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를 찾는 그대에게 / 강인한
저는 우리 집사람보다 이십 킬로그램 정도 가벼운 체중을 소유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보시다시피 이렇게 깡마른 체구라 우리 학교 아이들은 저에게 "멸치"라는 별명을 붙여서 부르고 있는데,
그게 전 못마땅합니다. 그 이유는 아이들의 단순 사고 때문입니다.
"조용한 멸치"라든가 "이쁜 멸치" 혹은 "태평양 멸치"라고 불러준다면 좋겠는데 아이들은 너무 단순해요.
"조용한 멸치"라고 말하는 저변에는 단순 사고를 넘어서는,
복합적이고 차원이 한 단계 상승한 사고력에서 나온 나올 수 있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안경 쓴 여우", "썩은 미소" 같은 별명을 우리 고등학교 시절에는 많이 불렀고 즐겼습니다.
요즘 아이들 하향 평준화가 돼 가지고 해가 갈수록 바닥 모르는 주식 시세처럼
점점 더 미련해지고 멍청해지고 있는데, 이거 큰일 났어요.
책을 멀리하고 컴퓨터나 오락 게임에 빠져서 더욱 그런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 중에 소수의 몇 명은 뛰어난 아이들도 있으니 다행이지요.
우리 학교에 이것저것 가리지 않고 엄청나게 책을 많이 읽는 아이가 하나 있습니다.
학교 성적이 일 학년 때는 중간 정도였는데
삼 학년이 된 지금은 전체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들고 있습니다.
그런 소수의 엘리트가 결국 우리 나라를 이끌어나갈 것이므로
우리 나라가 유지되고 발전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나이 사, 오십이면 머리가 굳어져서 무엇을 해도 발전이나 향상이 없다고들 말합니다.
그거 틀린 말입니다. 제 경우를 하나 예로 들어보지요.
삼 년 전까지 저는 바둑 실력이 칠 급 정도였습니다.
인터넷이 학교에 들어오게 되면서 이런 저런 것들 구경을 하다가,
인터넷으로 바둑을 둘 수도 있다는 걸 알고 무척 반가웠습니다.
인터넷으로 바둑을 둔다는 것 그건 신대륙의 발견이었습니다.
그래서 용기를 내 동네 피씨방엘 갔습니다. 피씨방 주인은 나이 많은 사람이 찾아오니 어쩐지 떫은 기색이었습니다.
피씨방에 온 아들이나 누구를 데려가려고 찾아온 걸로 안 것 같았어요.
아, 나도 피씨방에 바둑을 두러 온 사람이라고 하니까 특별 대우를 해주대요.
엘에이에 사는 칠 급, 울산 칠 급, 서울 칠 급, 대구 칠 급을
인터넷으로 만나서 바둑을 두는 것이 그렇게 재미있었습니다.
그 해 겨울 방학 내내 피씨방을 다녔습니다.
언젠가는 함박눈이 내리는 밤 세 시에 집에 들어가기도 했어요.
하도 안 되어 보였던지 집사람이 인터넷 장난감을 우리 집에도 설치했습니다.
하루에 최소 서너 판, 많이는 열 판 정도 바둑을 두었지요.
나보다 잘 두는 고수들 바둑도 구경하고……. 지금은 제 바둑이 삼 급쯤 됩니다.
글쓰기도 마찬가집니다.
글쓰기에 미쳐서 한 삼 년 노력한다면 돌팔이 시인, 수필가가 넉넉히 되고도 남을 거예요.
요컨대 가장 중요한 게 그겁니다. 미쳐야 한다는 것!
바로 뜨거운 열정이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저는 스물세 살에 문단에 등단하였는데요,
실은 고등학교 2학년 때부터 신춘문예에 응모해서 떨어지고 떨어지고 … 그랬지요.
심사위원들이 천재를 몰라주는구나 하고 야속하기도 했고 한편으론 오기가 생깁디다.
대학에 들어가서부터 본격적인 글쓰기를 하였습니다.
시도 쓰고 소설도 쓰고, 막 썼습니다. 그 무렵에는 화장실에 가서도 시를 끙끙거렸고,
신문을 보면서 신문 기사나 제목에서 시적인 영감을 떠올리기도 하였고
심지어는 꿈속에서도 시를 쓸 만큼 시에 온통 미쳐 있었습니다.
결국 그렇게 한 오 년 미친 셈입니다, 신춘문예에 당선되기까지.
사람들이 흔히 "피나는 노력"이라고 말하는 것―
그게 어떤 건지 감이 잡히지 않는 막연한 말 같은데요, 바로 이렇게 "미쳐도 곱게 미치는 것"을 이르는 것이라 봅니다.
제가 시를 쓰는 사람이니까 인제 어떻게 하면 제대로 시다운 시를 쓸 수 있는가에 대해서 일곱 가지로 요약하여 말씀 드리겠습니다.
첫째, 많이 써봐야 합니다. 많이 쓰면서 항상 고치고 다듬어야 할 것입니다.
누구든 내가 쓴 글이 단박에 훌륭한 시로 되는 건 아니지요. 젊은 시인 안도현이 쓴 "너에게 묻는다"라는 시가 있습니다.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 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이 석 줄의 짧은 시를 쓰기까지 그는 백 번 이상 퇴고를 하였다고 합니다.
저 역시 많이는 열댓 번 퇴고한 시가 있습니다.
일필휘지로 단숨에 휘갈겨 쓴 시는 한 편도 없어요.
저는 총각 시절에 한 편의 시를 쓴 다음에는 어머니께 그 시를 보여드렸습니다.
시에 대한 독자의 반응을 알고 싶어서죠.
제 어머니는 초등학교만 졸업했을 뿐, 더 이상의 학력이 없는 분입니다.
그래도 제가 들려주는 시에 대해서 좋다, 안 좋다 간단한 응답을 항상 느낌으로 말해줬지요.
지금은 아내한테 시를 읽어주고 퇴고하는 데 참고를 하고 있어요.
여러분도 글을 써서는 가장 가까운 분에게 읽혀보고 그렇게 해 보십시오. 큰 도움이 될 겁니다.
둘째, 좋은 시를 많이 베껴 써볼 일입니다.
자기 취향에 맞는 시인의 시집을 세 권 이상 손으로, 반드시 손으로 베껴 써보세요.
어느 신문에선가 소설가 신경숙의 습작 시절의 고백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등단 전 어느 여름 방학 때 자기가 좋아하는 작가들의 단편소설 일곱 편을 손으로 베껴 써봤다는 얘기였습니다.
그냥 눈으로 읽을 때와는 전혀 다르게 손으로 베껴 쓰면서 새로운 느낌을 얻었다고 하였습니다.
아하, 소설의 구성이라든가 묘사는 이렇게 하는 것이구나 하고 저절로 알아지더라는 거였습니다.
어찌 보면 우직스럽겠지요. 하지만 못 속의 물고기를 잡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막고 품는 것 말고는 완벽한 방법이 있을 수 없어요.
신춘문예에는 적어도 천 명 이상이 응모합니다.
그 중에서 뽑힌 이의 시라면 우선 신뢰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마음에 드는, 팔십년대나 구십년대 신춘 당선 시인을 택하여
그 시인의 시집을 고스란히 베껴 써볼 일입니다.
그에 앞서 우리말의 맛을 알기 위하여서는 오래 전의 시인들,
시문학 동인들과 청록파 시인들을 반드시 거쳐야 합니다.
셋째, 문학 아닌 인접 예술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영화, 미술, 음악. 좋은 영화에서 시의 소재가 얻어지기도 합니다.
전주고교 시절의 은사님이신 신석정 시인은 종종 영화에서 시의 소재를 구하셨습니다.
"영구차의 역사"라는 시는 "슬픔은 그대 가슴에"라는 영화에서 나온 시입니다.
이 영화를 최근 어느 텔레비전에서 방송한 적이 있지요.
마하리아 잭슨이라는 흑인 가수의 주제가가 퍽 인상적인 기억이 새롭습니다.
석정 시인의 "창"이라는 시는 영화 "안네의 일기",
그리고 "조가 삼장(弔歌三章)"은 "몬도가네"라는 영화에서 소재를 얻은 시입니다.
미술은 초현실주의 화가들― 살바도르 달리, 마르크 샤갈 그 외에 프리다 칼로, 에드바르트 뭉크 등의 그림을 알았으면 합니다.
그들의 그림을 말로 표현한다면 그게 은유를 구사한 시가 되기도 할 겁니다.
바흐, 슈베르트, 드뷔시, 스트라빈스키의 음악도 시를 쓰는 데 좋은 자양이 되어줄 거예요.
영혼의 교감(交感)이라는 점에서 좋은 음악은 시를 쓰는 데 밑바탕이 됩니다.
넷째, 자기 또래 수준의 시를 많이 읽어보십시오.
나보다 잘 쓴 시를 보면 주눅이 들기도 하겠지요만 겸손하게 배울 것이며
나도 이렇게 한번 써 보리라는 오기를 가져야 합니다.
또 나보다 못 쓴 글도 읽을 필요가 있습니다. 거기서는 자신감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내 글만 쓰고 남의 글을 읽지 않으면 발전을 기약할 수 없지요.
다섯째, 글쓰기의 시작은 데생, 즉 묘사로부터 출발해야 합니다.
제 어린 시절에 그림을 꽤 잘 그린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미술 선생님이 교탁 위에 세워놓은 석고상을 그리는데,
나는 두 시간 걸려서 그리는 걸 다른 친구들은 이삼십 분에 다 그렸다면서 내가 그리는 것을 구경합니다.
눈썹 하나를 세 번 관찰하고 나서 선 하나 긋고,
여러 번 보고 한 번 그리고 이런 식인데… 딴 애들은 한 번 보고 단숨에 눈·코·입을 그리는 거예요.
그러니 자연 우스운 꼴의 그림이 되지 뭡니까.
글쓰기도 이모저모 대상을 살펴본 연후 꼭 거기에 맞을 표현을 찾아야 합니다.
글쓰기의 데생 방법으로는 감각적인 표현·변용(變容)하는 표현·비유적인 표현 세 가지를 권하고 싶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좀더 자세히 말해야겠군요.
감각적인 표현이라 하면 시각, 청각, 미각, 촉각, 공감각의 표현들입니다.
"잎 지고 잎 피는/ 나뭇가지 사이로/ 반짝반짝 건너가는 햇살" ―시각,
"나직이 물 끓는 소리가/ 마냥 귀를 적신다" ― 청각,
"희끗희끗 내리는 일악장의 무반주 첼로 연주곡" ― 공감각 같은 것 말입니다.
변용하는 표현은 대상을 비틀거나, 현실의 소재를 약간 달리 손질함을 뜻합니다.
내 이야기를 쓰면서 슬쩍 남의 얘기를 가져와서 보태기도 하고, 비유적인 표현의 방법은 직유, 은유, 의인 등 아주 많지요.
예를 들어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잘 있거라, 짧았던 밤들아
창밖을 떠돌던 겨울 안개들아
아무 것도 모르던 촛불들아, 잘 있거라
공포를 기다리던 흰 종이들아
망설임을 대신하던 눈물들아
잘 있거라,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들아
장님처럼 나 이제 더듬거리며 문을 잠그네
가엾은 내 사랑 빈 집에 갇혔네
―기형도, 「빈 집」
여기서 "…밤들아, …안개들아, …촛불들아"는 의인화한 표현, "장님처럼"은 직유입니다.
바람 부는 여름날에 청모시 적삼을 입고 나룻배로 강을 건너가는 여인을 박목월 시인은
"모란 여정(牧丹餘情)"이란 시에서 "강을 건너는/ 청모시 옷고름"이라고 썼습니다.
은유의 표현입니다. "석탄"을 "검은 침묵에 생성하는 꽃"이라 표현하는 건 공감각과 은유를 곁들인 것입니다.
구체어+추상어, 비생명+생명의 방법으로 은유를 구사할 수 있습니다.
현대시의 생명은 은유에 있다고 말한 시인도 있답니다.
여섯째, 상상력을 확대하기입니다.
문학은 상상력이 없으면 성립할 수 없는 예술입니다. 시는 더욱 그렇습니다.
상상력이란 과거에 체험한 어떤 이미지를 되살려내는 능력이지요.
하나의 이미지가 다른 이미지로 바뀌고 또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 내는 일, 이것이 상상입니다.
나사 하나가 우연히 주방에서 발견됐다고 합시다.
이로부터 상상력을 발동하기로 합니다.
싱크대 여기저기를 살펴보았는데 그 나사가 빠진 구멍이 보이지 않습니다.
매우 중요한 모임이 있는데 나는 그것을 잊고 있습니다.
그 모임이라는 나사 구멍에서 빠져 있는 것입니다.
집에서 나왔는데 어디선가 집으로 내게 중요한 전화가 걸려옵니다.
나는 그것을 모르는 채 딴 일에 정신이 팔려 있습니다.
그리고 기억의 한 귀퉁이에서 나사 하나가 슬그머니 빠져 나옵니다.
연상과 유추의 거듭되는 이러한 상상력이 한 편의 시로 쓰여질 수 있습니다.
어디서 빠져나왔을까
아침에 방을 쓸다가 빗자루에 걸려
뒹구는 나사 하나
주방에서 발견된 쇠붙이
팥알만큼 작지만
아무래도 위험한 누락
전기밥솥의 수상한 밑창에도
싱크대의 경첩에도
빠진 구멍이 없는데
누가 나를 찾았을까
내가 외출하고 없는 동안
빈 아파트에서 울렸을 전화벨 소리
빠져서는 안 될 중요한 시간에
나는 빠져나왔을까
시내버스에 앉아서
휴대폰을 귀에 대고 껄껄거리는
낯선 사내의 뒤꼭지를 보다가
문득 퓨즈가 나가버린
내 기억의 나사 하나를 들고
고개를 갸웃거리는
엘리엘리 나의 하느님.
― 졸시 「누락」
일곱째, 시 쓰기는 할 말을 감추는 일입니다.
꼭 하고 싶은 말을 시에다 직접적으로 쏟아내지 말아야 합니다.
두 남녀가 있습니다. 남자는 여자의 눈이 맑고 아름답다고 생각합니다.
그걸 그대로 "너는 눈이 참 맑고 아름답구나." 이러면 코미디가 됩니다.
"네 눈 속에 내가 빠지고 싶다."고 하는 게 시적 표현입니다.
시는 할 말을 숨기고 감추는 데 묘미가 있습니다.
그것을 독자가 생각하면서 찾아낼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자기 감정을 꾹꾹 누르고 참아서 간접적으로 돌려 함축적으로 표현할 때 시를 읽는 이가 공감하는 법입니다.
그런 점에서 정지용 시인의 "유리창"을 예로 들어봅니다.
유리에 차고 슬픈 것이 어른거린다
열없이 붙어서서 입김을 흐리우니
길들은 양 언 날개를 파닥거린다
지우고 보고 지우고 보아도
새까만 밤이 밀려나가고 밀려와 부딪히고
물먹은 별이 반짝, 보석처럼 박힌다
밤에 홀로 유리를 닦는 것은
외로운 황홀한 심사이어니
고운 폐혈관이 찢어진 채로
아아, 늬는 산새처럼 날아갔구나.
이 "유리창"은 어린 자식을 잃고 밤에 창밖을 내다보며 슬퍼하는 애절한 아버지의 심경을 쓴 시입니다.
"어린 나이에 사랑하는 내 아들은 저승으로 갔구나.
너는 폐를 앓다가 끝내 내 곁을 새처럼 날아가 버리고,
여기 남은 아비는 소리 없이 눈물을 흘린다.
인생이 이렇듯 허무한 것이냐.
밤 유리창에 비치는 흐린 그림자에서 너를 떠올리니 더욱 가슴 아프구나." 이러면 시가 안 됩니다.
시를 쓰는 이가 자신의 감정을 숨기고 완곡하게 표현해야 읽는 사람이 제대로 느끼게 됩니다.
끝으로 한 말씀만 덧붙입니다.
글을 쓰는 사람은 모름지기 인생이나 현실에 대하여 자기 주관이 확고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기만의 안목으로 현실을 파악하고 사물의 의미를 해석하는 일,
그것이 그 사람의 글에 나타날 때 "개성"이 됩니다.
호박 같은 세상을 호박같이 둥글둥글 살아간다,
이런 것도 개성이라 할 수 있겠지요.
자기보다 나이도 한참 아래인 대통령을 위해 생신 축하의 시를 써주고 세계 일주 여행의 선물을 받은 어떤 저명한 시인도 있습니다만,
저는 결단코 그런 개성을 추구하는 시인은 참다운 시인으로 생각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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