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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한양 나주목 관광이야기

전숙 2007. 10. 17. 12:38

작은 한양 나주

 

여러분은 지금 나주시의 탄생과 많은 관련이 있는 석당간앞에 서 계십니다. 이 석당간은 전체의 모습이 완전하여 매우 귀중한 유물로 평가받아 보물 제49호로 지정되었습니다.
당간은 원래 사찰에서 당(幢)을 걸기 위해 세우는 것인데, 이곳이 절터가 아니기 때문에 불교적인 것 보다는 풍수적인 면이 더 있다고 생각합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나주목 고적조에 『나주의 주(州)를 설치할 때 나주의 지형이 행주형(行舟形:배모형)인 까닭에 그 안정을 빌기 위해 동문밖에 석장(石檣)을 동문안에는 목장(木檣)을 세웠다.』는 기록이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1872년에 그러진 나주목지도에도 나주읍성의 동문밖에는 석장이 동문 안쪽에 는 목장이 그려져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곳의 주민들은 석당간을 ‘짐대'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차을 구입하거나 사업을 시작하는 사람들이 이곳에서 제사를 지내는 모습을 가끔 볼 수 있습니다.
담양군 담양읍에도 이와 비슷한 석당간이 있으며, 철당간이 있는 곳도 있습니다.

 

 

이곳은 나주 5일장터입니다. 4일과 9일에 장이 서는데, 그 역사는 1920년대까지 거슬러 올라 갑니다만 조선시대 나주지역에서 최초로 장이 섰다는 기록을 찾아 낼 수 있으므로 나주지역의 장터 역사는 유구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특히 이곳은 조선시대 나주읍성의 연못으로서 ‘인덕지(仁德池)'라 하던 곳인데, 일제 강점기에 이곳을 메워 장을 세웠던 것입니다.

 
 
이곳이 바로 나주읍성의 동문이 있었던 동점문(東漸門) 터입니다. 1910년대까지 남아 있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만 일제 강점기에 신작로를 내면서 바로 훼손되었을 것으로 추정합니다. 이 동점문 터는 2002년에 발굴을 시작하여 그 모습을 밝혀냄으로써 복원이 가능하게 되었습니다. 시에서는 2005년까지 동점문을 복원하여 나주의 옛모습을 자랑하게 될 것입니다. 천천히 돌아 보시면 문설주를 세웠던 구멍도 볼 수 있으며, 성을 보호하고 적을 격퇴시키기 위한 옹성의 모습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이 동점문은 2층 누각형태이며 출입문은 철문이었다고 하는데, 그 모습은 잠시 후에 보게 될 남고문과 비슷하다고 합니다. 그리고 옆에 흐르는 천이 나주천입니다. 이 천은 금성산에서 발원하여 영산강으로 흘러 들어 갑니다.
 
 
이곳은 나주의 안산이라 할 수 있는 남산입니다. 예전에는 소나무숲으로 우거져 있었다고 합니다만 일제 강점기에 이곳에 신사를 짓기 위해 많이 베어내고 벚나무를 심었다고 합니다. 이 팔각정은 1970년대 후반에 아래의 시민회관과 함께 건립되었는데 금하 서상록 선생이 건립 기증한 것입니다.
그리고 아파트 뒤쪽은 체육공원으로서 많은 시민들이 휴식을 하면서 건강을 지키는 곳이기도 합니다.
 

이곳이 바로 남고문입니다. 나주읍성의 남문으로서 가장 번화하였던 곳으로 보입니다.
사람들이 이 남문을 나서면서 임금님이 계신 곳인 금성관쪽을 돌아 보았다고 하여 남고문이라 했다는 이야기도 전해 옵니다. 이 남고문은 1993년에 복원되어 사적 337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특히 이 남고문은 삼봉 정도전 선생이 나주로 귀향오면서 여기에 올라 유부로서(諭父老書)를 읊었다고 전해 오는 곳이기도 합니다.

 
 
다음은 박경중 전통가옥으로 안내하겠습니다.
이 전통가옥은 전남에서 단일건물로는 최대규모인데 1910년대 초에 지어졌다고 합니다. 처음 이 집터를 잡은 이는 현재 살고 계시는 박경중의 6대조 박승희입니다. 그 분이 1884년에 초가를 짓고 아들대에 까지 살았는데 지금도 원형을 잘 간직하고 있습니다. 그 뒤 4대조인 박재규가 초가앞에 정남향으로 기와집을 지었는데, 당시 장흥군수로 재임하고 있었기 때문에 장흥관아를 본따서 지었다고 전해 옵니다. 전통의 맛은 집안 구석구석에서 느끼실 수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대청마루는 집안 살림의 역사가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시렁위에 가지런히 정돈되어 있는 크기가 다른 상들의 모습에서 집안 살림의 예법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장롱들은 조선시대 나주에서 유명했던 소목장들의 작품으로서 그 멋을 자랑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보고 계시는 붉은 건물은 일제 강점기 나주경찰서로 쓰였던 건물이었습니다만 경찰서가 신축 이전된 1980년대 이후에는 소방서 건물로 쓰였던 곳입니다.
시에서는 그 역사성을 감안하여 근대문화유산으로 등록하여 보존하고 있는데, 차후 역사박물관 등으로 이용하면 좋을 듯 싶습니다.

 
 
평범하게 보이는 이 다리는 금성교라 불리우는 다리입니다. 원래 이 다리는 석재(石材)를 이용한 석교(石橋)이었습니다만, 통행량의 증가로 인해 확장하면서 콘크리트와 혼합된 다리가 되었습니다. 그런 까닭으로 현재 이 다리는 콘크리트 다리로서는 우리나라에서 제일 오래된 다리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밑으로 내려가 보시면 석교의 모습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이 나주천 물길을 따라 올라가면 나주읍성의 모습을 일 부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이곳이 나주읍성이 있었던 자리로서 물이 나가는 곳이라 하여 일명 수구문(水口門)이라고 하는 곳입니다. 그런데 이곳의 이름의 별칭이 시구문(屍口門)이라고도 부르는데, 그 이유는 성안에서 사람이 죽으면 성문을 통해 나가지 못하고 이곳의 수구문을 통해 나갔다고 해서 그렇게 불렀다고 합니다. 이쪽으로 가면 서성문이 있는 곳입니다. 성벽밑으로 주택을 지었기 때문에 성벽이 잘 보이지는 않지만 나주읍성중에서 가장 많이 남아있는 곳입니다.
 
 

이곳이 바로 유명한 나주향교입니다. 그리고 뒤에 보이는 산봉우리의 이름은 장원봉(壯元峰)입니다. 아마도 여기에서 공부하면 과거에 장원급제할 것이라는 의미를 안겨 주는 이름이라고 생각합니다. 향교의 건물배치는 두가지 형태가 있는데, 하나는 대성전이 앞에 있고 명륜당이 뒤에 있는 전묘후학(前廟後學)의 형태이고, 다른 하나는 명륜당이 앞에 있고 대성전이 뒤에 있는 전학후묘(前學後廟)의 형태입니다. 나주는 대성전이 앞에 있기 때문에 전묘후학의 형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나주향교 대성전 벽체의 흙은 공자의 고향에서 가져온 것이라 전해 오고 있으며, 임진왜란때 불탄 서울의 성균관을 복원할 때 이곳 나주향교를 기본으로 하여 복원하였다고 전해 옵니다. 그렇기 때문에 대성전은 보물 제394호로 지정되었고, 나주향교 전체은 유형문화재 제128호로 지정되어 보호받고 있는 것입니다.

  

나주향교에는 다른 곳에서 보기드문 두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여기에 서있는 충복사유허비(忠僕祠遺墟碑)입니다. 나주향교 노복이었던 김애남(金愛南)이 임진왜란때 대성전의 위패를 목숨을 걸고 지켰다고 하여 나라에서 충복사를 지어 주었는데 지금은 없어지고 유허비만 남아 있는 것입니다. 또 다른 하나는 박성건(朴成乾)의 금성별곡(錦城別曲) 시비(詩碑)입니다. 박성건이 1480년 이곳 나주향교 교수로 있으면서 생도 10명이 한꺼번에 생원.진사시에 급제하는 경사가 있었는데, 이를 기념하기 위해 경기체가인 ‘금성별곡'을 지어 남겼다고 합니다. 후대에 이를 기념하기 위해 시비를 세운 것입니다.
 
 


이곳은 나주목사가 기거했던 목사내아(牧使內衙)입니다. 지금으로 말하면 나주목사의 관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안채는 1825년에 건립되었는데 당시 상류층의 생활공간을 엿볼 있습니다. 아쉬웁게도 일제 강점기 이후로 나주군수 관사로 쓰이면서 많이 개수되었다고 합니다. 지금은 없어졌지만 본채와 문칸채 사이에 아담한 담장이 있어 공간을 분리했었으며 우물로 있었다고 합니다. 특히 손님접대를 위해서인지 일반 전통가옥보다는 부엌공간이 많은 것이 특징적입니다.

 
 

이 건물은 나주관아의 정문으로서 정수루(正綏樓)라 불리웁니다. 그 현판의 뜻으로 보아 사람들이 관아에 들어서기 전에 의관을 단정하게 하라는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정수루는 1603년에 목사 우복룡(禹伏龍)이 건립했다고 하며, 한때 북을 매달아 읍성의 문을 여닫는 시간을 알리기도 하였다고 합니다. 지금의 북은 근래에 다시 복원한 것입니다.
 
 

이 누각은 망화루(望華樓)라 불리우는 나주목 객사의 정문이라 할 수 있습니다. 지금의 모습은 2003년에 복원한 모습인데 1930년대까지도 남아 있었다고 하며, 그 사진이 지금도 전해 오고 있습니다.

 
 
이 건물은 나주의 가장 상징적인 건물인 금성관(錦城館)입니다. 금성관은 나주목의 객사 건물로서 전국에서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하고 있습니다.
그 역사를 살펴보면, 1475년 ~ 1479년간에 재임하였던 나주목사 이유인(李有仁)이 창건한 것으로 되어 있지만, 1963년도에 발견된 상량문에 의하면 홍무(洪武) 계축(癸丑)년간에 건립되었다고 되어 있습니다. 이 홍무 계축년은 1373년으로서 고려 공민왕때입니다. 2003년에 발굴작업을 하였기 때문에 건립년도가 밝혀질 것으로 보입니다. 이 금성관도 일제 강점기에는 군청으로 쓰여졌기 때문에 많이 훼손이 되어 1976년에 완전 해체 복원한 바 있으며, 양 익헌(翼軒)은 그 전에 없어진 것으로 보입니다.
금성관에서는 임금을 상징하는 전패(殿牌)와 궁궐을 상징하는 궐패(闕牌)를 놓아두고 매월 1일과 15일에 고을 관민들이 모여 임금께 예를 올리는 망궐례(望闕禮)를 지낸 곳이기도 하며, 외국사신 또는 정부 고관들이 나주를 찾아올 때 동서편에 있었던 익헌에 들어가 숙식을 하였던 곳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객사(客舍)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이 금성관 경내에는 25개의 비석들이 있는데, 그중에서도 눈에 뜨이는 비석은 ‘사마교비'와 ‘금성토평비'입니다.
여기 이 작은 비석이 바로 ‘사마교비(駟馬橋碑)'입니다. 이 비의 내력은 다음과 같습니다.
고려 현종이 1011년 거란족이 침략하자 신하들과 함께 2대왕 혜종의 외가이자 호남 3대목의 하나였던 나주로 몽진해 왔습니다. 그때 현종 임금은 금성산성에 머물렀다고 하는데 피난이 끝나고 서울로 돌아갈 때 네 마리의 말이 끄는 수레를 타고 다리를 건넜다고 합니다.
그 후 그 다리를 ‘사마교'라 불렀다고 하는데, 이 말이 변하여 이 다리가 있었던 마을의 이름을 ‘사매기'라 불러 오고 있기도 합니다.
이 비석은 1653년 당시 금성현감이었던 정지호(鄭之虎)가 이 다리를 중수하고 이를 기념하기 위해 세운 것인데, 1970년대 후반에 이곳으로 옮겨졌습니다. 이 비석의 뒷면에 많은 글이 새겨져 있으나 마모가 심해 판독하기 어렵습니다. 이 비석은 1894년 동학 농민전쟁이 일어났을 때 나주읍성을 지키는 수성군(守城軍)이 동학 농민군과의 일곱차례 공격을 막아내고 격퇴시켰다는 사실을 기록한 비석입니다.
이와 같은 사실은 이병수 선생의 ‘금성정의록(錦城正義錄)'에도 자세히 기록되어 있기도 합니다. 원래 나주목 관아 정문인 정수루앞에 세워졌었으나 1970년대에 이곳으로 옮겨졌다고 합니다.
 
 
이 탑은 보물 제50호로 지정되어 있는 북문밖 3층석탑입니다. 이 탑은 원래 나주읍성 북문밖에 있었던 것인데 1915년에 일본에 의해 나주군청으로 옮겨졌다고 합니다. 이 탑은 형식으로 보아 고려후기 작품으로 추정되나 전체적으로 풍화가 심한 편이다.
나주사람들은 이 탑이 단아하고 규모가 크지 않기 때문에 일명 ‘난장이 탑'이라고도 부르기도 합니다.
 
 
여기가 바로 고려 왕건의 설화가 전해 내려오는 완사천(浣紗泉)입니다. 후삼국시대 궁예의 장수였던 왕건이 903년부터 914년 사이에 나주를 왕래하면서 후백제 세력과 겨루게 되는데, 그때 이미 왕건은 영산강의 중요성을 알고 있었지 않나 생각해 봅니다. 이때 완사천에서 오씨처녀를 만나 부부의 인연을 맺게 되었고 고려 건국의 힘을 얻게 되었던 것입니다. 물론 둘 사이에 태어난 아들이 2대왕 혜종이 됨으로 인해 나주를 어향이라고 불리우게 하였고 오씨처녀는 장화왕후(莊和王后)라 불리게 되었던 것입니다. 완사천 일대에는 흥룡사(興龍寺)라는 큰 절이 있었으며, 절 앞에는 혜종의 소상을 모신 혜종사(惠宗祠)가 있었다고 합니다만 지금은 그 흔적을 찾을 수 없습니다. 기록으로 보아 조선초기 세종년간에 폐찰된 것으로 추정합니다. 이 완사천에는 왕건과 오씨처녀의 아름다운 전설이 서려 있습니다. (전설편 클릭) 조만간 이곳에 완사천 조형물이 들어서게 되고 조경작업을 통해 아름답고 의미있는 공간으로 만들어 질 것입니다. 그때 다시 여러분들을 초대하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