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제주사람들에게 4·3사건은 여전히 트라우마(trauma)이다. 그 제주4·3사건을 다룬 영화 '지슬'이 세계최고의 독립영화제로 꼽는 선댄스 영화제에서 최고상인 '극영화부문 심사위원대상'을 받았다. 선댄스영화제에서 대상을 수상하는 것은 한국영화사상 처음이라고 한다. 역사의 혼란기에 없었으면 좋았을 변방의 섬 제주의 비극이 영화로 나왔고, 영화의 시대적 배경이 해방공간인 미군정이 행해지던 시대였다는 것이 묘한 감정을 일으킨다. 미국은 4·3사건의 비극에서 책임을 벗어날 수 없는데, 과연 미국사람들은 영화를 감상하고 어떤 생각을 했을까가 궁금하기도 하다. 제주의 4·3은 아직 解怨이 다 끝나지 않은 미제의 역사이다. 이제 얼마만큼은 사건의 진실은 밝혀지고 있다. 平和의 섬으로 태어나고 있는 제주에 따뜻한 화해의 바람이 불어와 불행하고 잔인했던 역사 앞에 진정한 사과와 용서가 이루어졌으면 좋겠다.
선댄스영화제는 영화배우 겸 감독 로버트 레드퍼드의 후원으로 시작된 독립영화 축제다. 영화 '내일을 향해 쏴라'에서 레드퍼드가 맡은 배역 '선댄스 키드'에서 이름을 따왔다. 선댄스영화제 측은 홈페이지에, 영화 '지슬'에 대하여 "전쟁의 부조리를 그린 영화는 많지만 이렇게 절묘한 디테일로 그린 작품은 드물다. 강렬한 흑백의 영상은 인물들의 인간성뿐 아니라 이 지역의 결까지 담아냈다"라고 평했다.
The absurdity-of-war theme has been explored in many films, but rarely in such exquisite detail as in this offering from writer/director Muel O. Striking black-and-white cinematography captures the texture of the region as well as the humanity of its inhabitants. The film doesn’t condemn anyone but rather focuses on the heart of the story—real people living in fear. Powerful and tender, Jiseul is at certain times hard to watch because of the content and at others extremely engaging because of the authentic human emotion. O has crafted a potent and poetic requiem for a people and a place close to his heart. - T.G
감독 오멸은 "영화제 관객 중 한 미국인 중년 아주머니가 울어서 눈이 빨개진 채 '이 영화를 만들어 줘서 고맙다'고 인사했다"며 현지 반응을 전했다. 제주 출신으로 줄곧 제주말(言)로 제주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아 온 오 감독은 "개인적인 영광보다는 제주 섬사람들의 아픔을 이야기한 영화이다 보니 그 사람들과 함께 나누고 싶다. 영화를 찍는 동안 함께 해주신 수많은 영혼과도 같이 나누고 싶다"고 덧붙였다.
영화제목인 '지슬'은 감자를 뜻하는 제주말이다. 그런데 같은 제주말이라도 한라산이 가로 막혀서인지 山南과 山北이 약간씩 다르기도 하다. 山北인 우리마을에서는 감자를 '지실'이라고 했다. 나는 어릴적에 이 지실을 땅에서 나는 열매를 뜻하는 地實에서 온 말이라 생각했는데 맞는 건지는 모르겠다.
1948년 세상물정에 어두웠던 동광리 마을 사람들은 군인들이 몰려온다는 얘기에 무슨 영문인지도 모른 채 부랴부랴 산속으로 피난을 떠났다. 산속 동굴에 숨어 굶주림에 지쳐가면서도 몇 알의 감자(지슬)를 나눠 먹으며 집에 두고 온 자식같은 돼지 걱정을 한다. 죽음의 그늘이 드리워진 상황 속에서도, 동광리 사람들은 동굴 속에서 아웅다웅 소소한 제주의 우스개소리를 주고받기도 한다. 그래서 영화 '지슬'은 한편의 진혼곡이면서도 따뜻하고 재미있게 볼 수 있는 영화다. 그래서 더 애잔한 지도 모르겠다.
'지슬'은 제주에서 태어난 영화인 만큼 서울에서 개봉하는 다른 영화들과 달리 제주에서 오는 3월 1일 맨 먼저 개봉예정이다. 이어 3월 21일 서울을 비롯해 전국에서 개봉할 예정이라고 한다. 제주4·3사건 발발의 도화선은 제주의 관덕정에서 있었던 3·1절 시위군중에 대한 발포사건이었다. 1947년에 일어난 이날 경찰의 발포사건으로 47명의 사상자가 났다. 제주4·3사건을 다룬 영화 '지슬'의 3월 1일 제주 개봉일은 그래서 의미있는 날이기도 하다.
65년 전 제주의 비극, 선댄스를 사로잡았다
오멸 감독의 독립영화 ‘지슬’ 극영화 부문 심사위원 대상
“빼어난 화면, 빛나는 해학” 극찬
칸과 베니스영화제 못지않은 의미
한국영화 사상 처음으로 선댄스 영화제 심사위원대상을 받은 ‘지슬’은 컬러로 찍은 뒤 흑백으로 변환한 흑백영화다.
오멸 감독은 “화려한 색상 속에 가려진 슬픔의 색을 보여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사진 - 영화사 진진]
오멸(42) 감독의 ‘지슬’이 미국 유타주에서 27일 폐막한 제29회 선댄스 영화제에서 ‘월드시네마 극영화’ 부문 최고상인 심사위원대상을 받았다. 세계 최고의 독립영화제로 꼽히는 선댄스 영화제에서 한국 영화가 대상을 수상하기는 처음이다. 그간 이윤기 감독의 ‘여자, 정혜’ 등이 극영화 경쟁부문에 진출했지만 상을 받지 못했고, 다큐멘터리 부문에서는 2004년 김동원 감독이 ‘송환’으로 ‘표현의 자유상’을 받았다. 선댄스영화제는 스티븐 소더버그·코언 형제·퀜틴 타란티노 등 스타 감독들을 배출한 것으로 유명하다. 지난해 ‘비츠 오브 더 서던 와일드’로 극영화 부문 심사위원대상을 받은 벤 제틀린은 2월 열릴 아카데미상 감독상 후보로 이름을 올렸다.
제주도 출신인 오멸 감독은 ‘뽕똘’(2009) ‘어이그 저 귓것’(2009) 등 제주 이야기를 담은 작품을 꾸준히 만들어왔다. ‘지슬’의 이번 수상은 한국 독립영화의 성장을 보여주는 상징적 사건이다. 칸·베니스·베를린영화제의 잇단 낭보에 이어 미국 독립영화의 심장부에서 거둔 성과라는 점에서 주목된다. 충무로 주류 영화에 이어 지역 비주류영화의 약진인 셈이다.
(◀ 오멸 감독)
‘지슬’은 감자를 뜻하는 제주도 방언. 영화는 1948년 11월 미국의 소개령이 내려진 제주도 4·3사건을 배경으로 한다. ‘해안선 5㎞ 밖에 있는 모든 사람을 폭도로 간주하고 무조건 사살한다’는 소문이 돌자 제주도 사람들은 삼삼오오 모여 피난길에 오른다. 대체 무슨 일이 왜 일어나고 있는지도 모른 채 산 속으로 피신한 마을 사람들. 이들은 곧 돌아갈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가지고 따뜻한 감자를 나눠 먹으며 집에 두고 온 돼지 걱정, 장가 갈 걱정 등을 하며 웃음을 잃지 않는다.
오 감독은 27일 본지와의 통화에서 “제주 4·3 사건은 한국사이자 세계사다. 외국 사람들에게 꼭 보여주고 싶었는데, 이번 수상이 그런 계기가 된 것 같아 기쁘다. 나처럼 지역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에게 관심을 가져주는 전환점이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오 감독은 제주도민 3만여 명이 이유도 모르고 죽임을 당해야 했던 65년 전의 비극을 흑백화면에 담았다. 한 편의 제사를 보는 것처럼 제의(祭儀) 형식으로 연출했다. 동양화를 떠올리게 하는 빼어난 장면, 비극적 상황에서도 빛나는 해학 등이 현지에서 극찬을 받았다. 지난해 부산국제영화제에서 한국영화감독조합상·시민평론가상·넷팩상·CGV무비꼴라쥬상을 휩쓸기도 했다.
영화평론가 전찬일씨는 “그간 유럽에서 한국영화가 꾸준히 인정받아왔지만 미주 지역에서는 그 힘이 약했다. 지난해 김기덕 감독이 ‘피에타’로 베니스영화제 황금사자상을 수상한 것 이상의 의미가 있다. ‘지슬’은 역사적 비극을 코미디로 승화시키는 경지를 보여주었다”고 말했다.
‘지슬’은 3월 1일 제주도에서, 그리고 3월 21일 서울을 비롯한 전국에서 개봉한다. 오 감독은 “제주도 사람들에게 먼저 보여주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제주도에 살고 있는 한 이곳의 이야기를 계속할 생각이다. 제주도는 보물창고 같은 곳”이라고 했다.
- 임주리 기자 [중앙일보] 2013년 1월 28일
지슬
1948년 11월, 제주섬에 미군정의 소개령이 내려온다. “해안선 5km 밖 모든 사람을 폭도로간주하고 무조건 사살하라” 명령을 이행하기 위해 제주에 도처의 군인들이 몰려오자 마을 사람들은 왜 쫓겨야 하는지 이유도 제대로 알지 못한 채 산속 동굴로 피신하는데…
제작노트<연출의도>
나에게 4.3은 바람처럼 자연스레 만나 가는 과정이었다. 지금도 알려지지 않은 사연이 여기저기 널브러져 있고, 망각되기를 기대하는 이들에 떠밀려 언젠가는 작은 이야깃거리도 못 되어 사라질지 모를 일이다. 이 이야기도 그러했을 것이다. 어둡고 추운 동굴 속에서 힘겹게 살기 위해 버티다가 죽어 간 이 땅의 사람들의 이야기를 통해 억울하게 죽어 간 영혼들과 지금 살아가는 우리들의 아픔까지도 함께 달래고 4.3은 개인의 숙제가 아닌 시대의 숙제이고 우리 함께 고민하고 풀어나가야 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리고 나누고 싶었다.
대한민국 영화 변방 제주를 대표하는 독립영화 감독이 빚어낸, ‘지역 영화’의 주목할 만한 사례. 1948년 제주 4.3항쟁 발발 당시, 서귀포시 안덕면 동광리 큰넓궤 동굴로 피신했던 마을 주민 실화를 근거로 만들어진 흑백 드라마다. 제주 4.3항쟁/사건은 미군정 체제의 한반도 통치로 인한 사회문제들과, 남한 단독정부 수립에 반대하는 과정에서 1948년 4월 3일부터 1954년 9월 21일까지 발생했던 민중항쟁이다. 미군정과 군정관리들이 항쟁을 무력으로 진압하는 과정에서 많은 주민이 억울하게 희생당했다. 실화를 바탕으로 한 이 저예산의 독립 흑백 동굴 스토리가, 마치 한 편의 장엄한 영화 진혼곡 같은 느낌을 전하는 건 무엇보다 그 억울함 때문일 터. 그 항쟁에서 억울하게 희생당한 혼령들이 감독과 영화의 잠재의식을 지배한다. 하지만 영화는 결코 그 억울함을 직접적으로 토로하진 않는다. 극 중 인물들 간의 크고 작은 갈등, 충돌, 대결, 화해, 위로 등 소소한 일상들로, 때론 무심하게 때론 드라마틱하게 표현한다. 때문에 그 아픔이 외려 더 강하게 다가선다. 내러티브 구조나 스케일, 사운드 효과 등이 영화 진혼곡의 인상을 한층 더 증폭시킨다. ‘지슬’은 ‘감자’를 지칭하는 제주 방언이다. - 전찬일/2012년 제17회 부산국제영화제
<수상>
* 42회 로테르담국제영화제(2013) 초청-스펙트럼(오멸)
* 29회 선댄스영화제(2013) 후보-월드시네마 극영화경쟁(오멸)
* 38회 서울독립영화제(2012) 초청-장편초청(오멸)
* 17회 부산국제영화제(2012) 수상-넷팩 아시아영화진흥기구상(오멸), 무비꼴라쥬상(오멸),
한국영화감독조합상-감독상(오멸), 시민평론가상(오멸) 초청-한국영화의 오늘-비전(오멸)
* 29회 선댄스 영화제 심사위원대상(2013) 수상
감독 오멸
* 제주 독립영화협회 공동대표
* 제주“머리에 꽃을” 거리예술제 예술감독
* 자파리연구소 대표 및 예술감독
* Terror J 대표
오멸 감독은 Terror J 거리 공연팀 대표를 맡고 있다. 그는 다큐멘터리 <작은 것이 아름답다>로 문화부 장관상을 수상하였고, '한국 퍼포먼스 30년사' 및 '춘천국제마임페스티벌' 등 다수의 퍼포먼스 작품 활동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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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없이 사라진 ‘4·3 희생자’ 위한 진혼제
며칠 전 막을 내린 서울독립영화제에서 이 영화를 보았다. 한국 작품인데도 영화엔 한글 자막이 등장한다. 얼핏 들으면 외국어 같기도 하고, 자막이 없다면 뜻조차 정확히 파악하기 어려운 제주 사투리가 처음엔 낯설고 생경하게 들렸다. 그러나 영화가 진행되며 점차 친근해지던 제주의 말(言)은, 영화가 끝날 즈음엔 마치 내 몸의 일부처럼 느껴졌다. 이 영화를 본다는 건 결국, 이 낯선 말과 점점 한몸이 되어가는 과정과도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투박하고도 정겨운 제주의 말은, 그래서 더 아프게 다가온다.
오멸 감독의 영화 <지슬>은 1948년을 배경으로 삼아 미군의 소개령을 피해 깊은 산 동굴 속으로 피신한 제주 마을 주민과 그들을 찾아내려는 토벌군의 이야기를 그린 영화이다. 제주 4·3항쟁 당시 서귀포시 동광리의 큰넓궤 동굴로 피해 있던 마을 주민들의 실화를 바탕에 두고 만들었다고 한다. 마을에 두고 온 가족 같은 돼지가 걱정스러운 할아버지, 말처럼 달리기를 잘한다며 자신의 '말 다리'를 뽐내는 순박한 청년, 만삭의 아낙과 어린아이까지. 당시 첨예하게 대립하던 이념과는 전혀 상관없이 살아가던 평범한 사람들이 이 영화의 주인공이다.
영화를 보며 가장 인상 깊었던 장면은, 토벌군을 피해 어두운 동굴 속에 피신해 있던 마을 주민들의 모습이었다. 목숨이 위태로울지 모르는 상황에서도 실없는 농담과 소소한 수다를 두런두런 나누고, 영화의 제목이기도 한 '지슬'(감자)을 사이좋게 나누어 먹던 모습. 평범하기 그지없는 그 일상적인 모습들이 말로 표현하기 힘든 수많은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깜깜한 동굴 속에 희미한 불 하나 밝힌 채 옹기종기 모여 앉은 마을 사람들의 군상은, 마치 자신들을 집어삼킬 거대한 비극의 소용돌이를 보지 못한 채 이제 막 사랑에 빠진 연인의 모습처럼 느껴졌다. 그들의 수다가 사랑의 밀어로 느껴질 만큼 그 순간들은 빛나는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다. 더없이 아름다운 순간이기에, 다가올 운명이 아프게 느껴졌다. 영화는 역사의 소용돌이와 삶과 죽음이 교차하는 순간에도 작은 일상의 끈을 놓지 않는다. 거대한 역사와 냉혹한 죽음의 이미지가 이 영화를 덮고 있는 두터운 먹구름이라면, 그 구름을 뚫고 나오는 한 줄기 빛은 바로 제주 사람들의 소소한 일상과 질긴 생명력이다.
<지슬>은 그들의 진혼을 위한 제례의식과도 같은 작품이다. 영화는 죄 없이 희생당한 제주 사람들의 말과 행동과 일상을 꼼꼼히 재현함으로써, 이름 없이 사라져간 그들의 존재를 64년 후의 현재로 불러낸다. 그들에게 불어넣어진 온기 가득한 생명력을 현재의 우리가 다시금 느끼게 함으로써, 그들이 결코 역사 속에 사장된 무명의 존재들이 아니라 하나하나 소중한 이름을 가진 귀하고 오롯한 존재였음을 상기시킨다. 오멸 감독은 그들의 비극적이지만 아름다웠던 마지막 순간들을 불러낸 뒤, 한명 한명의 넋을 정성스레 위로한다. 그로 인해 파생되는 마지막 여운은 깊고도 묵직하다.
<지슬>은 지난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아시아영화진흥기구상(넷팩상)을 비롯해 4개 부문을 수상했고, 최근 미국 선댄스 영화제 경쟁부문에 진출해 많은 주목을 받은 작품이다. 내년 봄 개봉을 준비하고 있는 이 영화는 상업영화가 아니기에 대규모 개봉을 하지는 못할 것이다. 오멸 감독은 새로운 방식의 대안적인 배급을 고민하고 있다고 했다. 이 영화가 소셜 펀딩을 통해 제작비 일부를 조달했듯이, 배급과 홍보에서도 개인들의 작지만 지속적인 관심은 커다란 힘이 될 것이다. 내년 봄 만나게 될 이 영화의 제목을 겨우내 기억해 주길 바란다. <지슬>은 충분히 그럴 가치와 의미가 있는 작품이다. <글 - 영화감독 민용근>
▲ 영화감독 민용근
<그 누구도 가르쳐 주지 않았던 제주의 역사>
제주 4·3 사건
제주 4·3 사건(濟州 4·3 事件)은 1947년 3월 1일 경찰의 발포사건을 기점으로 하여 1948년 4월 3일 발생한 봉기사태와 그로부터 1954년 9월 21일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무력충돌과 진압과정에서 양민들이 희생당한 사건"으로 《제주 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에서 규정하고 있다.
제주 4·3 사건은 8·15광복 이후 남한에서의 단독정부 수립을 위한 5·10 총선에 반대하기 위해 시작되었는데, 1948년 4월 3일 새벽 2시, 남로당 제주도당 당원 김달삼 등 350여 명이 무장을 하고 제주도 내 24개 경찰지서 가운데 12개 지서를 일제히 급습하면서 시작되었다. 이 과정에서 경찰과 서북청년단, 민족청년단, 독립촉성중앙회 등 극우단체 회원들이 희생되었고, 이에 분노한 극우 세력은 극우 세력대로 살상을 자행했다. 여기에 서북청년단을 비롯한 극우단체의 횡포에 대한 제주도민들의 반감도 터져 나와 유혈사태는 크게 번져나갔다.
▲강요배 '동백꽃 지다' 중에서 '인민위원회'( 해방후 마을, 읍, 면 단위로 생긴 자치기구)
이로 말미암아 제주 전역에 행정기능이 마비되는 등 심각한 치안불안상태가 지속되었다. 이 제주 4·3사건은 한국 전쟁이 끝날 때까지 계속되었으며, 인적피해를 보면, <제주4.3특별법>에 의한 조사결과 사망자만 14.000여명(진압군에 의한 희생자 10,955명, 무장대에 의한 희생 1,764명 외)에 달한다. 사건을 일으킨 주역 중 이덕구는 1949년 6월에 경찰관 발포로 사살되고, 김달삼은 그 전해인 1948년 8월 21일에 열리는 해주 전조선 제정당 사회단체 연석회의에 참석차 제주도를 빠져나갔지만, 학살은 1953년 한국 전쟁이 끝날 때까지 계속되었다.
배 경
제주 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위원회의 진상조사결과에 의하면, 제주 4.3 사건 당시의 제주도 상황은 해방으로 부풀었던 기대감이 점차 무너지고, 미군정의 무능함에 대한 불만이 서서히 확산되는 분위기였다. 약 6만 명에 이르는 섬 귀환인구의 실직난, 생필품 부족, 전염병인 콜레라의 만연, 대흉년과 미곡정책의 실패 등 여러 악재가 겹쳤다. 특히 과거 일제강점기당시 경찰출신들이 미군정경찰로의 변신, 밀수품 단속을 빙자한 미군정 관리들의 모리행위 등이 민심을 자극하고 있었다. 사건의 배경에는 남한 단독 정부수립을 반대하는 남조선로동당계열의 좌익세력들의 활동과 군정경찰, 서북청년단을 비롯한 극우 반공단체의 횡포에 대한 제주도민들의 반감 등이 복합적으로 일어났다.
제주도는 일제강점기부터 좌익계열 활동의 전통이 강한 지역으로 광복 후 도민들의 적극적인 지지 속에 건국준비위원회와 인민위원회가 활발히 활동했다. 특히 제주도 인민위원회는 다른 지역과 달리 미군정청과 협조적이었다.
그러나, 1947년 3.1절 기념식에서 기마경관의 말발굽에 어린아이가 채이는 일이 벌어졌고, 이를 본 시위군중들은 기마경관에게 돌을 던지고 야유를 보내며 경찰서까지 쫓아갔다. 그런데 경찰이 이를 경찰서 습격으로 오인하여 시위대에게 발포해 6명이 사망하고 6명이 중상을 입었다. 발포사건의 전모를 모르던 미군정 당국은 이 발포사건을 잘못을 시인하면서도 정당방위로 주장하고 사건을 '시위대에 의한 경찰서 습격사건'으로 규정하고 행사 간부와 학생들을 연행하기 시작했다. 한편 경무부에서는 3만여 시위군중이 경찰서를 포위 습격하려고 했기에 불가피하게 발포했다고 해명하면서 민심이 들끓었다. 이에 남로당은 이런 민심의 흐름을 놓치지 않고 조직적인 반경활동을 전개했다. 처음에는 삐라 붙이는 일과 사상자 구호금 모금운동을 벌였다.
1947년 3월 10일부터 제주도청을 시작으로 민관 총파업이 발생하여, 제주도의 경찰 및 사법기관을 제외한 행정기관 대부분인 23개 기관, 105개의 학교, 우체국, 전기회사 등 제주 직장인 95%에 달하는 4만여명이 참여하였고, 심지어 제주 경찰의 20%도 파업에 참여하였다. 경찰은 3월 15일부터 파업 관련자 검거에 나섰고 이 과정에서 3월 17일 수감자 석방을 요구하는 군중에 또 다시 발포하는 사건이 일어난다. 경찰은 4월 10일까지 500명 가량을 검거하였는데 검거자 중 66명의 경찰이 파면되었고 그 자리는 서북청년회 소속으로 충원됨으로써 제주도민들과 군정경찰 및 서북청년단 사이에서는 대립과 갈등이 더욱 커져 갔다.
한편 1947년 3월 19일 미군정 정보보고서에서는 미군정은 제주도주민 70%가 좌익 또는 그 동조자로 인식했다. 박헌영의 비서 박갑동도 어느 정도 지지여부는 사실이라는 말을 하였다.
경 과
남로당과 미군정의 전투
남한 단독정부 수립을 위한 1948년 5월 10일 선거가 예정되면서 당의 존립이 위협받게 되자 단독선거, 단독정부를 반대한다는 명분으로 남로당제주도지부의 김달삼 등은 남로당 중앙당과 아무런 협의도 없이 독단적으로 무장폭동을 결정했다. 1948년 4월 3일 새벽 2시, 남조선로동당 제주도당은 김달삼 등 350여 명이 무장을 하고 제주도 내 24개 경찰지서 가운데 12개 지서를 일제히 공격하였다. 이들은 경찰관과 서북청년단, 대한독립촉성국민회 등 우익단체 요인들의 집을 습격하였다. 이것이 제주도 4.3 사건의 시작이었는데, 그러나 제주도 남로당 세력들은 외부와 고립된 제주도 지형과 미군의 대응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무모한 결정을 일으킨 셈이었다.
한편 현장에서 경찰관 가족, 민족청년단원, 서북청년단원 가족, 독립촉성회 당원 가족들이 처형되고 이 사실이 외부에 알려지면서 극우세력은 제주도 파르티잔 세력을 규탄하는 집회를 서울에서 열었고, 곧 미군정에도 '빨갱이 토벌 작전'을 요청한다.
이에 미군정은 4월 5일에 '제주도 비상경비 사령부'를 설치하였다. 이어서 미군정은 즉각 각 도로부터 차출한 대규모의 군대, 경찰, 서북청년단 등 반공단체를 증파하였고, 제주도 도령을 공표해 제주 해상교통을 차단하고 미군 함정을 동원해 해안을 봉쇄하였다.
협상 실패와 사태 악화
처음에는 상호 간에 수십 명이 살해당했지만, 이후 1948년 4월 28일 9연대 사단장 중령 김익렬이 더 이상의 피해를 막고자 남로당 무장대 대장 김달삼과의 회담을 가져 평화적으로 해결하고자 했다. 그리고 평화협상이 체결되어 전투를 72시간 이내에 중단하기로 합의하였다.
그러나 미군정과 조병옥 경무부장 등이 강경 일변도의 진압정책으로 나와 이러한 평화협상은 깨졌다. 1948년 5월 1일, 서북청년단을 비롯한 우익청년단체에 의해 오라리에서 일어난 방화 사건으로 합의가 파기되면서 사태가 악화되었다.
1948년 5월 5일 오전 12시, 4.3 사건의 해결을 놓고 제주중학교 미군정청 회의실에서 진압회의가 열렸다. 회의에서 경비대 제9연대장 김익렬 중령은 경찰의 기강문란을 탓하며 제주경찰을 자기의 지휘 하에 달라는 요구를 하자 경무부장 조병옥은 설명과 증거물이 전부 조작이라며 부인하더니 김익렬을 공산주의자로 몰기 시작했다. 그러자 김익렬이 조병옥에게 달려들었고 몸싸움이 벌어져 회의장은 난장판이 되어 진압 회의는 결말을 보지 못한 채 종결되었다.
선거일이 가까워지면서 선거관리사무소가 습격을 당하고 선관위원들이 피살당하는 사건이 연이어 일어났다. 투표소가 피습을 당하여 기록을 빼앗기기도 했다. 이러한 가운데 5월 10일의 남한 단독선거에서 제주도는 투표수 과반수 미달로 무효처리 되었고, 다음달 6월 23일에 재선거를 실시하려는 미군정의 시도도 실패로 돌아갔다. 이 과정에서 5월 20일 경비대원 41명이 탈영하여 무장대에 가담하였고, 6월 18일 경비대 연대장 박진경이 대령 진급 축하연을 마친 후 문상길 중위(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사형집행 1호)등 모 부사관 등 부하 대원에게 암살당하는 사건도 발생하였다.
학살극
1948년 6월 중순경 김달삼 등은 1948년 8월 해주에서 열리는 제2차 전조선 제정당 사회단체 연석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제주도를 벗어났고, 대한민국 단독 정부는 이를 대대적으로 선전하여 제주도 빨치산으로 홍보했다. 이후 잠시 소강상태에 놓였으나 1948년 8월 15일 남한에 대한민국이 수립되고, 다음달 9일 북한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수립되면서 남한의 이승만 정부는 제주도 문제를 정권의 정통성에 대한 도전으로 인식하였다. 이승만 정부는 그해 10월 11일 제주도경비사령부를 설치하고 본토의 군 병력을 증파하였고, 11월 17일 제주도에 계엄령을 선포하였다. 이에 앞서 중산간지대를 통행하는 자는 폭도배로 간주하여 총살하겠다는 포고문이 발표되었고, 중산간마을에 대대적 진압작전이 실시되었다.
▲ 4·3 평화기념관의 다랑쉬 동굴 학살 재현
1948년 11월부터 중산간마을에 대한 강경진압으로 마을의 95% 이상이 불에 타 없어지고 '좌익과 무관한' 많은 인명이 희생되었다. 이로 인하여 삶의 터전을 잃은 중산간마을 주민 2만 명 가량이 산으로 들어가 무장대의 일원이 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진압 군경은 가족 중에 한 명이라도 없는 경우에 도피자 가족으로 분류하여 부모와 형제자매를 대신 죽이는 이른바 '대살(代殺)'을 자행하기도 하였으며, 재판절차도 없이 주민들이 집단으로 사살되기도 하였다. 또한 세화·성읍·남원 등의 마을에서는 무장대의 습격으로 민가가 불타고 주민들이 희생되기도 하였다.
결 말
1949년 3월 제주도지구전투사령부가 설치되면서 진압과 함께 선무작전이 병행되었으며, 귀순하면 용서한다는 사면정책에 따라 많은 주민들이 하산하였다. 1949년 5월 10일 재선거가 성공적으로 치러진 데 이어 6월에 무장대 총책인 이덕구가 오라리에서 경찰의 발포로 사살됨으로써 무장대는 사실상 궤멸되었다. 그러나 이듬해 6·25전쟁이 발발하면서 보도연맹 가입자와 요시찰자 그리고 입산자 가족 등이 대거 예비검속 되어 당시 제주 계엄군을 맡고 있던 대한민국 해병대 등에게 학살을 당하였고, 전국 각지의 형무소에 수감되었던 4·3사건 관련자들도 즉결처분되었다. 이 사건은 1954년 9월 21일 한라산의 금족(禁足) 지역이 전면 개방됨으로써 발발 이후 7년 7개월 만에 막을 내렸다
사 후
제주 4·3 사건은 30여 만 명의 도민이 연루된 가운데 2만5천~3만 명의 학살 피해자를 냈다. 당초 토벌대가 파악한 무장대 숫자는 최대 500명이다. <제주4.3특별법>에 의한 조사결과에 따르면 사망자만 14,000여명(진압군에 의한 희생 10,955명, 무장대에 의한 희생자 1,764명 및 기타)에 달한다. (진압작전 중 사망한 군인은 180여명, 사망 경찰관은 140여명이다) 전체 희생자 가운데 여성이 21.1%, 10세 이하의 어린이가 5.6%, 61세 이상의 노인이 6.2%를 차지하고 있다. 그 실례로 제주 4·3학살피해자의 증언 중에는 극우청년들에게 어린이에 불과한 아들을 잃었다는 증언이 한겨레신문에 보도된 바 있다. 한국전쟁 발발 당시 제주도민들은 "우리는 빨갱이가 아니다!"라는 것을 증명하고 싶어 해병대에 자원입대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밖에 재일 한국인들 출신구성을 보면 제주도출신자가 상당히 많은데, 이는 제주 4·3 사건과 깊은 연관이 있다. 당시 군정경찰 및 서북청년단등의 반공 극우단체의 가혹한 탄압을 피하기 위해 이른바 '보트피플'로 대한해협을 건너 일본지역(주로 오사카지역)을 피난처로 떠나간 사람들이 많았던 것이다.
한편 서북청년단 등 우익단체 회원들은 국가유공자로 남한 정부의 보훈 대상자가 되었고, 남로당 제주도당 수뇌부였던 김달삼은 사건이 진행 중이던 1948년 8월25일 월북, 국기훈장2급을 수여받았으며, 게릴라부대를 이끌고 남침했다 1950년 3월 정선지역전투에서 사살됐다. 김달삼은 사후 ‘남조선혁명가’의 비문을 받고 평양근교의 애국열사릉에 안장됐는데, 이러한 사실은 2000년 3월 평양을 방문했던 우근민 제주지사에 의해 확인되기도 했다.
4.3 사건을 경험한 유족들의 회고에 따르면, '좌익도 우익도 자기 마음에 안 들면 마구잡이로 죽여버리는, 완전히 미쳐버린 세상이었다.'고 회고하고 있다.
대중 문화 제주4·3사건
*《순이 삼촌》(1978년 소설, 현기영 作)
*《여명의 눈동자》(1991년 드라마)
*《이제는 말할 수 있다- 제주4.3》(1999년 다큐멘터리)
*《야인시대》(2003년 드라마)
논 란
진상 규명 노력
제주 4·3학살피해자 가족과 시민단체에서 줄곧 진상 규명과 명예회복을 요구하였으나 역대 정부는 이를 무시하였고, 오히려 금기시하였다. 이 사건을 다룬 소설인 《순이 삼촌》의 경우 책은 금서가 되고 작가 현기영은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고문을 당하는 등 고초를 겪어야 할 정도였다고 한다.
▲ 제주 4·3 평화 기념관
그러나 민주화 이후 1998년 11월 23일 김대중 대통령이 CNN과의 인터뷰에서 "제주 4·3은 공산폭동이지만, 억울하게 죽은 사람들이 많으니 진실을 밝혀 누명을 벗겨줘야 한다."는 발언이 있었고, 1999년 12월 26일 국회에서 제주4·3사건의 진상을 규명하고 이 사건과 관련된 희생자와 그 유족들의 명예를 회복시켜줌으로써 인권신장과 민주발전 및 국민화합에 이바지함을 목적으로 하는 법인 "제주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을 위한 특별법"이 통과되고, 2000년 1월 12일 제정 공포되면서 정부 차원의 진상조사가 착수되었다. 2003년 3월 29일 조사위원회에서 보고서를 확정하였고 조사위원회의 의견에 따라 2003년 10월 31일 노무현 대통령이 대한민국을 대표하여 '국가권력에 의해 대규모 희생'이 이뤄졌음을 인정하고 제주도민에게 공식 사과를 하였다.
폭동 논란
월간조선과 재향군인회를 비롯한 일부 우파단체들은 4·3항쟁을 '남로당계열의 좌익세력이 주도하여 인민군이 주민들을 선동해 일으킨 폭동'이라고 주장하며 1999년 4·3 특별법에 서명하고, 제주도 방문 당시 제주도민들에게 사과한 당시 노무현 대통령에 대해 사과해야 할 당사자는 한반도에 공산체제를 만들고자 했던 공산주의자들인 남로당과 이들을 흡수 합병한 북한을 통치하는 조선노동당이라고 주장한다.
월간조선은 2000년 2월호에서 4·3사건을 '공산당의 폭동'이라고 주장한 일본 산케이 신문의 글을 인용했다가 4·3사건 유족회에게 소송을 당해 1,2심에서 패소했으나 최종심에서 무죄를 선고 받았다.
나라정책연구원 김광동 원장은 제주 4.3 사건의 본질적 성격은 ‘체제 전복’이었음에도 이를 진압한 우리 정부의 잘못을 비판하는 연구에 치우쳐 있었다며 “1948년 대한민국을 건국하는 시기를 전후하여 공산주의 체제를 지향하는 세력들이 자유민주주의적 체제에 기반한 국가를 건설하고자 하는 세력을 대상으로 벌인 무장 투쟁이자 반란”이라고 주장했다.
장로교(예장통합)목사 이종윤은 그가 목회하는 서울교회(강남구 대치동 소재) 예배시간에 “4·3 사건은 공산당 프락치 등 좌익 세력들이 5·10 선거를 방해하기 위해 벌인 것”이라고 발언했다. 이 발언은 케이블방송 CTS를 통해 방송되기도 했다.
2010년 11월 20일 뉴라이트계열 출신인 이영조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 위원장은 제주 4.3항쟁에 대해‘communist-led rebellion’(공산주의자가 주도한 모반폭동)이라 주장했다.
북한의 제주4.3사건에 대한평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북한은 그동안 제주4.3사건에 대해 ‘미제침략자들이 날조한 5.10망국단독선거를 반대해 1948년 4월3일 제주도 인민들이 일으킨 반미구국항쟁'으로 규정해왔다. 북한 관영 로동신문은 최근 ‘반미항쟁으로 부르는 제주도의 원한’이라는 제목의 논평에서 “우리 민족이 불굴의 기상과 자주정신, 조국통일의지를 남김없이 과시한 제주도 4.3 인민봉기는 지금도 우리 겨레의 기억 속에 생생히 남아있다”고 평가했다.
계엄령의 적법성 논란
1948년 11월 17일 발효된 계엄령이 적법한 지에 대한 논란이 있다. 위법하다고 보는 측에서는 계엄법이 제정되기 전에 계엄령을 발효한 것은 법률에 의해 정하는 바에 의해 계엄을 선포하도록 되어있는 제헌 헌법에 어긋난 것이라고 주장하고, 이를 적법하다고 보는 측에서는 일제 강점기 당시의 계엄법이 효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적법하다고 주장한다. 이 부분은 사건이 1948년 8월 15일 이전부터 정부수립 이후까지 지속된 것이기 때문에 관점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 출처 : 위키백과
▲이덕구의 십자가 형
인민유격대 사령관 이덕구
일찍이 일본으로 건너가 오사카에서 장사를 하던 큰형 이호구 밑에서 둘째형 이좌구와 함께 공부하였다. 미오키모리국민학교와 상업고등학교를 거쳐 리츠메이칸대학 경제학과 4학년 재학 중에 학병으로 일본 육군에 입대해 광복과 함께 소위로 제대하였다.
해방 후 큰형 이호구는 고향에 신촌중학교를 설립하였으며, 둘째형 이좌구는 1946년 11월 남조선신민당·조선인민당·조선공산당의 합당으로 결성된 남조선노동당 제주도위원회 총무부장을 지냈다.
1947년 3월 1일 3·1절 기념 대회 이후 미군정과 우익 세력에 대한 제주도민들의 반감은 커져 갔고, 남로당 제주도위원회는 제주도민들의 광범위한 지지를 기반으로 총파업, 동맹 휴교 등으로 맞섰다.
1948년 초 남한 단독 선거 감시를 위한 유엔조선임시위원단의 활동이 시작되면서 단독 선거를 둘러싸고 좌·우의 대립이 심해졌다. 특히 서북청년단 등의 패악이 심해지면서 남로당 제주도위원회는 한라산을 거점으로 한 무장 투쟁에 돌입하게 되었고 이어 1948년 4월 3일 제주 4·3 사건이 발발하였다.
이 시기에 고향인 조천읍에서 조천중학교 교사로 재직하다 조천읍 신촌리 사돈 집에서 숨어 지내던 이덕구는 한라산으로 입산해 제주도 인민유격대 3·1지대장을 맡아 제주읍과 조천읍, 구좌읍을 중심으로 활동하였다.
1948년 8월 21일 황해도 해주에서 열린 남조선인민대표자대회에 김달삼(金達三)이 참석하러 가게 되자 이덕구가 남로당 제주도위원회 군사부장과 제주도 인민유격대 사령관 직책을 이어받았다.
이덕구가 지휘하는 유격대 주력 부대는 토벌대를 포위해 기습 공격하고 제주읍을 급습해 도청을 방화하고 지서를 습격하는 등 활발하게 활동하였다. 그러나 토벌대의 대공세 이후 힘을 잃어가고 있었고 무장 대원도 100여 명으로 줄어들어 있었다. 결국 1949년 6월 경찰과 교전을 벌이다 최후를 맞았고 효수된 머리는 경찰서 앞 관덕정 광장의 전봇대에 매달려졌다.
제주 4·3사건으로 이덕구 일가족 대부분이 희생되었다. 부인 양후상과 다섯살 아들 이진우, 두살 딸도 죽었다. 큰형 이호구의 부인과 아들, 딸, 둘째 형 이좌구의 부인과 아들, 사촌 동생 이신구, 이성구 등도 경찰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 - 출처 : 향토문화대전
<내 고향마을 구엄리 송옥춘 할머니의 인생>
어릴적 만나면 인사를 드려도 표정없이 인사를 받던 이웃 아주머니 한 분이 계셨다. 자그마한 체구의 단아했던 모습, 그러나 찢어지게 가난했던 분이었다. 그 분이 이렇게 아픈 4·3의 과거를 간직하고 있었다는 것을 이제야 알았다. 4·3 사태라고 불렸던 이 민중항쟁은 하나의 '금기어'였기 때문에 누구 한 사람 말을 하지 않고 살았다. 어린 나는 어머님 보다 세살 위이신 송옥춘 할머니가 '일찍 남편을 여의고 홀로 사시는구나'라고만 생각했었다. 1948년 그 당시 구엄국민학교 교사였으면 꽤나 인텔리였던 남편이었다. 4·3와중에 좌익로 몰린 남편과 4개월 된 갓난 아들을 잃었다.
마을 사람들과 어울리지도 않았고, 표정의 변화도 없으셨던 분이다. 이제야 그 분이 왜 그러셨는지 이해가 간다. 해방공간에서 제주는 비극적인 전쟁을 겪어야했다. 심지어는 부모형제가 이념으로 나뉘어 서로 싸워야 했으니, 좁은 섬은 그야말로 처참하기 그지 없었다. 냉전시대와 남북대치 상황이 지속되면서 오랜 세월동안 섬 외부에 이 처참한 비극은 자세하게 알려지지 못했다. 그 막막한 세월동안 회한을 가슴에 묻었던 분들의 절규를 들으며 마음이 몹시 아팠다. 극소수를 제외하고, 그들에게 무슨 이념의 주장이 있었겠는가! 잘못 만난 역사였을 뿐! 악몽이었다. 이념을 떠나 처참한 비극이었던 4·3, 누구하나 위로해 주지 않던 그 아픔을 어떻게들 견뎌 냈는지... 무정한 역사였다.
제주4.3사건이 일어나기 전 송옥춘 할머니는 초등학교 교사인 남편과 갓난아이와 행복한 삶을 살았다. 하지만 4.3이 일어나자 남편이 근무하던 구엄국민학교가 불태워지고 남편이 경찰에 구속됐다. 남편을 잡아간 경찰은 송 할머니도 가만두지 않았다. 집에 있으면 잡아가서 때리고는 돌려보내고, 또 집에 돌아오면 다시 잡혀가 매를 맞기를 수차례 반복하던 중 어린 아기를 데리고 가면 혹시나 덜 때릴까 싶어 4개월 조금 지난 아기를 데리고 갔다.
그 때 남편과도 잠깐 만났지만 고초를 겪고 있는 송 할머니를 안타깝게 여긴 남편이 '저 사람은 죄가 없으니 풀어줘라. 이혼하겠으니 앞으로 부르지 말라'며 경찰들 앞에서 이혼도장까지 찍고 인연을 놓았다. 그날 송 할머니는 남편과의 인연 뿐만 아니라 아기와의 인연도 잃었다. 젖을 먹이기 위해 안고 있던 아기의 머리를 경찰이 총부리로 내리친 것이었다. 아기의 머리에서는 '팍' 소리가 났고 이후 아기는 울지도 않고 젖을 물지도 않았다고...
하지만 송 할머니는 이래저래 경황이 없어 아기가 죽었다고는 생각도 못했다. 축 늘어진 아기와 함께 풀려난 송 할머니는 친정인 구엄마을로 돌아갔고 친정어머니가 '죽은 아기를 왜 여기에 데려왔냐, 시집에 가서 두고 오지 여기를 데리고 왔느냐'고 말했을 때야 아기의 죽음을 깨달았다. 송 할머니는 죽은 아기를 안고 하염없이 울었고 지금도 당시를 생각하면 아직도 무섭고 목에서 피가 콱 솟는 것 같다고 말한다.
<사투리로 말씀하시는 송옥춘 할머니의 이 말씀을 제주 밖 外地人들은 얼마나 알아 들을 수 있으려나?>
송 할머니는 "경찰에 잡혀갔을 때 사람을 하도 때리니까 배쪽을 맞으면 죽을까봐 잔뜩 웅크렸더니 허리를 짓밟고 차고 때리더라. 지금이야 병원도 있지만 그 때는 집에서 민간요법으로만 치료했는데 지금도 후유증으로 고통을 겪는다"며 "우리 부모님은 남들이 아기를 낳지 않는 날에 나를 낳아서 내가 이런 고통을 받나 하는 마음도 들 정도로 사니까 살아왔지 그때 차라리 죽었으면 좋았을 것"이라고 눈물을 보였다. - 출처 : 제주의 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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