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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수필과 시의 문장 구조상 차이

전숙 2010. 7. 15. 18:55

수필과 시의 문장 구조상 차이

-수필에 있어서의 詩的 表現-

유경환 (시인, 연세대 겸임교수)

* 수필문장과 산문정신

나는 부끄러운 과거를 지니고 있다.
이미 활자화 된 것이라 변명하거나 취소할 수가 없기에 부끄럽다.
이미 떨어져나간 나의 분신이 곧 나의 과거다.
헌 책방에, 시골 서점에 또 문우의 서가에 꽂혀 있다.
속으로 바라기는 깨끗이 없어졌으면 싶은 것이다.
낙엽이듯 오래되면 삭아 없어지길 바라나 책자이기에 쉽사리 삭지 아니한다.
취소될 수 없는 문학의 "증언"으로 존재할 것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 이 과거가 나의 문학수업에 있어서 창작태도에 성찰의 동기가 되었다.
나는 1957년「현대문학」에서 박두진시인에 의해 시 부분에 추천되었다. 45년 전이다.
20대 초반 대학생 시절이다.
이미 그전에「새벗」,「소년세계」,「학원」따위 월간 문예지에서 몇 가지 문학상을 받은 터였다.
마음으로 채 어른이 되기 전이라 글을 쓸 기회가 내게 닿기만 하면 글을 썼다.
이렇게 쓴 글 쪽들이 모여 책이 되기 시작했다.

나의 첫 산문집은 70년대 초 범우사에서 출간된『길에서 주운 생각들』이다.
이후 열 몇 권의 산문집을 계속 출간한다.
오늘날 돌아보니 온통 부끄러운 것들이지 않은가.
왜 지금 와서 부끄럽다고 하는가.
성숙되지 아니한 생각, 그것이 노증되기 때문이다.
충분히 성숙되지 아니한 생각들이라 풋과일처럼 떫고 시다.
그때엔 이를 생각지 못했던 것이다.
나만이 쓸 수 있는 독특한 스타일의 문장이라 여겼고 당연히 이런 문장이 빛날 것이라고 자만했다.
왜 이런 문장을 속으로 자랑스럽게 여겼을까.
차근히 반성해 보자.
우선 1930년대 이후 우리나라 수필의 그 한결같은 문체 그 단조로움에 싫증을 느꼈다.
이들과 차별되는 문장을 쓰고 싶었다.
이것이 설익었던 당시 나의 사유였다.
그 다음 휴전 이후 10대 시절부터 시작한 학교 교육 과정을 밟으며 읽기 시작한
외국어 문장 그 문체에 매력을 느꼈고 그 문장이 풍기는 멋을 흉내내고 싶었다.
영어 문장의 빛나는 묘사와 활력있는 기교, 그리고 거침없이 구사할 수 있는 구(句)와 절(節), 그 뿐인가.
얼마든지 길게 끌고 갈 수 있는 관계대명사의 활용에서 우리나라 문장구조가
영어의 그것에 비해 단순하고 제약적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이런 판단은 오류였다.

잘못된 판단이라고 깨닫게 된 결과, 내 글에 대해 부끄러움을 느끼게 된 것이다.
산문정신에 어긋나는 글을 써서 발표한 그 행위가 부끄러워진 것이다.
마치 지난날의 일기를 다시 읽으면서 낯을 붉히는 일과 다르지 않다.
수필은 자기를 드러내는 필체와도 비슷해서 성숙한 사상이 그대로 전이된다.

그러므로 겸손하고 담백한 것일수록 향기를 지닌다.
우리나라 흙을 기지고 도예를 하면 형상화된 예술성 또한 지극히 한국적인 것일 수밖에 없다.
도예가의 숨결이 그대로 스며 배이기에 그렇다.
글에서도 마찬가지다.
그러므로 우리 글을 가지고 수필을 쓰는 경우 우리 어문 구조에 철저해야 한다.

우리 글의 구조와 문법에 정확해야 하며 우리식 산문이 요구하는 신문정신에 따라야 한다.
우리 글을 가지고 외국 글처럼 서술하면 번역문장으로 오해되기 십상이다.
또 우리 글에서는 문장의 길이가 어느 정도일 때 적당한가.
곧 낱말이 몇 개가 연결될 때 소구력(訴求力)이 큰가를 생각하여야 한다.
그리고 우리 글에서 흔히 생략되는 주어가 거느리는 영향력은
어느 범위까지에 동사와 연결되는지도 생각해야 한다.
영어에서는 주어 바로 다음에 동사가 오지만 우리 글에서는 주어와 동사 사이가
엄청난 거리로 떨어져 있으며 그 사이에 간격서술어가 삽입되고 관계대명사 없이
구나 절이 끼여들므로 그 기본구조를 읽어내기가 어렵다.
문장이 길면 길수록 주어가 어떤 것이었는지 잊혀져서 뜻을 파악하기 어렵게 되며 문장이 모호해진다.
그러므로 산문정신에 따라야만 분명한 글이 되고 주제가 선명해진다.
좋은 글, 곧 좋은 수필은 겨울나무 가지처럼 주제가 확실하게 보인다.

출처 : 빛고운 창가
글쓴이 : 빛고운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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