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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문학 시평-서정시, 그 치유의 아우라-전숙

전숙 2013. 2. 7. 12:32

 

계간평 -2012년겨울호-시

                   

서정시, 그 치유의 아우라

                                   전숙(시인)ss8297@hanmail.net

  이집트에는 사후(死後)세계의 안내서인 「사자(死者)의 서(書)」가 있다. 그 책에는 사후세계의 심판관인 오시리스 왕 앞에서 죽은 자의 심장이 저울에 올려져있는 그림이 있다. 심장의 무게와 견주는 분동은 새의 깃털이다. 심장은 죄의 무게이고 새의 깃털은 진실의 무게이다. 심장이 깃털보다 가벼워야 임마드라는 괴물에게 던져지지 않고 저승세계를 통과하여 부활할 수 있다고 한다. 나는 그 그림을 보면서 심장이 죄의 무게가 아니고 상처의 무게일 것이라고 상상해본다. 깃털은 진실이라기보다 치유의 무게로써 이승에서의 상처가 치유된 사람만이 영생할 수 있다고 고쳐 생각해보는 것이다.

 모든 상처는 통증과 진물과 가피의 과정을 겪어내면서 치유가 된다. 바야흐로 시대의 화두가 치유(Healing)다. 치유의 사전적 의미는 병이나 상처를 치료하여 낫게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요즈음 시대의 화두로 떠오른 치유의 의미는 몸의 상처나 질병보다는 정신적인 상처나 마음의 병을 낫게 하는 것이다. 마음의 상처를 치유하는 학문이나 방법 또한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하다. 거기에 우리의 문학도 문학적 치유라는 한 아우라를 담당하게 되었다. 특히 ‘시’라는 장르는 정신의 깊은 상처를 치유하는 '글의 약'이다. ‘우리는 눈에 보이는 것 이상을 볼 수 있다. 그리고 볼 수 있어야 한다.’는 에셔(M. C. Escher)의 말처럼 시인은 정화된 마음의 결로 사물의 보이지 않는 아픔을 더듬어 시를 씀으로써 시인, 스스로 치유되기도 하고 시를 읽는 독자를 치유시킬 수도 있는 것이다.

 기실 현대인을 괴롭히는 가장 큰 질병은 마음의 병이다.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병에 대한 치유, 특히 마음의 병에 대한 치유의 아우라를 서정시 속에서 찾아보기로 한다. 모든 상처 입은 영혼들이 ‘시’라는 약을 통해서 치유되기를 기대하면서.

「대한문학」 2012년 겨울호에 실린 시편들을 보면 시인들의 ‘치유’에 대한 사유들이 깊다.


우리가 어깨 겯고 너나들이로 사는 동안

함께 걸은 거리만큼 체온도 따스하다

반가운 포옹의 기억

화로같이 품고서


구겨지고 접혀진 마음의 갈피 열어

용서하고 용서받는 생애의 어느 순간

얼음 깬 맨발 아래서

길 하나가 뚫린다

             -서연정의 <겨울 과원에서> 부분


 위 텍스트에서 시인은 푸른 것들이 지워진 스산한 겨울과원에서 “얼음 깬 맨발”을 본다. 그러나 시인의 가슴으로 들어온 것은 ‘시린 맨발’이 아니다. 시린 나목들이 서있는 황량한 과수원에서 시인은 어깨 겯고 서로 의지하며 칼바람을 견디고 있는 나무들의 치유의 시간을 본다. “우리가 어깨 겯고 너나들이로 사는 동안”은 주위에 있는 친구 나무들과의 공유의 시간이다. 공유의 시간에는 어깨를 겯기까지 ‘경쟁’과 ‘질시’의 시간이 있었을 것이다. 피터지게 주먹다짐도 하고 눈 홀기기도 하였으리라. 학교라면 선생님의 사랑을, 가정이라면 부모님의 사랑을, 과수원이라면 태양과 농부의 사랑을 경쟁하였을 것이다. 시인은 과정의 아픔을 너머  “우리가 어깨 겯고 너나들이로 사는 동안”으로 지나온 시간을 아름답게 결말짓는다. 고통의 시간이 치유되어 상생의 시간이 된 과수원에는 “체온도 따스”하고 모든 기억이 화롯불같이 따뜻하고 “용서하고 용서받는 생애의 어느 순간”이 되어 ‘길 하나가 뚫“리는 것이다. 새싹 돋아나는 부활의 ’봄‘이 오고 있음이다.



아내 말에 따르면 탕에서는

물때가 끼어 락스를 쓴단다.

온몸이 가렵고

등이 빠개질 듯 아프단다.

그래도 꿈을 접지 않는다. 아내는

어쩌면 완전변태를 생각하는지 모른다.

어깨를 주무르다 보면 열개선이 보인다.

지금 아내는 탈피하려고 버둥거리는 것이다.


오늘은 창백한 낮달이 떴다.

지금쯤 아내는 우화를 끝내고

물기 마른 투명한 날개로

꿈속을 날고 있는지 궁금하다

              -김석윤의 <관계> 부분


 목구멍이 포도청이라는 말이 있다. 복이나 욕심이라는 한자말에도 입구(口)자가 들어간다. 목구멍은 인간의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다. 그러기에 평화(平和)라는 한자말의 뜻을 살펴보면 쌀이 모든 목구멍에 고루 분배되어야 평화가 온다는 뜻으로 풀이할 수 있다. 시적 화자의 아내는 가족의 목구멍을 위해 찜질방에 밤일(청소)을 나간다.

“아내 말에 따르면 탕에서는/물때가 끼어 락스를 쓴단다./온몸이 가렵고/등이 빠개질 듯 아프단다.”며 아내는 육체의 고통을 호소하고 있다. 시적화자는 힘들면 그만두라는 말 대신에 아내의 어깨를 주물러준다. 어깨를 주무르다가 아내의 어깨에 드러난 어떤 상처를 본다. 시적화자에게는 그것이 날개가 돋아나는 열개선으로 보인다. 열개선은 우화할 때 가슴등부의 중앙이 세로로 갈라지도록 그어진 선이다. ‘우화’는 번데기가 날개 있는 엄지벌레로 변하는 것을 말한다. 날개 있는 엄지벌레의 대표격인 곤충은 아무래도 나비일 것이다. 나비는 애벌레일 때는 게걸스럽게 먹어대지만 일단 나비로 우화하면 이슬이나 꽃물만을 먹는다. 심지어 입이 퇴화된 나비도 있다. 목구멍이라는 포도청에서 해방되면 인간은 또 다른 우화인 신선이 될 수 있다. 시적 화자는 아내의 어깨를 주물러주면서 힘든 현실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아내의 바람을 보았을 것이다. 그 현실에서 벗어나게 해줄 수 없는 화자는 한편 아내에게 미안하다. 그래서 어깨에 길게 그어진 상처가 우화할 때 날개가 돋아나는 열개선으로 보이고 아내는 우화를 꿈꾸는 것으로 생각되었을 것이다. 우화된 아내는 목구멍의 공포로부터 치유될 것이다. 한편 시적화자도 아내와 같이 우화등선하여 힘든 현실에서 벗어나고자하는 즉 ‘생활고’로부터의 치유의 희망을 은연중에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시인의 독보적인 상상력으로 독자도 자신의 열개선이 문득 열리고 있는 느낌을 받았으리라.


상처를 메우듯 젖살 뽀얗게 오른 알타리무

아랫도리 암팡지다

-할머니 무가 맵지 않을까요?

-맵지!

졸아 붙이는 단솥 속 같은 이 땡볕에 저도 매워야 살지

정직한 고통이 만들어낸 매운맛!

문득 눈물 훔치며 소금 뿌려 무를 절인다

눌러도 고개 드는 오배미 뚝새풀처럼

진보라 흥건한 내 설움

언제쯤이면 결이 삭아 깊은 맛이 들까

섬유질 완강해진 심장에 한줌 청소금 뿌린다

              -도경회의 <여름이야기> 전문


 맵다는 것은 여름보다는 겨울을 은유하는 단어다. 시인은 과감하게 여름을 은유하는데 ‘매운’이라는 형용사를 도입한다. 매운 것들을 나열하자면 시집살이가 맵고, 칼바람이 맵고, 고추 후추가 혓바닥을 얼얼하게 자극하고, 차갑고 냉혹한 현실이 맵고, 아픈 상처가 맵다. 매운 연기가 눈을 자극하여 눈물나게 한다. 도통 매운 것들은 나를 힘들게 하고 지치게 하고 아프게 하는 것들이다. 그러나 그 매운 것들을 이겨내려면 ‘이열치열’처럼 나도 매워져야 한다. “정직한 고통이 만들어낸 매운맛!”이 나에게 배어야 한다. 매운 맛처럼 야물고 독해져야 매운 것들에게 대항할 수 있다. 그러나 시인이 사유하는 치유의 단계는 ‘매워진’ 데서 완성되지 않는다. “진보라 흥건한 내 설움/언제쯤이면 결이 삭아 깊은 맛이 들까/섬유질 완강해진 심장에 한줌 청소금 뿌린다”처럼 매운 맛으로 섬유질이 완강해진 심장에 한줌 청소금을 뿌려 매운맛을 완화시키고자 한다. ‘적대적’으로서가 아니라 내가 먼저 손을 내밀어 나를 괴롭히는 땡볕이나 “눌러도 고개 드는”설움 받히게 하는 상대를 용서하려는 슈퍼에고적 사유를 보여준다. 시인은 대자대비 같은 큰 종교적 액션이나 장광설을 펴지 않는다. 단지 자신도 모르게 몸과 마음에 배어버린 매운맛을 “언제쯤이면 결이 삭아 깊은 맛이 들까”라며 매운 맛을 깊은 맛으로 조용히 순화시킴으로써 화해를 통해 대상을 치유시키고 더불어 자신까지 치유되고자하는 시인의 마음이 따뜻하게 읽히는 시다.


아픔의 상처 딛고

일어서는 것들만이

꽃피울 수 있다는 거


서로가 서로에게

울타리 되어야만

행복할 수 있다는 거

         -문인호의 <세상 들여다보기> 부분



 꽃을 피워내는 일은 출산만큼이나 모태의 희생을 요구하는 일이다. 정말 죽을힘까지 쥐어짜야만 아기가 동굴을 빠져나올 수 있다. 극단적인 예이지만 상사화나 꽃무릇처럼 잎이 먼저 나와서 꽃이 피어날 길을 예비해두고 잎은 스러져버리는 것처럼 누군가의 큰 희생을 담보해야만 꽃을 피워낼 수 있다. 시인은 그 일을 “아픔의 상처 딛고/일어서는 것들만이” 꽃 피울 수 있다고 노래한다.

 다음 연의 울타리는 ‘단절’보다는 소들이 비빌 언덕 같은 ‘보호기능’으로서의 은유다. 가족의 울타리, 학연의 울타리, 나라의 울타리 같은 보호 본능을 자극하는 울타리다.

 우리가 어린 시절 경험했던 할머니의 울타리를 떠올려보자. 부모님에게 꾸중들을 일이 있으면 할머니의 울타리로 숨는다. 할머니의 주름지고 앙상한 손은 울타리처럼 언제나 우리를 숨겨줄 준비가 되어 있다. 할머니의 주머니를 뒤져보면 알사탕이나 우리 손에 쥐어줄 동전 몇 닢이 들어 있다. 이렇듯 할머니의 울타리를 생각하면 하늘 가득 미소가 번지고 가슴이 뭉클해지면서 행복호르몬인 도파민수치가 상승한다. 시인은 그런 현상을 “서로가 서로에게/울타리 되어야만/행복할 수 있다는 거”라고 노래한다. 한편 시인은 인생의 최고가치인 꽃이나 행복 등의 무거운 주제를 “거”라는 의존명사를 사용하여 의도적으로 가볍게 마무리함으로써 독자들이 편안하게 호흡할 수 있는 배려를 하고 있다.


영혼을 하늘에 올려놓고

자신에게 주어진 빛을 밝히려고

세상 소리 너머 소리를

빛 너머 빛을 양식으로 삼아

거룩한 의식을 행하는 수도자로

마음 한 가운데 자리 잡고

무릎 꿇고 고행으로 살아가는

정자나무 한 그루

              -김기돈의 <정자나무> 부분


 “자신에게 주어진 빛을 밝히려고” 조물주께서 정자나무에게 준 빛은 무엇일까? 정자나무의 역할은 정자처럼 그늘을 짓는 일이다. 제 힘 닿는 대로 팔을 늘이고 펼쳐서 무성한 잎을 달아내어 뜨거운 땡볕을 막아주는 시원한 그늘을 넓게 만드는 일인 것이다. 제 안위나 편안함이나 명예를 좇아서는 안 된다. 명예를 좇아 키만 키우다가는 그늘은 사라지고 아무도 정자나무 아래서 더위를 식히지 못할 것이다. 그래서 정자나무는 제 욕망이나 호기를 모두 버려야한다. “소리 너머 소리를/빛 너머 빛을 양식으로 삼아/거룩한 의식을 행하는 수도자” 로서와 “무릎 꿇고 고행으로 살아가”야만 하는 것이다. 정자나무는 무릎 꿇고 고행으로 살아가지만 자신에게 주어진 ‘빛’인 ‘그늘’을 키울 수 있었기에 삶의 보람이 있고 그 보람으로써 고행의 길도 치유되는 것이다.



어느새 나는

먼 길 떠나신 엄마 뒤를 쫓아와

엄마 얼굴을 본다

어쩜,

거울 앞에 선 내 모습을 보고

내 안에 엄마가 웃는다.

             -김귀자의 <거울 앞에서> 부분


 시적 화자는 거울을 보다가 거울 속의 자신의 얼굴에 엄마 얼굴이 오버랩 되는 것을 느낀다. 거울 속에는 어느덧 자신의 얼굴은 사라지고 엄마얼굴만 남아있다. ‘내 안의 너’가 아니라 ‘내 안의 엄마’ ‘엄마 안의 나’ 모녀는 순간 일체가 된다. 엄마의 삶, 엄마의 웃음과 눈물이 만들어놓았던 주름이 어느새 내 얼굴에도 똑같이 새겨져 엄마 얼굴이 되어있는 내 얼굴을 본다.

 자신도 모르게 엄마와 똑같은 길을 걸었던 시적 화자는 “어쩜,/거울 앞에 선 내 모습을 보고/내 안에 엄마가 웃는다.”라고 노래한다. 내 안의 엄마가 웃는 것처럼 엄마 안의 내가 웃음으로써 시적 화자는 카타르시스를 느낀다. 엄마와 자신을 동일시하면서 엄마를 사랑했지만 어쩜 마음처럼 엄마에게 잘해드리지도 못하고 엄마를 떠나보낸 불효의 한(恨)이 엄마와의 일체감을 느끼면서 눈 녹듯이 사라졌을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시학」에서 밝혔듯이 시를 통한 카타르시스는 선사시대의 제단으로부터 이미 인류가 누려온 오래된 치유법이다.


큰 것 속의 작은 것

작은 것 속에

더 작은 것,

러시아 인형 마트료시카를 열어 간다


너와 나의 관계가

이렇게 변하는데

누가 마음더러 변하지 말라고 하는가


몸 안에 몸을 숨긴

마트료시카여

잠깐 사라지는 몸에

누가 영원히 변치 않는다

헛된 약속을 남기는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으리라

             -김정희의 <인형 마트료시카에게> 전문


 우리 안에 숨겨진 다중인격들처럼 너와 나의 관계는 여러 사이즈로 변해간다. 태산처럼 높은 관계였다가 바다처럼 깊어진 관계였다가 좁쌀영감처럼 작아진다. 러시아 인형 마트료시카는 러시아 장인들이 심혈을 기울여 만든 목각인형인데, 뚜껑을 열 때마다 모습은 똑같지만 크기는 점점 작아지는 인형이 보통 대여섯 개씩 한 세트로 만들어진다. 시인은 그 인형을 보고 “너와 나의 관계가/이렇게 변하는데/누가 마음더러 변하지 말라고 하는가”라고 인형의 몸 크기의 변화를 보면서 마음의 크기의 변화를 예지한다.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는 제행무상(諸行無常)을 직감하는 것이다. ‘제행무상’은 석가의 마지막 말씀이다. 몸의 행위, 입의 행위, 뜻의 행위가 모두 무상하다는 말이다. 시인은 그것을 “잠깐 사라지는 몸에/누가 영원히 변치 않는다/헛된 약속을 남기는가” 라며 기미(부분)를 함으로써 국물 전체의 맛(세계)을 간파하는 것처럼 제행무상의의 초월적 경지를 깨닫고 “아무런 말도 하지 않으리라”고 스스로 ‘순응’의 치유를 택하고 있는 것이다.


한낮의 지독한 폭염은

저녁엔 지쳐서 그늘이 된다

서울로 돌아가고 싶지 않은 건

바로 저 별들 때문이라고

핑계를 대보기도 하지만

어쩌면 분꽃 때문일지도

                -김행숙의 <한여름 밤> 부분


 “한낮의 지독한 폭염은/저녁엔 지쳐서 그늘이 된다” ‘폭염’과 ‘서울’은 각박한 현실이다. 그 각박함에서 벗어나 시골이나 고향에서 그늘 같은 휴식을 맛보는 시인은 현실인 ‘서울’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 시인은  “바로 저 별들 때문이라고/핑계를 대보기도 하지만” 핑계거리는 너무나 많다. 어떤 객관적상관물이 시인의 내면으로 들어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 와서 꽃이 된’것처럼 ‘휴식’이라는 주관화가 되면, 시인은 “어쩌면 분꽃 때문일지도”라고, 노래하지만 ‘구름’ 때문일 수도 있고, ‘풀잎’ 때문일 수도 있을 것이다. 기실은 “분꽃”에게 복닥거리는 현실로 돌아가고 싶지 않은 시적 화자의 바람이 실려 있음이다. 잠시나마 현실로부터 떨어지거나 도피함으로써 시적 화자는 거리나 간격의 치유를 택하고 있는 것이다


맹물의 투명한 열정

오그라져 있는 면발 풀어주고

사그락거리는 수프 녹여

컵 안을 조화롭게 한다.

            -이춘배의 <건더기와 국물> 부분


 삼투압의 원리는 두 액체 사이의 압력인 삼투압을 없애는 것이다. 즉 삼투압이 제로가 될 때까지 끊임없이 서로의 물질을 교환하는 것이다. 앞에서 모든 목구멍에 공평하게 먹거리가 분배되는 것이 평화라고 했었다. 삼투압의 원리는 조물주가 우주의 평화를 위해 만든 질서다. 맹물은 삼투압의 원리에 의해 면발에 스며들어 오그라져있는 면발을 풀어준다. 사그락거리는 고체스프를 녹여 컵 안에 모든 물질이 삼투압이 똑같아져 컵 안은 조화롭게 된다. 비로소 컵 안에 평화가 오는 것이다. 이 텍스트는 나눔을 통한 치유의 사유인 것이다.


제 뼈와 살 엉겁결에 내어준

그녀

바리게이트 쳐진 씨방만큼은 절대

내어줄 수 없다며 오뚝이마냥

버티고 앉아

세상에 상처 없는 것 얼마나 되겠느냐며

선정적인 포즈 취한다.

                   -조만조의 <벌레 먹은 사과> 부분


 많은 함의를 가진 시어일수록 씹을 맛이 난다. 이 텍스트에서 ‘벌레 먹은 사과’는 어쩌면 사창가에서 몸을 파는 어린 창녀가 아닐까? “제 뼈와 살 엉겁결에 내어준” “그녀”는 “바리게이트 쳐진 씨방만큼은 절대/내어줄 수 없다”고 한다. 미국의 슐러(R. Schuller)목사의 말을 인용한 ‘사과 안의 씨앗은 셀 수 있지만 씨앗 안의 사과는 셀 수 없다.’는 광고 카피를 본 적이 있다. 뼈와 살은 엉겁결에 주었지만 “세상에 상처 없는 것 얼마나 되겠느냐며” 약간은 뻔뻔하게 보일지 몰라도 영겁으로 이어지는 씨방만큼은 지켜내겠다는 삶의 의지에서 진흙수렁에서도 꽃을 피워내는 연꽃처럼 “오뚝이마냥/버티고 앉아”있는 ‘희망’이라는 또 다른 치유의 사유를 시인은 넌지시 우리에게 일깨워준다.



창밖엔 

억수로 가을비가 내린다

일제말기에 불던

그 바람이 분다.

             -허윤정의 <청자상감운학문 매병이여> 부분


 이 텍스트는 의성어나 의태어가 주저리주저리 몸짓을 하지 않아도 관념의 육화인 이미지가 선명하다. 그것은 마치 유전정보처럼 시인의 내면에 깊숙이 각인된 상처의 기억 때문일 것이다. 치유되지 않은 상처는 언제까지나 지워지지 않고 남아있다. 흉터를 볼 때마다 상처의 기억이 욱신거린다. 일제말기에 불던 바람은 아직도 시인의 가슴에 치유되지 않은 채로 불고 있다. “창밖에 억수로 가을비가“ 내릴 때 시인(가족 또는 민족사의 비극의 내면화로)에게는 크고 깊은 상처가 났다. 그리고 팔십여 년의 세월이 흘렀다. 두 세대가 지나는 동안에도 청산되지 않은 일제강점기의 오류의 역사가 아직도 우리를 괴롭히고 있다. 시인에게는 어떤 상처의 기억이 아직도 치유되고 있지 않고 있는 것일까?  “일제말기에 불던/그 바람이 분다.”며 이스라엘의 ‘통곡의 벽’처럼 ‘되새김질’ 즉 잊지 않고 오물오물 기억하는 것도 치유의 한 방법이라고 시인은 말하고 있는 것이다.


 시인이 너무 많다고 개탄하는 문인을 만난 적이 있다. 함량미달의 시인이 많다고도 한다. 우리는 아름다운 사회를 추구한다. 아름다운 사회는 꽃이 많은 사회다. 시인은 사회의 꽃이다. 그렇다면 시인이 많다고 한탄할 일은 아니다. 시인 중에는 장미꽃처럼 화려한 시인도 있고 이름 없는 풀꽃처럼 희미한 시인도 있다. 그냥 시가 좋아서 시인이 된 시인도 있다. 일단 꽃의 길에 들어선 시인들이 더욱 좋은 꽃을 피워낼 수 있도록 격려하는 일이 비난하는 일보다 경제적일 것이다.

 시의 생명은 ‘메타포’라고 한다. 도구를 잘 사용하는 장인이 명장이 되듯이 메타포라는 도구를 잘 사용하면 명시가 될 것이다. 그러나 그 도구에 꽃 같은 시인의 ‘독창적’인 영혼이 깃들지 않으면 그것은 명품이 아닌 흔하디흔한 ‘키치’가 되고 말 것이다. ‘상처 없는 영혼이 어디 있으랴.’ 고 한 랭보(A. Rimbaud)의 말처럼 우리는 모두 상처 입은 영혼들이다. 이번 계간평에서는 상처 입은 시인의 영혼이 아프게 녹아있는, 그래서 인간 정신의 정수인 서정시의 ‘치유의 아우라’를 살펴보았다. 시인과 함께 고통을 교감하고 정서적인 결합을 통해 우리의 상처도 아물어가는 치유의 경험을 하였다. 다음호에는 시인들의 어떤 고매한 영혼을 엿보게 될까? 꽃을  기다리는 심정으로 활짝 기대해보는 것이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