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왜 문학을 하는가 / 안도현
거친 땅 딛고 서라는 세상의 주문에 오직 詩로 대답"
다섯 해 전, 이른바 전업작가가 되려는 마음을 품었을 때, 솔직히 나는 밥이 걱정이었다. 시인은 가난하게, 그리고 엄숙하게 살아야 된다는 통념이 널리 유포되어 있는 한국 사회에서 문학으로 밥을 얻겠다고? 그게 가당한 일이기는 할까? 내가 불순한 꿈을 꾸는 게 아닌가 하고 스스로를 의심한 적도 있었다. 문학에 비해 밥은 여전히 불경스러운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청탁이 오는 대로 넙죽넙죽 받아서 밤새워 자판을 두드렸다. 호구지책이었다. 한 해 동안 이천 매 가까운 산문을 쓴 적도 있었다. 그렇게 하고 나니까 바닥이 보였다. 더 이상 물러설 데도 나아갈 데도 없었다. 기껏 한 공기의 밥을 위해 나를 소진시켜야 한다는 말인가. 또 다른 회의가 나를 짓눌렀고, 다시 시작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문학이 내 속에서 자꾸 꿈틀거렸다.
내가 문학을 여기까지 데리고 온 게 아니었다. 문학이 몽매한 나를 여기까지 끌고 왔다. 글쓰기란, 나라는 인간을 하나씩 뜯어고쳐 가는 일이었던 것 같다. 문학에 의해 변화된 내가 흔들릴 때마다 문학은 다시 나한테 회초리를 갖다 댔다.
문학은 나에게 늘 초발심의 불꽃을 일으키는 매서운 매였다. 문학은 엄하고 무섭지만, 그런 이유 때문에 나는 문학을 가르쳐 준 세상에 대해 고맙게 생각한다.
특히 나는 팔십년대와 함께 이십대의 청춘을 보냈다는 것이 더없이 고맙다. 팔십년대는 풋내기 문학주의자에게 세상이 모순으로 가득 찬 곳이라는 걸 충격적으로 보여주었다. 스무 살의 봄날, 시집을 끼고 앉아 새우깡으로 소주를 마시다가 계엄군에게 걸려 묵사발이 되도록 얻어터진 적이 있었다.
그날 이후, 시집보다 역사나 사회과학을 읽는 날이 더 많아졌다. 가슴에 ‘펜은 무기다’라는 문구가 쓰여진 티셔츠를 입고 돌아다니기도 했다. 골방에서 광장 쪽으로 내 관심이 서서히 이동하고 있다는 것을 천연덕스럽게 드러내면서 말이다.
하지만 현실 속으로 머리를 들이밀수록 시대의 무거움이 버거워 나는 끙끙댔다. 그 끙끙대던, 그 전전긍긍하던 시간들을 나는 참으로 소중하게 여긴다. 문학이 현실 속에서 어떻게 긴장하고 현실에 어떻게 기여해야 하는가.
어떻게 보면 단순한, 그렇지만 한 번은 반드시 통과해야 할 그런 고민을 어깨에 얹어준 것만으로도 팔십년대에게 빚진 게 많다. 지금은 아무도 그런 빚을 얻으려고 하지 않는 세상이지만, 그 빚을 갚으려고 나는 쓴다.
내 등단 작품의 제목이 ‘서울로 가는 전봉준’인데, 왜 하고 많은 인물들 중에 하필이면 시에다 전봉준을 불러냈을까. 이유는 간단하다. 이 시를 쓰게 한 것은 역사책 속에 남아 있는 전봉준의 사진 한 장이었지만, ‘광주’로 일컬어지는 당대의 현실을 지나간 역사를 앞세워서라도 드러내 보이고 싶었던 것이다. 그게 이 세상한테 시로서 빚을 갚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이 시에도 상투적인 엄살이 눈에 거슬리는 부분이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 예를 들면 ‘이름 없는 들꽃’과 같은 표현이 그렇다. 너무 유치하기까지 해서 지금 들여다보면 몸둘 바 모르겠다. 하지만 당시에는 나한테 그것보다 더 절실한 노래는 없었다.
한국에서 시 쓰는 자가 ‘어둠’이라는 비유를 자기 검열 없이 쓸 수 있게 된 시기는 그리 길지 않다. 채 이십년도 되지 않는다. 그러고 보면 이 땅에서 시를 쓰는 일은 슬픔이자 또한 축복이라는 생각이 든다.
어느 날 문득 ‘이름 없는 들꽃’이 ‘애기똥풀’로 보이게 된 시기가 있었다. 해직교사 생활을 마감하고 복직을 했을 때였다. 복직은 모처럼 찾아온 기쁨이었지만, 그것은 다른 한편으로는 씁쓸한 절반의 승리였다. 전교조 활동을 하지 않겠다는 각서를 쓰고 신규 채용 형식으로 학교로 돌아간 것이었다.
우리는 거리에서 머리띠를 두르고 싸웠으나, 돌아간 학교는 변한 게 아무 것도 없었다. 세상이 벽처럼 느껴졌다. 그 벽을 무너뜨리는 싸움을 다시 시작한다는 것은 무모한 일이었다. 무엇보다 나는 지쳐 있었다.
동지는 간 데 없고 깃발만 나부끼는 참담한 세월 속에서 내가 유일하게 할 수 있었던 것은 그나마 시를 쓰는 일 뿐이었다. 돌아보면 팔십년대는 현실의 신명과 시의 신명이 일치하던 시기였다. 현실과 시는 서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마치 기관차처럼 내달릴 수 있었다.
시가 예술성의 울타리를 넘어 탈선을 감행해도 용인을 해주던 시대가 끝나자, 기관차도 기관사도 승객들도 모두 길을 잃고 망연히 철길 가에 주저앉아버렸다.
삶과 문학, 두 가지를 앞에 놓고 나는 뭔가 전환의 기회로 삼지 않으면 안된다고 나 자신한테 주문했다. 그 주문의 목록은 대충 이런 것들이다. 시에서 지나친 과장과 엄살을 걷어낼 것, 너무 길게 큰소리로 떠들지 않을 것, 팔목에 힘을 빼고 발자국 소리를 죽일 것, 세상을 망원경으로만 보지 말고 때로 현미경도 사용할 것, 시를 목적과 의도에 의해 끌고 가지 말고 시가 가자는 대로 그냥 따라갈 것, 시에다 언제나 힘주어 마침표를 찍으려고 욕심을 부리지 말 것, 시가 연과 행이 있는 양식이라는 점을 분명히 제고할 것….
그러자 바깥에서 또 다른 주문이 들어왔다. 이 세상은 복잡하고 갈등으로 얽혀있는 곳인데, 당신의 시는 그런 갈등을 드러내는 것보다는 너무 편안하고 화해하는 쪽으로 한 발 앞서가 있는 게 아닌가? 당신의 시는 낭만적인 구름 위에서 거친 땅으로 좀 내려와야 하지 않겠는가?
그 주문에 나는 이제 대답을 해야 한다. 하지만 술자리에서 취중에 떠들거나 어줍잖은 산문으로 나는 대답하지 않을 생각이다. 오직 시로 나는 말해야 한다. 그리고 서두를 필요도 없다. 시는 천천히 오래도록 쓰는 것이기 때문이다.
한 편의 시를 위해서 무엇보다 오랜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나는 안다. 그래서인지 시를 쓰는 동안에는 시간이 잘 간다. 마치 애인 하고 함께 보내는 시간처럼. 남의 시를 읽을 때도 시인이 장인적 시간을 얼마나 투여했는지 유심히 살펴본다. 시간을 녹여서 쓴 흔적이 없는 시, 시간의 숙성을 견디지 못한 시, 말 하나에 목숨을 걸지 않은 시를 나는 신뢰하지 않는 편이다.
시를 읽고 쓰는 것, 그것은 이 세상하고 연애하는 일이라고 종종 생각한다. 연애 시절에는 나뭇잎 떨어지는 소리 하나에도 예민하게 반응하고, 연애의 상대와 자신의 관계를 통해 수없이 많은 관계의 그물들이 복잡하게 뒤얽힌다는 것을 생각하고, 그리고 훌륭한 연애의 방식을 찾기 위해 모든 관찰력과 상상력을 동원해야 한다.
연애는 시간과 공을 아주 집중적으로 들여야 하는 삶의 형식 중의 하나인 것이다. 가슴으로만 하는 연애, 손끝으로만 하는 연애도 나는 경계한다. 가슴은 뜨겁지만 쉽게 식을 위험이 있고, 손끝은 가벼운 기술로 사랑을 좌우할 수도 있다. 가슴과 손끝으로 함께 하는 연애, 비록 욕심이라 할지라도 내 시는 그런 과정 속에서 태어나기를 꿈꾼다.
몇 해 전에 전주 근교에 작업실을 마련했다. 완주군 구이면이라는 지명을 따서 친구들이 붙여준 이름이 구이구산(九耳九山)이다. 겨우 시 몇 줄 끼적이는 시인 주제에 무슨 작업실이냐고, 누군가 핀잔을 준다 해도 괜찮다.
전업으로 글을 쓰면서 나는 시도 때도 없이 걸려 오는 전화 때문에 골머리를 앓곤 한다. 전화는 도대체 외로워할 틈을 주지 않고, 나를 지치게 만든다. 전화는 나를 불러내고, 나에게 독촉하고, 내가 전화기 옆에 붙어 살도록 명령한다. 그래서 나는 전화벨 소리가 들리지 않는 곳으로 피신해서 외로움이라는 사치를 좀 누리는 중이다.
문학은 여전히 외로운 자들의 몫이라고 생각한다. 외로움을 모르는 문학이 있다면, 외로움의 거름을 먹지 않고 큰 문학이 있다면 그 뿌리를 의심해 봐야 한다. 글을 쓰는 일은 외롭기 때문에 아름다운 일인지도 모른다.
그런 점에서 문학하는 일은 헛것에 대한 투자임이 분명하다. 미국의 어느 교육심리학자가 ‘태양에 플러그를 꽂는 일’이 창의성이라고 말한 것처럼 시를 쓰는 일 또한 그와 별반 다르지 않다. 아무 것도 손에 잡히지 않는 헛것인 줄 알면서도 그것을 쫓아가는 동안 나는 시인이다.
나는 왜 문학을 하는가 / 고은
밤늦게 돌아오는 길에 별들을 본다. 그제서야 별들이 먼저 지상의 나를보고 있었다는 것을 안다.
어떤 비관론자와도 무관하다. 이 세상에는 다른 세상을 위한 종말이 있다. 이 세상은 수많은 흥망성쇠의 시간과 장소만이 아니라 마침내 흥망성쇠그 자체인 것이다.
그렇다 해서 종말이 언제냐고 섣불리 따지려 들지 말라. 다만 그런 세상에서 엄연히 살아가는 것이 너와 나이다. 나의 문학은 이런 세상의 일부분이다.
왜 문학을 하는가? 왜 시를 쓰는가?
비 온 뒤의 앞산처럼 확실한 이런 질문으로 나는 문학을 하지 않는다. 그저 시인이 되고 싶었을 뿐이다. 밀물이었다. 그저 시인이 되었을 뿐이다.
썰물이었다.
시인 노릇 45년이 어느덧 되어가는 오늘에도 이 노릇에 대한 어떤 가설도마련되지 않았다. 일의(一義)란 죽어라고 싫다. 굳이 말하자면 불가피성말고는 내 삶의 궁핍한 역정 가운데서 문학의 이유를 찾아낼 다른 여지가없는지 모른다.
풍경이 시작되었다. 1940년대 후반 중학생이 된 나는 4㎞ 거리의 학교와집 사이 황톳길을 걸어 다녔다. 비오는 날은 우산 대신 도롱이를 걸쳤다.
한국전쟁 이전까지 약 4년 동안 이런 길을 오고 갔으므로 길 가녘 우거진여름날의 각시풀과 꿀먹은 벙어리 같은 돌멩이도 한 핏줄인 양 정이 사뭇들었다.
저녁의 향수가 감수성 근원
방과 후 거의 혼자 돌아오는 시간이 누구에게도 발설하기 싫은 행복이었다. 호젓할 때면 나는 내 동무가 되었다. 그러므로 나는 혼자서 복수(復數)였다.
길은 어쩌다 만나는 장꾼이나 소달구지 말고는 비어 있었다. 미술반은자주 늦게 끝났으므로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저녁 무렵이기 십상이었다.
혼자 길을 걷는 동안 나는 학교와 집의 의무로부터 지극히 자유로웠다.
그런 시간으로 너무 일찍부터 낮 동안의 끝인 저녁에 익숙해졌다.
지나는 길의 마을마다 밥 짓는 저녁 냉갈이 저기압의 땅 위를 가득히 깔려 있을 때의 그 형언할 수 없는 경건한 향수는 한 소년에게 감수성의 근원이 되어 주었다.
새벽의 수탉 우는 소리, 아침 거미줄에 매달린 이슬 보석들과 동정(童貞) 같은 햇빛 소나기, 그리고 대낮의 갑작스러운 적막…들도 찬란한 환경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그것들이 어떻게 나의 저녁 무렵만 하겠는가.
하루 내내 들에서 일한 다음 해가 진 뒤의 연장을 물에 씻어 들고 집으로 돌아오는 농부의 일과에 어느덧 나도 속해 있었다. 저녁은 그렇게 숭고하고 슬펐다.
‘돌아오다’, ‘돌아가다’라는 말이 나에게 달라붙던 것도 그 무렵이었다. 한자 ‘귀(歸)’자가 어쩌다 친정 나들이하는 여자의 기쁨을 담고있다면 인간의 본성 안에 그런 귀향의 심상이 바닥져 있는 것 아닌가.
나중에 내가 쓴 시 중에 유난히 저녁이 많이 나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다른 시인들에게도 저녁은 하나의 주조(主調)였다.
그런 저녁 무렵 나는 꺼므꺼므한 어슬녘을 걷고 있었다. 집을 1㎞쯤 남겨놓은 길 한복판에서 한 물체를 발견했다. 그 우연이야말로 필연이었다.
그 물체는 마치 오랜 발광체처럼 팍 저물어버린 어둠 속에서 빛나고 있었다. 책이었다. 나는 사방을 두리번거릴 겨를도 없이 그 책을 집어 들었다. 새 책이었다.
시집이었다! 한하운(韓何雲) 시집이었다!
온몸이 전류에 휘감겨졌다. 그 시집 속의 글자 하나하나를 어둠 속에서뿌리째 뽑아내어 읽어갔다. 돌부리에 넘어졌다가 일어났다.
아마도 누군가가 사 가지고 가다가 그만 길에 잘못 떨어뜨린 것이리라.
그 시집의 임자를 찾아 나설 생각 따위가 전혀 없었다. 시집은 오직 나를위해서만 거기 있었던 것이다.
그날 밤 시집을 읽고 또 읽었다. 읽으면서 엉엉 울었다.
가도 가도 황톳길….
이 구절은 곧장 내 심장 속의 주술이 되어 주었다. 밤새 뜬눈이었다. 조영암과 최영해라는 사람의 발문도 몇 번이나 읽었다. 먼동이 텄다.
두 가지를 결심했다. 나도 한하운처럼 문둥병에 걸려야겠다는 것과 나도시인이 되어 이 세상의 모든 길을 걸어가며 떨어져나간 썩은 발가락을 노래하고 이 세상의 길을 노래하겠다는 것이 그것이다.
내 심장속 주술이 된 구절
‘한하운시초(韓何雲詩抄)’ 이후 나는 다른 학생들과 달랐다. 그들은아무 것도 모르는 철부지이고 나는 남몰래 철이 들어버린 ‘어른’이 되었다. 점점 미술반이 싫어졌다. 교내 미술 전시회에서 받은 일등상의 기쁨은시 앞에서 무색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수채화에서 유화로 옮겨가야 했다. 그 뿐 아니라 미대를 갓 나온 교사 안태훈은 나에게 풍경화, 정물화 그리고 인물화까지도 강요했다. 아니자신의 시내 작업실로 나를 데려다가 모델 그림까지 그리게 할 것이라고다그쳤다.
이렇듯이 학교에서는 장래의 화가였다. 하지만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서는 내일의 시인이었다. 시인이기를 얼마나 열망했던가.
그런데 바로 1년 전만 해도 나는 화가가 되기를 꿈꾸고 있었다. 외삼촌의 서가에서 반 고흐 전기를 꺼내 보았을 때 나는 ‘오직 고흐이리라. 그렇지 않으면 무이리라’라고 책상머리에 써 붙이지 않았던가.
그렇다면, 이 다음에 시인에의 열망이 다른 것이 되고 싶은 나머지 한때의 열병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다. 나는 그런 가정 때문에 고통스러웠다.
시 혹은 문학은 반드시 그 시대의 어떤 상흔에서 그 의미를 이끌어낸다. 시인은 그러므로 상처받은 혼신(魂身)이다. 나에게 시는 전쟁 이전의 꿈과 전쟁 이후의 절실성으로 가능한 것이었다. 북위 38도선이 무너졌다. 한국전쟁이 일어났다.
그해 6월 27일 학교는 무기 휴교조치밖에 다른 방법이 없었다. 걸핏하면발생하던 단정 반대의 좌익 동맹휴학도 그 뒤를 이은 이승만 지지의 우익결의대회도 사라져 버린 학교 운동장은 바람이 불면 먼지 구름이 몰려가거나 하루 내내 뻐꾸기 소리만 쌓여 있었다.
더 이상 나에게는 호젓한 저녁길이 없었다.
여름 3개월 동안 내 또래의 인민군 병사와 인민위원회 그리고 민청, 여맹 따위의 붉은 완장에 익숙해졌다. 담배를 배웠다. 엽연초를 잘게 썰어그것을 종이에 말아 피웠다.
좌익·우익 핏빛 학살
전선은 낙동강 중류까지 남하했고 진주 남강도 떨어져 나갔다. 9월의 인천 상륙과 함께 거듭된 후퇴가 역전되어 압록강 강물을 떠오기까지 했다.
다시 1ㆍ4 후퇴가 있었다.
이 과정에서 내 고향은 우익의 좌익 학살, 좌익의 우익 학살, 다시 우익의 좌익 학살의 보복으로 살벌한 죽음의 지역이었다. 한국전쟁 인명 희생자 300만 중 1만분의1을 내 고향이 담당한 것이다.
몸에서 썩은 학살 시체 냄새가 15일 이상 없어지지 않은 채 살아 남았다. 나는 여름 나무 그늘에서 읽었던 신석정 시집 ‘촛불’을 아주 덮어버렸다. 시는 그 야만의 계절에 대해서 무능했다.
“아우슈비츠 이후 서정시가 가능한가”라고 외친 아도르노의 말은 한반도에도 적용되고 남았다.
한국시 50년대 후반 또는 60년대 전반의 모더니즘은 그것이 서구 모더니즘의 뒤늦은 모방을 모면할 수 없는 것이 사실이지만 한국전쟁이라는 거대한 상황을 통한 전통 단절과도 깊이 관련된다. 요컨대 전쟁은 시를 묻어버렸고 역설적으로 다시 시를 불러들였다.
나는 널브러진 시체더미 앞에서 인간의 정체를 다 알아버린 듯한 허무에사로잡혔으며 고향을 떠난 뒤 내내 떠돌았던 모든 산야와 도시는 폐허에다름 아니었다.
내 문학은 그런 폐허를 떠도는 자의 비가(悲歌)이기를 자처했다. 그래서시의 본적지는 폐허이고 시의 현주소는 폐허의 기억을 가진 미완의 역사현장인 것이다.
세 살 무렵의 아이는 “왜?”로부터 세상을 시작한다. “왜 아빠의 젖은젖이 안 나와?” “왜 엄마 구두하고 아빠 구두하고 달라?”
이런 의문이 인간을 다른 생명체와 구별짓는 것인지 모른다. 그러나 문학에서, ‘왜 문학을 하는가’라는 질문은 세 살 무렵으로 돌아갈 수 없다.
그것은 문학의 오늘에 있어야 할 새로운 해석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문학의 힘은 해답에 있지 않고 치열한 질문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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