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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신춘문예에 대한 몇 가지 생각

전숙 2010. 7. 15. 18:53

신춘문예에 대한 몇 가지 생각

이 승 하
(시인, 중앙대 교수)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신년 벽두는 신춘문예 당선작 읽기에서 시작된다. 신춘문예 제도가 없는 한겨레신문과 몇 개 경제신문, 여름에 공모하는 중앙일보를 제외한 거의 모든 신문의 1월 1일자에는 시와 소설을 비롯한 몇 개 장르의 당선작과 당선소감, 심사평이 실린다. 문학에 별다른 관심이 없는 사람들도 대문짝만하게 실린 당선작을 보곤 ‘아, 나도 한때 문학소녀였는데(문학청년이었는데)’ 하면서 한숨을 내쉰다. 수많은 낙선자들은 삽화가 곁들여진 당선작을 보면서 ‘이런 신통치 않은 작품을 뽑다니 심사위원이 눈이 삐었군’ 하고 원망을 할 수도 있겠고, ‘이래서 당선작으로 뽑혔구나’ 하면서 분발할 수도 있을 것이다.

아무튼 1월 1일부터 며칠 동안 신문지상에 여러 장르의 당선작이 실리다 보니 문단 사람들은 정초에 만나면 너나없이 새해 복 많이 받으라는 덕담을 한 후에 신춘문예 당선작에 대해 품평을 한다. 어느 신문 당선작은 형편없다느니 어느 신문 당선작이 그중 낫다느니 하면서 일행 중 한 사람은 신춘문예로 화제를 끌어가게 마련이다. 문학이 이래저래 궁지에 몰려 있는 이 시대에, 이렇게라도 문학작품이 화제에 오르는 날이란 1년에 단 두 번, 노벨문학상 발표 때와 신춘문예 당선작이 신문마다 실리는 정초가 아닐까. 하지만 문학서적은 베스트셀러 몇 종을 제외하곤 도무지 안 팔린다니 씁쓸한 기분이 든다.

인터넷 시대가 되어 좋은 점 중 하나는 신문가판대를 뒤지고 다니지 않아도 신춘문예 당선작을 안방에서 다 볼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책을 통해 문학작품을 읽는 것이 아니라 컴퓨터 화면을 통해 보게 되었으니, 이래저래 책은 팔리지 않는 것이다. ‘유사 이래 최악의 도서출판 시장 환경’이라는 지난해 연말에 만난 모 출판사 사장의 말이 귀에 쟁쟁하다. 출판시장의 위축과 아울러 신문의 영향력이 예전에 비해 많이 축소되고 있고 반면 인터넷신문의 영향력이 날로 확대되고 있음도 주목해야 한다. 신문사마다 신문용지 공급업체에 5억 원 정도의 미납금이 있었는데 광고 수입이 줄어들어 이제는 신문사마다 30억 정도씩의 빚을 지고 있다는 말도 들었다. 신문의 영향력 축소와 신춘문예의 영향력 축소와는 상관관계가 없을까?

신춘문예 당선자 중에서 등단 10년이 넘도록 시집이나 소설집을 내지 못한 사례를 조사해본다면 재미있는 결과가 나올 것이다. 전통의 문예지 신인상 수상자들에 비해 등단 당시에는 각광을 받지만 금방 잊혀진 존재, 즉 ‘문단의 미아’ 신세가 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중앙지 신춘문예 당선자만을 따져도 80~90%는 2~3년 내로 잊혀진 존재가 될 것이다. 그러므로 신춘문예 당선자들은 등단 이후에 오히려 각고의 노력을 해야 한다. 특히 지방신문의 신춘문예 당선자들은 습작기가 끝났다고 생각하지 말고 계속 긴장감을 갖고서 좋은 작품 쓰기에 매진해야 할 것이다.

정초에 내가 읽은 신춘문예 시 당선작은 총 22편이다. 경향신문,농민신문,동아일보,문화일보,불교신문,서울신문,조선일보,한국일보 등 8개 신문이 이른바 중앙지이고 강원일보,경남신문,경상일보,경인일보,광주일보,국제신문,대전일보,매일신문,무등일보,부산일보,영남일보,전남일보,전북일보,한라신문 등 14개 신문이 지방지이다. 중앙일보는 작년 9월에 ‘중앙신인문학상’이란 당선작 발표를 했기에 이미 읽었고, 평화신문 신춘문예는 1월 25일에 발표하므로 아직 읽지 못했다.
문학평론가 문혜원, 이재복 씨와 『2009 젊은 시』 편집회의 때문에 정초에 만나 나눈 이야기 중에 ‘올해는 지방지 신춘문예 당선작 중에 좋은 작품이 별로 없다’와 ‘작년도 지방 문예지 신인상 당선작 중에도 좋은 작품이 별로 없다’는 것이 있었다. 이런 결과가 초래된 데 대해서는 이렇게 생각한다. 지방 대도시마다 우후죽순처럼 문예지가 생겨나고 문예지마다 신인을 뽑다보니 실력을 갖춘 신인이 지방지로는 등단을 하려 들지 않게 된 탓이 아닐까. 모모 신문사의 경우 신춘문예 심사를 특정 심사위원이 30년 넘도록 하고 있는데 이는 우려할 만한 일이라는 이야기도 나왔다. 김동리나 서정주 같은 분들도 수십 년 신춘문예 심사를 했으니 우리나라는 원로에 대한 예우가 각별한 나라이다.

신춘문예 등단작들에 대한 이야기도 나왔다. 80년대까지는 좋은 작품이 많이 나왔는데 90년대부터는 신춘문예 당선작 중에 기억에 남을 만한 작품이 잘 안 보인다, 이는 우수한 신인이 작품 활동을 보장해주는 문예지를 등단지면으로 삼게 되었기 때문이 아닌가. 우리 문단의 큰 축제인 신춘문예가 문단의 활력소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고 당선작의 하향평준화 또한 우려할 만한 일인데, 더 큰 문제는 여기에 대해 문제 제기를 하는 사람이 없다는 이야기도 나왔다. 80년대까지만 해도 ‘신춘’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새로운 문학정신을 가진 신인, 다시 말해 기성문인의 작품을 흉내 내지 않고 신인 특유의 신선한 언어 감각과 독특한 상상력, 낯선 표현 기법을 가진 이가 등장하고 했는데 지금은 너무나 상투적인 작품으로 당선이 되니 문단의 청정제 역할을 전혀 하지 못하는 제도가 신춘문예가 돼버렸다는 지적이 잇따라 나왔다. 이런 이유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세계일보는 올해 당선작을 내지 않았다. 심사를 한 문학평론가 유종호 씨와 신경림 시인의 말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발상이나 기법이 모두 비슷비슷하고 세상이나 사물을 보는 눈에도 깊이가 없었다. 아무래도 이것은 어떤 시가 좋은 시인지 구별하지 못하는 데 따른 것이고, 다시 그것은 시를 제대로 읽지 않은 데 연유하는 것이리라. (…) 잘 안 읽히고 시원한 맛이 없는 것도 투고된 작품들을 관류하는 특성이었다. 내용이나 기법이 참신하지 못하고 진부한 것이 많았다.


오죽했으면 이런 심사평을 쓰고 나서 ‘당선작 없음’이라는 결론을 내렸을까. 동아일보는 2003년과 2007년에 당선작을 내지 못했다. 그때 심사평은 이랬다.


무릇 신인이란 녹록치 않은 패기와 자기만의 날카로운 촉수, 뜨거운 열정을 겸비한 열린 가능성이라 할 수 있겠다. 선배들이 만들어 놓은 한계를 돌파하여 의욕에 가득 찬 신선한 경역(境域)을 펼쳐 보이는 것. 그런 까닭에 새로움을 체험하려는 모험심을 엿볼 수 없는 신인의 작품은 오히려 식상함을 가중시킨다. 신인들이 기존의 모방에만 급급해 한다면 우리 문학은 더 이상 희망이 없다. 올해의 응모작들은 그런 면에서 기대에 못 미쳐 안타까웠다.


2003년에는 유종호, 김명인 두 분이 심사를 했는데 이런 평이 나왔고,


현실을 벗어나 비상한 시들보다는 친근한 일상을 그대로 묘사한 시들이 많았다. 그런데 왜 그런 일상을 시라는 장르로 써야만 했는지, 장르적 자의식이라는 것이 있었는지, 일상을 얼마만큼의 시적 사유를 통해 해석하고, 표현하고 있는지 묻고 싶었다. 간혹 현실을 비틀어 풍자를 길어 올린 시들도 있었지만 비문, 오문이 많거나 설명의 문장들을 생경하게 노출시킨 시행들이 많이 눈에 띄었다.


2007년에는 김명인, 김혜순 두 분이 심사를 했는데 이런 평이 나왔다. 이는 아직 시단에 나가지 못한 습작생들에게만 해당되는 이야기가 아니리라. 문예지의 홍수 속에서 시를 쉽게 쓰고 쉽게 발표하는 기성시인들도(나도 물론 여기에 포함된다) 이런 심사평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이제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신인 등용문인 신춘문예와 문예지 당선작의 수준 차이는 거의 없어진 듯하다. 『2007 젊은 시』 수록 20명 중 신춘문예 출신이 5명, 문예지 신인상 수상자가 15명이었고 『2008 젊은 시』 수록 20명 중 신춘문예 출신이 6명, 문예지 신인상 수상자가 14명이었던 것도 이를 증명한다.
전통의 문예지 『현대문학』이 예전에는 추천제를 운용, 숙성의 시간을 가지면서 신인을 문단에 내보냈는데 그 시절의 추천작과 신춘문예 당선작은 작풍이 확실히 달랐다. 그리고 70~80년대 문학사를 수놓게 되는 『창작과 비평』(1966년 창간)과 『문학과 지성』(1970년 창간)을 통해 나온 시인의 면면을 보더라도 신춘문예로 나온 시인의 등단작과는 차이가 있었다. 질적인 차이가 아니라 작품 성향의 차이다. 최승자나 김혜순 시인의 등단작을 떠올려보면 신춘문예에 투고를 해보았던들 예선에도 들지 못했을 것이다. 한편 상당수 신춘문예 당선자들이 유수 월간지와 계간지 신인상 공모에 노크를 해보았자 소용이 없었을 텐데 8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이들은 아무튼 신춘문예를 통해 화려하게 등단, 신문사의 후속 지원이 없어도 시인으로 활동하였다. 등단 이후 활동이 미미한 신춘문예 당선자들은 과거에도 많았지만 말이다.

대한민국은 누가 뭐라 해도 시인 공화국이다. 2008년 한 해 동안 중요 문예지를 통해 등단한 시인의 수는 80명 정도 되는 것 같고 2009년도 신춘문예 당선자는 20명(지방 신춘문예 당선자 포함) 남짓 된다. 1년에 100명의 시인이 새로 태어나는데 동인지나 자비 출판으로 시단에 이름을 올려놓는 사람까지 합치면 훨씬 많을 터, 이제는 정말 장삼이사뿐만 아니라 삼척동자도 시인으로 행세할 수 있는 세상이 되었다. 그런데 신인들이 과연 ‘그럴듯한’ 등단작을 갖고 시단에 나오고 있을까. 등단지면이 너무 많아서 오히려 시단이 하향평준화 되었고, 그렇기 때문에 독자가 떠나버린 것은 아닌지 생각해보아야 할 때이다.
이상하게 올해 신춘문예 당선작 중에는 특별히 좋은 작품이 눈에 띄지 않는다. 심사위원마다 칭찬을 아끼지 않고 있는데 절차탁마한 흔적이 역력한 작품이 별로 없다. 문화의 기류가 전반적으로 가벼워지고 상업성에 치우쳐 작품성을 등한히 하는 작금의 경향이 시인 지망생에게도 전염된 탓이 아닌지. 그래도 기법의 세련미와 주제의 깊이를 아울러 갖춘 작품을 꼽는다면 민구의 「오늘은 달이 다 닳고」(조선일보)와 김은주의 「술빵 냄새의 시간」(동아일보), 이우성의 「무럭무럭 구렁이」(한국일보), 정영효의 「저녁의 황사」(서울신문) 정도가 있겠다. 지방지 신춘문예 당선작 중에는 윤은희의 「아르정탱 안을 습관적으로 엿보다」(무등일보)를 능가하는 작품이 없는 것 같다. 이들의 작품은 『2009 젊은 시』에서 다뤄질 예정이므로 언급을 생략한다.

그런데 종이신문이 아니라 <뉴스제주>라는 인터넷신문에서 공모한 ‘제2회 영주신춘문예’의 당선작과 한국문학방송(DSB) 신춘문예 당선작이 눈에 띈다. 상금도 다른 신문사에 비해서는 턱없이 낮은 100만원이고 심사위원도 문단의 저명신인사가 아니라 정인수 시인(뉴스제주)과 안재동 시인(한국문학방송)이었다.


늙은 두레상에 일곱 개 밥그릇이
선물처럼 둘러앉습니다
밥상도 없는 세간에
기꺼이 엎드려 밥상이 되셨던 어머닌
맨 나중 도착한 막내의 빈 그릇에
뜨거운 미역국을 자꾸자꾸 퍼 담습니다
어무이, 바빠가 선물도 못 사 왔심니더
뭐라카노? 인자 내, 귀도 어둡다이
니는 밥심이 딸린동 운동회 때마다 꼴찌디라
쟁여 두었던 묵은 것들을 후벼내시는 어머니
홀몸으로 감당해야 하는 비바람이 귓속을 막았는지
추억으로 가는 통로도 좁다래지셨습니다
몇 년 만에 둥근 상에 모여 앉은 남매는
뒤늦게 당도한 안부처럼 서로가 민망해도
어머니 앞에선 따로국밥이 될 수 없습니다
예전엔 밥통이 없어가 아랫목 이불 밑에 묻었지예
어데, 묻어둘 새나 있었나 밥 묵드키 굶겼으이
칠남매가 과수댁 귀지 같은 이야기를
손바닥으로 가만가만 쓸어 모으다가
가난을 밥풀처럼 떼먹었던,
양배추처럼 서로 꽉 껴안았던 옛날을 베고
한잠이 푹 들었습니다
문밖에는 흰 눈이 밤새
여덟 켤레 신발을 고봉으로 수북 덮어 놓았네요
하얗게 쏟아진 선물을 어떻게 받아얄지 모르는 어머니
아따, 느그 아부지 댕겨가신 갑따
푸짐한 거 보이, 올핸 야들 안 굶어도 되것구마이
미역국처럼 뜨끈한 목소리를 싣고
일곱 남매가 또 먼 길을 떠나는 새벽
―윤이산, 「선물」 전문


혹자는 이 시를 두고 낡은 정서, 뻔한 이야기, 상투적인 표현이라고 비난할 수도 있겠지만 최소한 독자의 마음을 움직이는 ‘힘’은 지니고 있다고 판단된다. 시의 내용은 칠남매를 둔 과수댁이 멀리서 찾아온 자식들 밥 한 끼 해 먹이는 이야기에 지나지 않는다. 어머니의 자식 사랑이나 가족 간의 끈끈한 정이라는 주제도 낡디낡은 것이다. 하지만 이 시에 좋은 점수를 주고 싶은 이유는 오늘날 우리 시단이 지나치게 상상력과 기교에 높은 점수를 주고 있기 때문이다. 사투리가 묘하게 정감을 불러일으키는 이 시에는 우리들의 삶과 꿈이, 과거와 현재가, 일상과 마음이 잘 녹아 있어 감동을 준다.
한국문학방송 신춘문예는 기성, 신인 불문이라고 공고가 되어 있어서 그런지 2005년 『문학사상』 당선자가 투고, 당선이 되었기에 좀 찜찜하기는 하다.


콩자반을 다 건져 먹은 반찬통을
꺼내 놓는다. 반찬통에는 아직
간장이 남아 있다.
외로울 때 간장을 먹으면 견딜 만하다.

겨드랑이에 팔을 끼워 내가 일으키려 할 때
할머니는 간장을 물에 풀어오라고 하였다
몸은 잔뜩 부어올랐지만 가벼운 영혼을
붙잡기엔 아직 덜 무거웠다.

나는 들어서 알고 있다. 할머니가 젊었을 때
혼자 먹던 것은 간장이었었다는 것을.
방에서 할아버지와 시어머니가 한 그릇의 고봉밥을
나누어 먹고 있을 때
부엌에서 할머니는 외로웠다고 했다.

물에 풀어진 간장은 뱃속을 좀 따뜻하게 했다.
다시 일어설 수 있는 기운을 주었다.
할머니가 내게 마지막으로 달라고 한 음식은
바로 그런 간장.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이후 할머니는
혼자 오랜 시간을 보내었다.
수년째 자식들은 찾아오지 않던 그 방
한 구석엔 검은 얼룩을 가진 그릇이 놓여 있었다.

내가 간장을 가지러 간 사이 할머니는
영혼을 놓아버렸다. 물에 떨어진 간장 한 방울이
물속으로 아스라이 번져 가듯
집안은 잠시 검은 빛깔로 변했다.

비로소 나는 할머니의 영혼이 간장 빛이었다는 깨달았다.

나는 할머니의 손자이므로 간장이 입에 맞았다.
혼자 식사를 해야 했으므로
나는 간장만 남은 반찬통을 꺼내 놓았다.
―하상만, 「간장」 전문


이 시도 가족 간의 정이라는 주제는 「선물」과 별 다를 바 없다. 그런데 이 시는 ‘간장’이라는 매개물에 얽힌 긴 세월의 이야기가 가슴 찡한 울림을 전해준다. 독자는 화자가 들려주는 할머니의 기구한 운명에 대해 애달픈 마음과 함께 측은지심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할머니의 마음이 시커멓게 타 ‘간장 빛’이 되는 제7연은 기법의 측면에서도 탁월하다.
윤이산 씨나 하상만 씨나 인터넷신문의 신춘문예 당선자이므로 시단의 조명을 받을 기회가 없을 것이다. 이 점을 아쉽게 여겨 계간평에다 전문을 실었다. 아무튼 근년의 신춘문예 당선작들에 대해 영 재미가 없다, 밋밋하다, 구태의연하다, 수준 미달이다…… 이런 평가가 중론이니 신춘문예로 등단한 나로서는 안타깝기 짝이 없다. 지방지는 수백 대 일의 경쟁을, 중앙지는 수천 대 일의 경쟁을 뚫고 당선이 되는데 이런 평가를 받고 있으니 도대체 어찌된 일일까. 앞으로 신춘문예에는 개성, 참신성, 실험성 같은 것을 갖춘 작품이 뽑혔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본다. 문예지는 각 문예지마다 성격을 보다 확실히 지녔으면 좋겠다. 물론 작품성 위주로 뽑아야 하겠지만 시인 지망생이 작품을 『실천문학』으로 보내야지, 『문학동네』로 보내야지 하며 선택을 해 보낼 수 있게끔 문예지는 신춘문예와 달리 그 나름의 성격을 지니고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한번 해본다.


―《문학나무》2009년 봄호

출처 : 빛고운 창가
글쓴이 : 빛고운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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