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시와 지루한 시
이 승 하 (시인, 중앙대 교수)
내용의 측면에서건 형식의 측면에서건 새로운 구석이 조금도 없는 시를 읽으면 지루해짐을 넘어 고통을 느끼게 된다. 구태의연한 시는 상상력의 빈곤을 말해줄 따름이다. 하지만 새로움이 시의 진정성을 무시한, 이를테면 실험을 위한 실험이라면 그것은 언어 유희요, 새로움을 가장한 말장난에 지나지 않는다. 젊은 시인 중에는 재기 발랄함을 빼면 아무 것도 남지 않는 이가 꽤 된다. 물론 재기 발랄함만을 갖고 있다 해도 큰 재산이기는 하겠지만.
부지불식간에 몸이 나뒹굴려져
아리고 아린 갖가지 삶의 고리를 엮듯
몸을 질질 끌어 공간을 지우는
섬뜩한 경계 없음의 퍼포먼스
선명한 경계를 세우며 휘두른
후리채에 맞고 나가떨어진
파리, 모기, 하루살이, 거미, 때로는
길을 잘못 든 귀뚜라미의 육신을 보며,
그 박살난 몸뚱이를 보며, 또한 나는
경계를 허물지 못했던 매 순간을 탓하며
진정, 아리게 바닥에 나뒹구는 몸.
죽음을 당기고 있는 생의 순간들이
저릿저릿하게 바닥을 긋는 선,
지울 수 없는 궤적이 파인다.
대단원의 피날레에 사선이 그어진다.
―김광기, 「스키드 마크」전문
김광기 시인의 등단 지면을 나는 모른다. 동국대 대학원 문예창작학과를 나왔다고 하나 학부는 어디를 나왔는지 모른다. 나는 이 시인의 시를 이번에 처음 보았는데 흥미로운 요소가 있어 논해 보고자 한다. 스키드 마크(skid mark)는 자동차가 급브레이크를 밟았을 때 옆으로 미끄러지면서 차도에 남겨지는 자국이다. 제일 앞 4행을 읽고 나는 고속도로상에서의 사고를 연상했다. 차는 완전히 구겨진 종이조각처럼 되고, 사람의 몸은 도로상에 나뒹굴거나 차체에 질질 끌려간다. 마치 후리채(파리채?)를 맞고 나가떨어진 파리나 길을 잘못 들어 몸이 박살난 귀뚜리처럼 말이다. '경계'란 무엇일까? 삶과 죽음의 경계, 살아 숨쉬는 육신과 박살난 몸뚱이와의 경계, 육과 영의 경계……. 뭐 이런 상대적인 것 사이의 경계를 말하는 것이 아닐까. 그런데 이 둘 사이의 경계는 눈 깜짝할 사이에 엇갈리기도 한다. 그 시간에 졸지 않았더라면, 그 시간에 승선하지 않았더라면, 그 시간에 그 자리에 있지 않았더라면……. 살 사람이 죽고 죽을 사람이 산다. 그런데 스키드 마크는 그 사건의 일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기억하고 있기 때문에 증언할 수 있다. 인간의 자력으로, 혹은 자의로 그 경계를 허물지는 못한다. 그 경계는 운명의 힘이 관장하는 영역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경계를 관장하지 못하기 때문에 '아치!'하는 순간에는 이미 "아리게 바닥에 나뒹굴"게 된다. 시인이 이해한 스키드 마크는 "죽음을 당기고 있는 생의 순간들/저릿저릿하게 바닥을 긋는 선"인데 아뿔싸! 사고가 나버린다. 지울 수 없는 궤적이 파인다. 이 시에서 가장 돋보이는 부분이다. 생의 순간들이 죽음을 당기고 있다는 표현도 절묘하지만, "저릿저릿하게 바닥을 긋는 선"이라는 시행에 이르러서는 벌어진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다. "대단원의 피날레에 사선이 그어진다"는 것은 끔찍한 교통사고의 피날레를 장식하는 것이 바로 스키드 마크라는 뜻이리라. 이 시의 소재는 당연히 스키드 마크이고, 주인공도 '나'라기보다는 스키드 마크인 듯하다. 무엇을 이야기하려고 쓴 시인가 다소 막연하게 느껴지기는 하지만 특이한 소재를 다루는 솜씨를 높이 사주고 싶다.
떠벌이 복서 무하마드 알리가
죽음의 링에서
그 집을 발견했다
맞고 터지고 정신을 잃다 보면
들어가 쉬고 싶은 방문이 보인단다
나, 지금 그 앞에 와 있다
―김형수, 「혼몽(昏 )의 집」앞부분
이 시의 강점은 흡입력이다. 처음 3연을 읽어보고 흥미를 느끼면서, 곧바로 그 다음이 읽고 싶어진다. 무하마드 알리는 맞기보다는 나비처럼 날아가 벌처럼 쏜(때린) 복서이지만 어쨌든 많이 맞았기에 노년에 들어 병고에 시달리고 있다. 복서가 다운을 당했을 때 무엇을 보았을까 하고 시인은 생각해보았다. 그것을 가리켜 '혼몽의 집'이라 하고는 상상력을 마음껏 펼쳐본다.
시대의 슬픈 관능 위에서
더불어 궁핍했던 지상의 촉수(觸手)들아
아프고 병든
인간들의 극장에서
맹인가수처럼
우리는 노래했다
세상의 혼란과 사랑의 목마름을
저 완강한 삶의 공허 앞에
주저앉은 사람을, 인생을, 이별을
이제 목도 쉬고
듣는 이도 없다
나도 들어가 편하게 눕고 싶다
―「혼몽(昏 )의 집」가운데 부분
시는 제 4연으로 접어들면서 아연 분위기를 바꾼다. 제 4연은 지나치게 관념적이고 엉뚱하다는 느낌이 들기는 하는데, 가운데 4개의 연을 보면 시인이 떠벌이 복서 무하마드 알리를 노래하고자 이 시를 쓴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우리'가 노래한 장소는 아프고 병든 인간들의 극장이었고, 우리는 "저 완강한 삶의 공허 앞에/주저앉은 사람"을 맹인가수처럼 노래했다. 우리는 혹 시인이 아닌가? "세상의 혼란과 사랑의 목마름"을 노래하는 음유시인. 그런데 이제 나도 우리도 늙고 지쳤다. 들어가고 싶지 않았던 혼몽의 집에 거하고 있는 것이다. 떠벌이 복서 알리도, 가수도, 나도, 우리도……. 상대방의 펀치를 맞았건 세상의 뭇매를 맞았건 늙음 앞에 장사일 수 없다. 시는 이렇게 끝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무하마드 알리가
링 위에 누우며 했던 말을 떠올린다
너를 먼저 보내고 싶었는데
내가 와서 이렇게 기다리는구나
마지막 연이 알리가 링에 누우면 했던 말인 것 같지는 않다. 의문이 드는 것은 '너'가 누구냐 하는 것이다. 구태여 해석을 해보자면 너는 혼몽이 아닐까. 알리에게는 혼몽이 많이 맞아서 온 것이겠지만 화자에게는 나이를 먹어가면서 느껴지는 것. 평자는 시의 마지막 연을 되새기는 동안 자꾸만 백발가가 떠올랐다.
『시와반시』 이번 여름호가 배출한 2명의 시인의 시는 대체로 길다. 김산옥의 「영산홍」이 제 1연 11행, 이세경의 「봄길」이 제 6연 9행, 「冬眠」이 제 7연 10행으로 되어 있어 비교적 짧을 뿐, 20행이 넘는 시가 대부분이다. 시가 길다는 것이 흠이 될 수는 없다. 그런데 시가 시종일관 뻣뻣한 산문 문장으로 되어 있다면, 즉 운율이 전혀 배어 있지 않은데 길기까지 하다면 문제가 있다. 두 분은 이제 갓 등한한 신인이니까 앞으로 좋은 시, 혹은 시다운 시를 쓰면 된다. 등단작 중 2편을 예로 들어 조언을 좀 하고 싶은데, 너무 기분 나빠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가 횡단보도를 건넌다 다리를 벌리고 어기적어기적
그가 걷는 것만 봐도 어디가 아픈지 어디서 진물이 나는지
병원에 가서 어디를 수술받고 왔는지 대번에 안다
그는 최대한 빨리 걷지만 제일 느리다
그는 부산하게 움직이지만 제일 굼뜨다
그가 보도블록을 걷는다 다리를 최대한 벌리고 느릿느릿
붙었다 떨어지는 보도블록 기울어져 벌건 국물을 토해낸다
몸이 자꾸 기울어진다 이쪽저쪽으로 무게가 표나게 옮겨다닌다
그는 뛰지 않는다 아무 데나 앉지 않는다
그가 다리를 벌린 채 걸음을 멈춘다
함부로 내려놓을 수 없는 것이 있다
두리슈퍼 평상 위에 방석을 놓는다
엉덩이를 뒤로 빼고 엉거주춤 한참 생각한다
천천히 자세를 바꾸고 손으로 평상을 짚는다
그가 조심스레 방석에 앉는다 은행잎 한 장
그보다 먼저 장기판에 앉는다
그는 상처를 모시고 다닌다 거기에 집중한다
―김산옥, 「대장」전문
국군간호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육군 대위로 전역한 김산옥 시인이기에 이 시는 상고나 중 한 사람이었던 어떤 대장을 형상화해 본 시인 듯하다. 대장의 행동거지를 꽤나 자세히 묘사하고 있는데, 그럼으로써 독자는 대장의 성격까지도 파악할 수 있게 된다. 그런데 이 시는 참으로 지루하다. 제 2행 "다리를 벌리고 어기적어기적"에서부터 제 3행 "대번 안다"까지가 제법 긴 문장일 뿐 비교적 짧은 문장이 계속 이어지는데, 그 숫자가 무려 19개이다. 19개의 무미건조한 문장이 나열되어 있으니 얼마나 지루한가. 특별한 사건도 없고 감칠맛 나는 묘사도 없다. 직설적인 직유도 은근한 은유도 없다. 一言以蔽之왈, 시가 이래서는 안 되는 것이다. 소월과 영랑, 미당과 백석의 시를 보라. 우리말도 잘 살아 있지만 이들의 시에는 은밀히 숨어 있는 운율이 은은한 향기를 풍긴다. 그래서 시인 것이다. 「대장」은 산문의 나열이지 시라고 봐주기 어렵다.
그는 숲에 앉아 있다
시커먼 불판에 가리워진
참나무 숯불이 숨어서 지는 밤
투명하고 맑은
소줏잔을 부딪치면서도
눈을 마주치지 못하는 사람들
그늘 속에서, 말이 없다
뭉턱뭉턱 덤으로 잘려 나온
선명한 붉은 간, 기름장에 찍으며
맥없이 웃어도 보지만
독을 숨긴 간사한 방울뱀의 혀를
가져보지 못했거나
하늘로 오르는 동아줄 스쳐본 적도 없이
길고 지루한 회식 상 맨 끄트머리에서
또 말이 없다
세상이 내민 손 잡을 줄
모르는 게 아니었으나
이 숲을 벗어나
동네 어귀에 다다를 쯤이면
아이들에게 줄 몇 마리의 붕어빵,
그 온기가 소록이 손에 닿을 때마다
외등으로 서성이는 푸른 별빛이
늘 고개 숙인 가슴에 스몄던 것이다
―이세경, 「황소고집, 숯불구이」부분
연 구분 없이 총 34행으로 되어 있는 시인데, 제 1∼23행을 적어 보았다. 이 시의 등장인물들은 "길고 지루한 회식 상"에서 숯불구이를 먹고 있다. 주인공 격인 '그'는 아이들에게 몇 마리의 붕어빵을 사줄 정도로 착실한(?) 가장이다. 시의 내용으로 보아 가장은 꽤 소심하다. 독자는 전형적인 소시민이 회식 자리에서 말없이 숯불구이를 먹고 있는 장면을 연상하면 된다. 그런데 문제는 시의 문장이다. 제 8행 "뭉턱뭉턱 덤으로 잘려 나온"부터 시작되어 제 15행에서 한 문장이 끝난다. 무려 여덟 개의 행이 한 문장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그 다음 문장도 마찬가지로 길다. 제 16행부터 23행까지 역시 여덟 개의 행이 한 문장을 이루고 있다. 행을 나누어 두어 시처럼 보이지만 가만히 들여다보면 시가 아니다. 라 풍텐의 우화시에도 리듬이 숨어 있고 투르게네프나 정진규의 산문시를 봐도 외양이 얼추 산문 같지만 그 속에는 리듬이 담겨 있다. 시의 문장을 맺고 끊는 맛이 있어야 하는데 길고 긴 문장이 중첩되는 이런 시는 내용을 음미하기 이전에 형식이 맛을 완전히 죽여버린다. 두 사람이 이런 시답지 않은 시를 쓴 데 대해 비난을 할 수도 없다. 중견, 원로 시인들도 이런 식으로 문장이 축축 늘어지는 시를 쓰고 있기 때문에 '배운 대로' 쓴 것일 따름이다. 하지만 심사평에서 이런 점에 대해 지적을 좀 했더라면 어땠을까.
오늘날 독자들이 시집을 사 읽지 않는 데는 이런 이유도 있는 것이다. 시가 도무지 시 같지 않은데 무엇을 느끼겠다고 시집을 사본단 말인가. 베스트셀러 시집을 내는 사인방 류시화·용혜원·원태연·이정하의 시집을 보면 내용은 제쳐두고라도 감칠맛 나게 말을 구사할 줄 안다. 운율을 적절히 살리고 여백의 미를 적당히 활용하기에 적어도 외양으로는 시에 가깝다. 정통문학권에서 독자의 사랑을 받고 있는 정호승·안도현·김용택·나희덕 네 시인의 시집을 봐도 마찬가지다. 내용도 내용이지만 눈으로 보아도 음미가 가능하고 입으로 낭송하면 더욱 시의 맛과 멋을 느낄 수 있기에 독자의 사랑을 받고 있는 것이다. 신인의 등단작을 갖고 타박하여 미안하지만, 우리 시의 앞날이 밝게 느껴지지 않아 고언을 한 것이니 이해해 주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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