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없음

[스크랩] (시와 사람 ) 45호 신인상 당선작-전숙

전숙 2007. 6. 27. 15:42
*봄날에*
-전숙-

다시 봄이 오고
삼동 어둠을 건너온
엉겅퀴는 가시꽃을 피우고
그리고 부전나비가 날아왔다
희고 부드러운 마음이
가시투성이 가슴에 앉는다

혹여 길손의 마음이 베일까
저어하던 가시는
날카로운 촉수를 등 돌려
제 심장 복판에 꽂는다
생살을 태우는 불덩이가
섶이 타오르듯 번져갔다

순해진 가슴
널찍이 열어젖히고
나비에게 물리는 꽃젖

어떻게 알았을까, 그 속 깊은 맛을
나비가 첫손가락으로 좋아하는 엉겅퀴꽃

다숩고 환한 봄날에.

******************

*보시(布施)*
-전숙-

밤 껍질을 벗기니
작은 명줄이
젖줄을 문 채 졸고 있다
통째로 버리기 아까워
성한 쪽만 도려내어 맛을 본다
혀끝에서 웅성거리던 단맛은
벌레의 단잠 속으로
분자이동이 끝난 뒤였다
남아있는 씁쓸한 그늘 한 자락
벌레에게 미운 마음을 돌리려는데
밤 속살의 검은 멍이
나를 쏘아본다
일 년의 내공을 보시하는데
벌레의 단잠이나
내 혀끝이나
차별하지 않겠다는 단호한 눈빛이었다

등신불은 미동도 없이
엄격한 설법 중이다.

*************************

*대물림*
-전숙-

오래된 숲길이 기도중이다
삭아 내린 속내를 은근히 내보이는 고목
살포시 익숙한 체취를 벌름거린다
백동장식에 수북이 쌓인
육십 년 묵은 연분이 뿌옇게 흘러내린다
스물두 살에 시집온 어머니를 따라
실밥 터진 숲길을 걸어 들어간다
잔가지가 찢긴 수(壽)자와 복(福)자는
아직도 신혼인 양 속정이 살갑다
접이접이 추억이 포개진 길
말끔하게 지워내면 가벼워지는 걸까
내 갓난 시절처럼 품에 안기셨던 어머니
서리서리 개켜진 정한 다 털어내고
이승을 불어간 서느런 바람이 되셨을까
지워진 어머니의 길 위에
여백 없는 내 그림을 그린다
오래된 숲길을 돌아 나온 대물림은
다시 딸의 푸른 허접을
안마당에 옮겨 심고
군불도 안 드는 윗목에 뿌리내린다
쉿, 정화수 한 사발 떠놓고
목하 발원기도 중이시다.
********************

*길고양이*
- 전숙-

어느 날 문득
나에게 왔던 한 마리 길고양이
햇살그네에서 흔들리던 눈빛은
트럭바퀴의 어두운 회로에 감기고
잘려나간 늦가을 아침 햇살마냥
나는 목울대가 한동안 벌겋게 부어올랐다
거칠은 노숙의 질곡에서
제 눈빛과 엉긴 동전 한 닢은
어머니의 주먹밥처럼 사무쳤을까
오만한 주먹밥 한 덩이에
안주머니에 깊이 묻어둔 마지막 발톱
생피가 복받치도록 뽑히지는 않았을까

은하수를 흘러가던 고양이의 눈에서
빛나던 별똥별 하나
우정의 눈짓처럼
챙그렁,
내 우그러든 깡통에 흘러들고
깡통 은하수엔
길고양이의 동전이
다순 주먹밥으로 빛나고 있다.
*************************

*가시*
- 전숙-

지인에게서 선물 받은 배추 몇 포기, 바쁘다는 핑계로 부엌귀퉁이에 아무렇게나 쌓아두었다. 배추쌈을 하려고 한 포기 들어내니 겉보기에는 멀쩡해보이던 배추들이, 내장은 푹푹 썩고 있었다. 쟤네들에게 장미처럼 가시가 있었더라면 하는 뜬금없는 생각이 떠올랐다. 가시들은 서로의 간격만큼 마주 보면서 이웃의 날숨에 차오르는 열기를 다독였으리라. 순간 내 몸에서도 고슴도치처럼 작은 가시들이 마구 돋아났다. 가시들은 제 오지랖만큼의 간격을 내어 누군가의 날숨에 타들어가는 내 들숨을 식혀주었다. 싱싱한 배추이파리들이 쑥쑥 팔을 뻗어왔다.



















출처 : 시사랑 사람들
글쓴이 : 맑음 원글보기
메모 :