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은 어떻게 써야 하나
최승범
수필은 어떻게 써야 하나. 딴은 그동안 몇몇 잡지사의 수필 청탁에도 응해왔고, 내 나름의 몇 권 수필집을 내놓기도 하였다. 또한 대학에서는 <수필론>의 강의를 맡고 있기도 하다. 그러나 막상 붓을 움직이자니 자신이 없다.
나의 두번째 수필집 『여운의 낙서』(1973)를 엮고 나서, 나는 다음과 같은 후기를 덧붙인 바 있었다.
수필의 정체·본령을 파고 들면 들수록 확연한 모가 잡히질 않는다. 그러면서도 수필에 대한 매력만은 잊을 수가 없다. 수필을 쓰고 싶은 일이나 수필을 알고 싶은 일이 매한가지다. 내 삶을 갈아(耕)가는 한, 수필(隨筆)하는 일에서 나는 벗어날 수 없을 것 같다.
이로부터 17년이 지난 오늘이지만, 수필에 대한 생각은 그제나 이제나 나아진 것이 없다. 오직, 그 동안 수필의 매력에 이끌려 오면서 생각한 바 몇 가지를 들어 이 글을 이어보고자 한다.
먼저 수필이란 무엇인가를 잠시 살펴두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이제 ‘수필이 문학이다’엔 누구나 이의를 말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른바 ‘신문학’의 출발 이후, 특히 30년대 초반만 해도 문학인 간에 있어서조차 수필의 문학성을 놓고 회의적인 이야기가 있었다. 다음 임화(林和)의 글(『文學과 論理』, 1940)로도 짐작할 수 있다.
몇 해 전 어느 문예잡지의 좌담회에서 수필에 관한 이야기를 교환한 일이 있었다. 자세히 기억치는 못하나 이야기의 초점은 아마 수필도 과연 다른 문학, 이를테면 소설과 같이 하나의 독립한 장르로써 취급할 수 있느냐 없느냐는 것이었던 듯싶다. 그때 이런 제목이 골라진 것은 수필이 차차 성황해가므로 문학하는 사람들이 이런 것을 쓰는 데다가 다분의 정력을 경주해서 족한지 아니한지 하는 문제가 아니었는가 생각된다. 그런데 당시로부터 벌써 5~6년의 세월이 지났고, 이즈음에 와서는 잡지에는 물론 신문에까지 수필이 여간 많이 실리는 것이 아니다.
임화가 이 이야기를 『문학과 논리』라는 그의 평론집에 수록하기 전 글로 쓴 것이 1938년이니까, 이로부터 5~6년 전이라면 30년대 초반이 된다. 오늘날과 같이 수필이 하나의 독립한 문학 양식으로써 자리를 차지하기까지에는 이무렵 김기림(金起林, 『수필을 위하여』, 1933)·김광섭(金珖燮, 『수필문학 소고』, 1934)·김진섭(金晋燮 『수필의 문학적 영역』, 1934) 등의 노력에 힘입은 바 크다는 생각이다. 이들은 이론과 실제 작품으로 우리의 수필문학 정립에 기여하였기 때문이다.
이후, 수필의 문학적인 특성에 관하여 많은 논자들의 이야기가 있어 왔다. 나도 졸저 『한국수필문학연구』(1980)에서 다음 6가지를 들어 말한 바 있다.
①형식의 자유성 ②개성의 노출성 ③유우머와 위트성 ④문체와 품위성 ⑤제재의 다양성 ⑥주제의 암시성
등이 곧 그것이다. 여기서는 딱딱한 이야기를 피하고, 한 편의 수필로 수필의 이모저모를 말한 피천득(皮千得)의 「수필」에서 몇 가지를 들어 보고자 한다.
⑴ 수필은 청자 연적이다. 수필은 난(蘭)이요, 학(鶴)이요, 청초하고 몸맵시 날렵한 여인이다.
「수필」의 서두다. 이 서두의 멋지고도 은유적인 표현은 수필의 문학적인 한 특성을 말해주고 있을 뿐 아니라, 그 특성을 말해줌에 있어서도 수필적인 표현으로 하였다.
청자 연적의 저 은은하고도 귀품스러운 빛깔, 난초의 잎이 지닌 선(線)과 꽃이 지닌 방향(芳香), 학이 앉았을 때의 모양이나 비상할 때의 모습, 여인의 호리호리 청초하고 날렵한 몸맵시, 이 모두가 얼마나한 멋인가. 시적(詩的)인가.
수필은 이러한 시적인 멋을 풍겨주는 산문이어야 한다는 이야기가 된다.
⑵ 수필의 색깔은 황홀 찬란하거나 진하지 아니하며, 검거나 희지 않고, 퇴락하여 추하지 않고, 언제나 온아우미하다.
수필과 시, 수필과 평론, 수필과 연구논문 등의 다른 점이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한다.
황홀 찬란하게 번쩍거리는 비단에 시를 비길 수 있다면, 수필은 ‘비둘기빛이거나 진주빛’ ‘번쩍거리지 않는 바탕에 약간의 무늬가 있는 비단’이라는 것이다. 흑백을 가리는 게 평론이라면, 수필은 그렇듯 싹독싹독 잘라 말하지 않아도 읽는 사람이 분간하고 ‘미소’를 띠게 한다는 것이다. 또 연구논문이란 새로운 주장이 나오면 퇴락하여 추해지기 쉬우나, 수필은 사람들의 마음에 한 번 젖으면 언제나 그 빛으로 남아 있게 된다는 이야기다. 연구논문을 소설로 바꾸어 생각해도 마찬가지다.
⑶ 수필의 재료는 생활경험, 자연관찰, 또는 사회현상에 대한 새로운 발견, 무엇이나 다 좋을 것이다. 그 제재가 무엇이든지간에 쓰는 이의 독특한 개성과 그 때의 무우드(氣分)에 따라 ‘누에의 입에서 나오는 액(液)이 고치를 만들 듯이’ 수필은 써지는 것이다.
수필의 제재는 우리의 눈에 와 닿는 무엇이거나 다 쓸 수 있다는 것이다. 오직 그 개성적인 독특한 눈으로 바라보고 그것을 자연스럽게 토로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수필은 무엇이라도 담을 수 있는 용기(容器)라고도 볼 수 있을지니, 무엇을 그 속에 담던 그것은 오로지 필자 자신의 자유로운 선택에 맡길 수밖에 없다.(김진섭)
수필의 대상은 사유(思惟)의 전영야(全領野)인 것이다.(김동리)
위 이야기도 같은 맥락이다.
어느 면, 문학평론의 대상은 문학이어야 하듯, 시를 쓰려면 시적인 것을, 소설을 쓰려면 소설적인 것을, 희곡을 쓰려면 희곡적인 것을 제재로 선택해야 하는 괴로움이 따를 것이다. 그러나 수필을 쓰기 위하여 수필적인 제재를 따로 찾을 필요는 없다는 이야기다.
문제는 무엇을 제재로 하여 말하든 ‘말하는 사람, 그 사람의 심경이 전인생 위에 확충되어 있기만 하면, 그 말한 것은 반드시 문학적인 가치를 가져오기 마련인 것이다.
다시 『문학과 논리』에서의 인용이지만, 임화는 수필의 문학적인 가치를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참말 좋은 수필이란 일상의 지지한 사소사(些少事)를 사상의 높이에까지 고양하고 마치 거목의 하나하나의 잎사귀가 강하고 신선한 생명의 표적이듯이 일상사가 모두 작가가 가진 높은 사상, 순량(純良)한 모랄리티의 충만한 표현으로써의 가치를 품어야 한다.
여기서도 강조된 것은 수필에 있어서의 제재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제재에 대한 작가의 안목이나 사상이라는 것이다.
⑷ 수필은 독백(獨白)이다. 소설가나 극작가는 때로 여러가지 성격을 가져보아야 된다. 쉑스피어는 햄레트도 되고 폴로니아스 노릇도 한다. 그러나 수필가 램은 촬스 램이면 되는 것이다. 수필은 그 쓰는 사람을 가장 솔직히 나타내는 문학 형식이다.
수필의 가장 근본적인 특색의 하나를 말하였다. 수필은 한 마디로 말하여 ‘자기표백(自己表白)의 문학’ ‘personal-note’ ‘필자의 심적(心的) 나상(裸像)’이라고 한 것도 이 점을 단적으로 들어 말한 것이다.
서구에 있어서 수필의 원조라 일컬음을 받는 몽테뉴도 그의 『수필집』의 서문에서,
내가 그리는 것은 내 자신이다. 나의 결점까지도 나의 수필에서 읽혀질 것이다. 내 자신이 이 수필집의 내용이다.
고까지 말하였다. 일본의 한 영문학자도 수필의 이 특색을 강조하여,
수필에 있어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요건은 필자가 자기 자신의 개인적 인격적인 색채를 두드러지게 드러내는 데에 있다. 그 본질에서 말할 때, 기술(記述)도 아니며 설명도 아니요 논의(論議)도 아니다. 보도를 주안으로 하는 신문 기사가 비인격적(In-personol)으로 기자 그 사람의 개인적 주관적인 노오트를 피하는 것과는 정반대로 수필은 극단적으로 작자의 자아(自我)를 확대하고 과장하여 씌어진 것으로, 그 흥미는 전혀 personol-note인 점에 있다.
고 하였다. 모두 같은 맥락의 이야기들이다.
⑸ 덕수궁 박물관에 청자 연적이 하나 있다. 내가 본 그 연적은 연꽃 모양을 한 것으로 똑같이 생긴 꽃잎들이 정연히 달려 있었는데, 다만 그중에 꽃잎 하나만이 약간 옆으로 꼬부라졌었다. 이 균형 속에 있는 눈에 거슬리지 않는 파격(破格)이 수필인가 한다.
이는 수필의 형식이 지닌 특성을 암시한 것이라고 본다. 흔히 수필의 형식을 말하여,
무형식이 그 형식적 특징이다.(金珖燮)
‘붓이 가는 대로’의 형식으로써 산문화한 것이 수필의 일반적인 형식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어떤 고정된 형식에 맞추어서 쓰는 것이 아니고 가장 자유롭게, 시나 소설과 같은 특별한 형식의 제한이 없이, 붓이 가는 대로 쓸 수 있는 것이다.(韓黑鷗)
고 하였다. 물론 수필의 형식은 이러한 것이다라고 제시할 수 있는 하나의 본보기를 우리는 가지고 있지 않다.
하나의 연적에 똑같이 생긴 꽃잎들을 정연히 놓아가는 일이란 어떠한 형식만을 그대로 좇는 일이 된다. 이것은 어쩌면 기계적으로 되풀이만 하면 되는 쉬운 일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와 같은 일로 한 편의 수필을 이룰 수 있다면,
똑같이 생긴 꽃잎들을 정연히 놓아가는 일
을 수필의 형식으로 제시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수필은 그러한 일이 되풀이되는 것이 아니라, 정연히 꽃잎틀을 놓아가다가,
그 중의 꽃잎 하나를 약간 옆으로 꼬부라지게 하는 일
정연한 균형 속에 있는 꼬부라진 꽃잎이면서도 눈에 거슬리지 않는 파격
에 수필의 멋은 있다는 이야기다. 굳이 수필의 형식을 들라면, 이 멋을 부릴 수 있는 ‘파격’일 수밖에 없다. 이 ‘파격’은 파격을 짓는 사람, 또 파격을 짓는 상황에 따라서 다를 수밖에 없다. 따라서 수필의 형식이라면 일정한 것이 없는 ‘불구격투(不拘格套)’의 자유성을 지닌 것이라 할 수밖에 없다.
이상 피천득의 「수필」에서 수필이 지녀야 할, 문학적인 특성의 몇 가지를 들어 보았다. 자못 시적이고 은유적인 표현의 「수필」이지만, 여기서 우리는 수필이란, 문학의 다른 양식과 달리 어떠해야 하고 어떻게 있어야 하리라는 것도 다시금 생각해 보게 되었다.
수필을 어떻게 써야할 것인가는 이 생각으로부터 각자가 스스로 풀어나가야 할 문제다.
사실 문학이란 이론만으로 쓰여지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다. 문학 뿐이랴. 미술도 음악도 마찬가지다. 이론에 밝다고 꼭 좋은 작품은 내놓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도 흔히 무슨무슨 작법(作法)같은 것을 흔히 말하고, 그러한 것에 관한 책들도 내놓고 있다.
나도 졸저 『수필 ABC』(1965)에서 ‘수필 쓰는 법’의 한 장(章)을 마련하여 다음 몇 가지를 들어 말한 바 있다.
①자기의 렌즈를 갖자 ②일단의 구상은 필요하다. ③서두에서부터 관심을 이끌도록 하자 ④’누에가 실을 뽑듯’ 그렇게 써 나가자 ⑤품위있는 글이 되도록 하자 ⑥길이는 되도록 3천자 내외로 하자
는 것들이었다. 이제 보면, 여기저기서 줏어다가 열거한 것도 같고, 또 꼭 수필만이랴 다른 문학에도 마찬가지의 이야기지 않겠느냐는 항변도 있지만, 그때 내 나름으로는, 수필을 쓰고자 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수필을 써 나가기 전에 먼저 가져야 할 마음가짐으로 이러한 여섯 가지를 들어 보았던 것이다. 그러나 오늘에도 수필을 쓰고자 한 사람이면 이만한 유의점은 필요한 것이 아닐까. 예문을 들면서 다시 생각해 본다.
⑴ 나는 이 바위 앞에서 바위의 내력을 상상해 본다. 태초에 꿈틀거리던 지심의 불길에서 맹렬한 폭음과 함께 퉁겨져 나온 이 바위는 비록 겉은 식고 굳었지만 그 속은 아직도 사나운 의욕이 꿈틀대고 있을 것이다라고 .
그보다도 처음 놓여진 그 자리 그대로 앉아 풍우상설(風雨霜雪)에 낡아가는 그 자세가 그지없이 높이 보였다. 바위도 놓여진 자리에 따라 사상이 한결같지 않다. 이 각박한 불모(不毛)의 미가 또한 나에게 인상적이었다.
이는 조지훈(趙芝薰)의 「돌의 미학」 중 한 대문이다. 누구나 ‘바위’에서 이러한 생각을 가질 수 있을까. 이것은 어디까지나 지훈의 ‘렌즈’에 비친 바위다. 지훈의 ‘렌즈’는 지훈의 눈이요 안목(眼目)이다.
스위스 조각가 쟈코메티는,
눈에 보이는 대로를 그린다.
고 했다. 그러나 그의 그림이나 조각은 사진기의 렌즈에 비친 어떠한 풍경도 어떠한 사람도 아니었다. 쟈코메티의 눈이 아니고는 볼 수 없는 풍경이요 사람이 그의 작품에는 담겨지고 조소되었다.
「돌의 미학」은 지훈의 안목이 아니고는 쓰여질 수 없는 수필이다. 지훈은 또 다른 한 편의 글에서,
아안(雅眼)으로 속(俗)을 관(觀)하면 속도 아가 되고, 속안(俗眼)으로 아를 관하면 아도 곧 속이다.
이 말을 한 바 있다. 수필을 쓰기 위해서는 이 ‘아안’이 필요하다. 아안은 누구에게나 일조일석에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스스로가 부단한 ‘눈의 훈련’을 통해서 비로소 가질 수 있는 ‘렌즈’인 것이다. 피천득의 「수필」에서 볼 수 있는 또 하나의 명구,
수필은 청춘의 글은 아니요 설흔 여섯 살 중년 고개를 넘어선 사람의 글이다.
는 말도 그만한 세상살이·사람살이에서 ‘눈의 훈련’을 거쳐온 사람만이 수필다운 수필을 쓸 수 있다는 이야기로 받아들여서 좋을 것이다.
알렉산더 스미스의 말,
수필을 쓰는 사람은 천하가 다 아는 바람둥이, 무슨 일이고 못할 게 없다. 민감한 귀와 눈, 흔히 있는 사물에서 무한한 암시를 식별하는 능력, 생각에 잠기는 명상적인 기질, 이 모든 것만 있으면, 수필가로서 수필 쓰는 일을 시작할 수 있다.
에서 수필가의 요건으로 든 ‘귀와 눈’ ’능력’ ’기질’이란 것도 따져보면 ‘눈의 훈련’을 통해 가질 수 있는 높은 ‘안목’을 이야기한 것이 된다.
수필을 쓰고자 하면, 평소 사물에 대한 높고도 우아한 자기 안목부터 부단히 닦아 지녀야 할 것이다.
⑵ 붓가는 대로 생각나는 대로 쓴 글이 수필이라고들 하지만, 막상 수필을 많이 써 본 분이면 이런 안이한 수필작법에 동의하지는 않을 것이다. 말하듯이 그대로 써 내려가면 된다는 말도 수긍이 안 간다. 글자로 표현된다는 것은 작품을 뜻하는 것이다. 작품이란 소재와 주제가 겸비되어야 하고 또 매끈하게 다듬어져야 한다. 형식과 내용이 조화되고 통일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수필도 하나의 작품일진대 이런 조건이 갖추어져야 하는데 이것을 생각나는 대로 말하듯이 붓가는 대로 써버릴 수는 없다. 물론 쓸 수는 있지만 그것은 하나의 예술적인 작품으로 승화될 수는 없다. 낙서가 아니면 붓장난의 소산일 뿐이다.
이는 장덕순(張德順)의 수필론 「힘들게 써서 쉽게 읽혀져야」의 서두 부분이다. 흔히, 수필의 글자 풀이, ‘따를 隋, 붓 筆에서 붓가는 대로 쓰여진 글’이라는 안이한 생각을 갖기가 쉽다. 수필을 쓴 사람의 입장에서는, ‘붓가는 대로 마음 내킨 대로 쓴 글인데’의 겸사로 수필을 말할 수 있을지라도(사실 수필이란 말을 처음 쓴 사람의 의도는 그러한 것이었다), 문학인 수필을 놓고의 이러한 생각은 금물이다.
수필의 형식이 자유롭다고 해서 막연히 붓을 들고 원고지 앞에 잠깐 써낼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한다면 수필을 위해서 불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실제로 작가에 따라서는 대충의 구상만으로 원고지를 메꾸어나갈 수도 있을 것이다. 톨스토이는 대충의 구상만으로 붓을 잡았고, 써나가는 동안에 그 구상을 다져 갔다고도 한다. 그런가하면 도스토엡스키는 『죄와 벌』의 구상에 3년이 걸리고 몇 권의 노오트가 필요했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길이에 있어서는 소설에 비할 바 없는 짧은 길이의 수필이래도 무엇을 내용으로 어떻게 엮어나갈 것인가, 주제·제재·줄거리의 구상은 필요하다.
‘균형 속에 있는 눈에 거슬리지 않는 파격’의 ‘균형’과 ‘파격’을 생각하는 것도 구상에 포함되는 일이다. 수필의 초보자인 경우, 이러한 구상은 더욱 필요하리라는 생각이다.
⑶ 문장의 첫 귀절이라면, 글을 쓰는 이는 누구든지 경험한 일이겠지만 글에 있어서 최초의 1귀 같이 중요한 것은 없을 것이다. 최초의 1귀, 이것을 얻기 위해서 말하자면 모든 문장가의 노심초사는 자고로 퍽 큰 듯 보이고 그만큼 이 1귀는 문장의 가치에 대해서도 결정적인 세력을 가지고 있다. 이곳에 문장을 있게 만드는데 흰 원고지의 유혹도 확실히 무시할 수는 없지만 어데서 졸연히 때늦이 솟아 나왔는지 모르는 이최초의 1장 같이 문장인에게 창조의 정력을 일시에 제공하므로 해서 팔면치구(八面馳驅)를 하게 하는 요소도 없을 것이니, 백 사람의 문장가를 붙들고 물어본다면 그 중에 여든은 가로되 이 최초의 1장이 얼마나 고난에 찬 최대최시(最大最始)의 문장적 위기를 의미하는 동시에 그의 모든 준비를 발전시키는 가장 중요한 지도자임을 말하리라.
이는 김진섭의 「문장의 도」의 한 대문이다. 여기 ‘문장’을 수필로 바꾸어 생각해도 마찬가지다. 수필이 짧은 글이라는 것을 생각할 때, 이 서두의 몇 줄은 독자의 흥미와 긴장을 이끌기 위해서 더욱 중요하다는 생각이다.
계용묵(桂鎔默)은 그의 수필 「침묵의 변」에서,
이 서두 1행 때문에 살이 깎인다. 8·15 이후 내가 들었던 붓을 놓고 침묵을 지키기 거의 이태이거니와 구상까지 다 되어 있는 것도 이 서두를 내지 못해 머리 속에서 그대로 썩어 나는 게 4,5개나 된다.
고 했다. 이는 물론 소설의 경우이지만 서두가 중요하다고 하여 지나치게 거의 집착하다 보면, 이처럼 아예 글을 쓰지 못하게 될 것이다. 하여, 이태준(李泰俊)은 서두를 쓰는 요령으로, ‘①너무 덤비지 말 것이다 ②너무 긴장하지 말 것이다 ③기(奇)히 하려 하지 말고 평범하려 하면 된다’의 세 가지를 들어 말하였다.
한 편 수필의 구상이 이루어졌으면, 주제나 제재, 또는 줄거리를 암시할 수 있는 것으로부터 그 서두를 시작하는 것이 무난할 것이다. 줄거리에서 서두를 이끌어 내고자 할 때에는 인물·시간·배경에 관한 말로 첫줄을 시작하는 것도 쉽게 풀어나가는 방법의 하나가 되겠다.
⑷ ‘최선의 책이란 그것을 읽는 사람이 나도 쓸 것 같다고 생각하는 책이다.’ 이것은 빠스깔의 말이다. 사실 그렇다. 그렇게 쉽게 쓸 수 있다면 나도 쓸 수 있다고 느끼게 하는 책, 그것이 정말 잘 쓴 책이다. 얘기도 그렇다. 정말 훌륭한 이야기란 쉬운 말로 쉽게 하면서 그 속에 교훈과 생명이 배어 있는 말이다. 들어서 알 수 없는 이야기는 말하는 사람 자신도 모르고 하는 이야기다. 대학에서 강의를 해보면 그것을 절실히 느낄 수 있다. 완전히 내 것이 된 지식일수록 쉽게 이야기 할 수 있다. 내가 아직 소화하지 못한 지식일수록 어려운 말로 어렵게 얘기하게 된다. 쉬운 말로 할 수 없으니까 어려운 말로 캄프라쥬하는 것이다. 문장의 호흡도 얘기의 호흡과 마찬가지라고 나는 생각한다.
안병욱(安秉煜)의 『문장도』에서 옮긴 것이다. 쓰는 사람은 자연스럽게 흐르는 물처럼 써야 하고, 읽는 사람은 쉽게 느끼고 젖을 수 있어야 한다.
‘누에의 입에서 나오는 액(液)이 고치를 만들 듯이’ 수필은 써지는 것이라고 한 피천득의 인용은 알렉산더 스미스의 『On the writing of essays』에 있는 말이다. 누에가 토사구(吐絲口)로부터 실을 뽑아 고치를 만드는 광경을 보면 지극히 수월스럽다.
이만한 ‘자연적인 유로(流路)’를 위해서는 그렇게 되기까지의 공정이 필요하다. 누에가 섶에 오르자면 넉 잠을 자고 다섯 돌을 맞는 탈바꿈이 있어야 한다.
한 편의 수필을 자연스럽게 흐르는 물처럼 쓰자면 먼저 아는 것이 많아야 할 것이다. 수필가에게 폭넓은 견문과 박학다식, 그리고 깊은 사색을 요구하는 것도 이에 말미암은 것이다.
⑸ 꽃가게 앞에서 고전(古典)과 양장(洋裝)이 가지런히 발을 멈춘다. 소담한 꽃묶음을 한 아름씩 안으며 맑고 아름답기가 첫애기를 기르는 산모와 같다.
이는 이동주(李東柱)의 「꽃」의 서두다. 정갈한 표현의 멋을 느끼게 한다. 비유가 시적이다. ‘고전’과 ‘양장’은 한복을 입은 여인과 양장 차림의 여인을 일컬음이다. 「꽃」의 중간에는,
사람도 그늘에 살면 생선처럼 상하기 마련인데 제마다 어둔 방, 이 한묶음 꽃을 고작 은촛대에 불을 켜듯 환히 밝히면 때로 후기(嗅氣)와 음습(陰濕)을 가시는 분향(焚香)일 수도 있는 일.
의 일절도 있다. 앞의 두 여인의 신분과 이들이 꽃묶음을 사든 까닭도 암시되어 있다.
「꽃」의 하반부(轉)에 가면,
취안(醉眼)으로 꽃을 대한 사나이란 죽순밭을 어질르는 악동(惡童)과 같이 심사가 사나와 화즙(花汁)으로 마구 문질러야 몸이 풀린다고.
의 구절이 있다. 이어서 이른바 홍등가에서 들을 수 있는 대화가 나오고,
비린 외어(外語)가 어색지 않다. 하룻밤 청춘이 박리로 팔리는데, 흥정에 따라 에누리가 있고 악착같은 거간이 붙는다. 정희와 희순이는 간간 나들이를 한다. 때로 꽃가게 앞에서 가지런히 발을 멈춘다.
로, 「꽃」의 결말이 맺어진다. 사람살이에 있어서도 그늘진 곳의 추한 이야긴데, 「꽃」을 읽으면 그러한 것을 느낄 수 없다. 조촐하고 정갈한 글발은 오히려 멋까지를 느끼게 한다.
수필은 읽어서 멋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 멋은 글발에 배어 있는 유모어나 위트로 드러난다. 수필 쓰는 이는 어떻게 표현하는 것이 읽는이에게 회심의 미소를 짓게 하고 삼박한 재치를 안겨줄 수 있을 것인가를 생각할 일이다.
다음은 수필의 길이에 관한 문제다. 나는 『수필 ABC』에서 ‘길이는 되도록 3천자 내외로 하자’고 한 바 있으나, 이는 어디까지나 수필을 써보고자 하는 초보자를 위해서 한 말이었다.
수필의 길이는 참치부제하다. 마해송(馬海松)의 「편편상(片片想)」과 같은 원고지 한두장의 짧은 길이의 것일 수도 있고, 이은상(李殷相)의 「무상(無常)」이나 김태길(金泰吉)의 「흐르지 않는 세월」처럼 한 권의 책이 되는 길이의 것일 수도있다.
수필을 쓰고자 할 때 이상 몇 가지를 유의하였으면 싶다는 것으로 들어 보았다.
그러나 앞에서도 이야기한 바와 같이 글이란 이론만으로 잘 쓸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실제로 직접 써보면서 스스로 글 쓰는 법을 터득하는 길이 상책이라는 생각이다.
이러한 점에서, 수필 쓰는 법이 뭐네눠네 하는 너절한 이야기보다도 『후산시화(後山詩話)』에 나오는 구양수(歐陽脩)의 말,
-간다(看多-多讀)
-고다(做多-多作)
-상량다(商量多-多思)
로 이 글의 결말을 대신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구양수는 문장에 익숙해지는 요령으로 이 3가지를 들었지만, 수필도 먼저 문장이 되어야 하느니만큼, 이 3가지는 바로 수필에 익숙해지는 요령으로 보아 다를 것이 없겠다.◑
◇최승범 문학박사 전북대 국문과를 졸업했다. 58년 「현대문학」으로 등단했으며, 한국문인협회, 예총 전북지부장을 역임했다. 저서로 『蘭緣記』, 『韓國隨筆文學硏究』, 『바람처럼 구름처럼』 , 『무얼 생각하시는가』, 『풍미산책』, 『거울』, 『蘭 앞에서』, 『3분읽고 2분생각하고』, 『朝鮮陶工을 생각한다』 등이 있다. 정운시조상, 현대시인상, 학농시가상, 가람시조문학상, 황산시조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69년 「전묵문학」을 창간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으며, 전북대학교 국문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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