結.
破顔大笑
툼벙 소리 있고 달이 파안대소 한다. 깊은 밤 내내 달은 그렇게 있고 나는 이렇게 있다.
나는 디오니소스의 거시기氣다
나는 디오니소스의 거시기다.
나는 뿔 달린 디오니소스의 거시기다.
나는 머리카락이 춤추는 디오니소스의 거시기다.
나는 털이 늘 파안대소로 일어서는
디오니소스의 거시기다.
나는 부글부글 용소같이 속이 미친
디오니소스의 거시기다.
나는 대낮에 청천하늘을 나는 용 같은
디오니소스의 거시기다.
나는 맨발로 사하라 사막의 밤낮을 가는
디오니소스의 거시기다.
나는 물구나무로 히말라야를 올라가는
디오니소스의 거시기다.
나는 주렁주렁 사람을 차고 다니는
디오니소스의 거시기다.
나는 때로는 등대의 거시기 때로는
구름 너머 꿈인 날개의 거시기
나는 바다의 끝에 닿는 하늘의 거시기
천둥의 거시기 벼락의 거시기
적도를 가르는 화산의 거시기 안에서
살아있는 극점 빙하의 거시기
태양을 향하여 짓는 잡초의 거시기
블랙홀을 찾아가는 짐승의 거시기
아 늪에서 헤맨 거시기가 아닌
땅 위에 올라온 두더지의 거시기가 아닌
나는 절대를 위하여 절대로 존재하는 절대의 거시기
아 거시기의 거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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